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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역사 에피소드

  • 12. 칠암캠퍼스(구.경남과기대) 진농인의 얼을 담은 곳, 칠암동천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에는 ‘칠암동천’이라는 곳이 있다.구 경남과기대 개교 77주년에 세워진 것으로 대표 상징물인 진농탑과 더불어 함께 떠오르는 상징적인 공간이다.칠암동천 | 1991 | 1992학년도 졸업앨범칠암동천 조성 전 옛 양어장 터(추정) | 1970년대(추정) | 송영민 교수 기증칠암동천(경남과학기술대학교 110년사 발췌문)… 1987년 4월 30일에 제막된 칠암동천은 진농인의 얼을 담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칠암캠퍼스 동편의 옛 양어장 터에 조성한 1,150㎡의 아담한 정원이다.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지세를 띤 언덕에 가로 4m, 세로 2m, 높이 3m의 크기에 무게가 40톤이 넘는 주석(主石)을 중심으로 일곱 개의 바위들이 북두칠성의 형상을 이루며 늘어서 있다. 잔디가 깔린 주변에는 소나무, 오죽(烏竹), 느티나무로 울타리를 대신하고 고사리와 철쭉을 심어 고유의 전통 정원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입구 양쪽에는 교목(校木)인 멀구슬나무를 심었다. 주석은 학교의 상징인 황소가 앉아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인데 ‘진농인’을 상징한다. 큰 바위가 일곱 개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칠암’을 재현하고, 산천과 하늘을 모두 담은 공간 곧 신선이 사는 세계를 가리키는 이름이 ‘칠암동천’이다. 파성 설창수 동문(21회)이 작명하고 비문을 썼다. 주석 밑에는 자연석으로 꾸민 ‘진농인의 진혼단(鎭魂壇)’이 있다. …경남과학기술대학교 110년사 발췌이 곳은 1980년 재학생들이 먼저 뜻을 모아 건립을 위한 기금 모금을 시작했고, 동문과 지역사회, 당시 김상철 학장과 교직원들이 동참하며 7년의 준비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1987년 4월 30일에 제막식을 가졌다.칠암동천 제막식 | 1987.4.30. | 진농(교지) 제8호조성이 완료된 칠암동천 모습 | 1987.4. | 진농(교지) 제8호당시 제막식 기사에는 칠암동천을 조성하기까지의 과정과 경과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1980년 3월 15일 대학 당국과 재학생이 ‘진농탑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모금을 시작하였고, 이것을 모체로 1985년 김상철 학장을 중심으로 대학 당국과 직원, 학생, 동문들이 함께하여 본격적인 칠암동천 조성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대학 동문과 관계자들이 직접 지리산 국립공원 일대와 경남 일원을 답사하여 칠암동천에 놓일 돌과 조경수들을 찾아 나섰고, 환경계획연구소의 설계와 교수회의를 거쳐 지금의 칠암동천의 모습으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칠암동천의 작명과 비문 작성, 설계비와 모표 제작 등 그 과정에서 투입된 인력과 장비, 재료를 상세하게 기재하고 있다.“칠암 동천비 제막식” 기사 / 1987.5.23. / 진농전문대학보 121호(3면)  “칠암 동천비 제막식” 기사 | 1987.5.23. | 진농전문대학보 121호그러던 중 지리산 국립공원 일대의 산청군 시천면 곡점에 있는 내대천과 중산천이 합류하는 지점인 삼각지 강저에서 황우의 좌상처럼, 사가자 물개의 모양으로 보이는 돌을 윤표 동문(35회)의 도움으로 5차례에 걸친 굴착작업으로 86년 2월 23일 운반하게 되었다. 또 다른 6개의 부석과 조경수는 87년 1월부터 3월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서부 경남 일원을 답사하여 부석 및 조경수를 선정하게 되었다. 부석 6개는 하동군 청암면 청암댐 수몰지구에서 정준옥 동문(48회), 권영우 사장(삼화 개척 주식회사)의 협력으로 지난 3월 31일 새벽 2시에 운반하게 되었다. 조경수인 소나무 9그루는 진양군 속사리 산록에 위치한것을 박준상씨의 협력으로 4월 17일 굴취·운반하였다. … 6개 부석은 칠성좌(북두칠성)의 모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조경수인 소나무, 오죽, 느티나무, 고사리류 철쑥류 등은 한국 고유의 전통공간 분위기를 연출해 낼 수 있도록 하였고, 입구 양쪽에 멀구슬나무를 식재하였다. 정충식 환경계획연구소가 설계한 것을 교수회의에서 채택하여 조경과 교수와 재경 칠암조경회 정준옥 동문(48회)의 협조로 건설되었다.파성 설창수 동문(21회)은 서기 1987년 4월 30일 이 비를 세움에 있어 김상철 학장(33회)의 청족을 받아 칠암동천이라는 작명과 아울러 비문의 글을 썼고, 은초 정명수 동문(16회)과 취산 김호인 동문(50회)은 비문의 글을 썼다. 특히 칠암동천 설계비와 모표 제작은 정준옥 동문이 기증하였으며 표색과 비문의 새김은 조현제(강남 석공장)씨의 협조로 건설되었다. 칠암동천이 완성되기까지 투입된 인력과 장비 및 재료를 요약해보면 연 인원 300여 명이 동원되었으며, 이 중 조경과 학생 60여 명이 협력했다. 주요 장비로는 삼환기업의 75톤급 크레인을 비롯하여 30여대의 중장비가 동원되었다. 사용된 재료는 성토량 1,500톤, 판석 27톤, 기초석 150톤, 시멘트 100포, 모래70톤, 자갈 140톤, 보도블럭 2,200장, 경계석 60여 개가 소요되었다.…칠암동천이 조성되고 재학생들은 멀구슬 축제, 동문들은 기별 친선 경기 대회 시작 전 이곳에 모여 제사를 지내며 모교와 진농인의 발전을 기원했다. 대학 생활 일상에서도 축제 때는 전시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학내 동아리 모집과 졸업앨범 사진 촬영 등 점차 학내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멀구슬 대동제 개막 전 총학생회 주도로 진행된 제례 | 1988.10. | 1988학년도 졸업앨범칠암동천에서 개최된 멀구슬 대동제 전시회 | 1991.10. | 1992학년도 졸업앨범칠암동천 앞에서 동아리 모집 홍보 활동 | 1995.3.14. | 진주산업대신문 제164호  1989년 농업토목학과 단체사진 | 1988 | 1989 졸업앨범            1994 동아리연합회 단체사진 | 1994 | 1995 졸업앨범  1990년 임업과 2반 졸업사진 | 1989 | 1990 졸업앨범대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인 칠암동천을 배경으로 찍은 수많은 졸업사진들칠암동천을 소개하는 문병원 교수의 기사 / 1992.11.9. / 진주산업대신문 제171호(8면)… 칠암동천은 밤이면 북녘하늘을 지키는 북두칠성처럼 천년만년 우리 진산인을 영원히 보호할 것이다. (기사 내용 발췌)또 경남과기대 시절(~’21년 2월) 개교기념일(4월 30일)에 맞춰 해마다 ‘칠암동천제’를 지냈는데 이는 한해의 안녕과 대학의 발전을 기원하기 위한 제례의식이었다.졸업앨범에 수록된 칠암동천제 행사 사진 | 1989.4. | 1989학년도 졸업앨범  칠암동천제 | 1999. 4. | 구.경남과기대 기획홍보과 앨범2021년 3월 구 경상대와 경남과기대가 경상국립대로 통합된 후에도 33년의 전통에 따라 매년 칠암동천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양 대학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대학 구성원의 안녕과 소속감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이다. 경상국립대학교 공식 출범식 및 칠암동천제 행사 | 2021.4.30. | 경상국립대학교 홍보실 경상국립대 칠암동천제 행사 모습 | 2022.4.29. | 경상국립대학교 홍보실그동안 칠암동천은 "진농인의 얼이 담긴 곳"으로 대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잎으로도 칠암동천 및 동천제의 정신과 의미를 계승하여 대학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 대학 구성원들의 마음의 구심점이 되는 뜻깊은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다.칠암동천 | 2020 | 경남과기대 11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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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 가좌캠퍼스(구. 경상대) 통영수전과 통합을 이루다 

    통영수전과의 통합의 원동력은 4년제 대학승격에 대한 통영수전의 내부적 열망이었다. 1983년부터 통영수전 내에서 4년제 대학승격 여론이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통영수전은 이를 동력으로 4년제 대학승격 추진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7년여간의 4년제 대학승격 추진활동이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던 가운데 1990년 4월 말, 통영수전의 4년제 단독승격이 대통령 공약사업으로 타 지역 5개 전문대와 함께 4년제 승격 심의대상에 올라 있다는 고무적인 소식이 전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9월 5일, 통영수전은 문교부의 1991학년도 4년제 대학승격 발표에서 탈락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4년제 승격촉구 범학생시민 평화대행진 | 연도미상이후부터 통영수전 교수협의회를 중심으로 경상대와 병합승격 안이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표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학생회와 동문회는 단독승격이 아니면 전문대를 고수한다는 입장을 가졌고, 교수협의회는 병합승격이라 하더라도 승격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통영수전 교수협의회가 병합승격을 고려하게 된 중요한 두 가지 배경 가운데 한 가지는 문교부의 전문대학 육성정책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1987년에 여수수산전문대가 여수수산대학으로 승격한 것이었다. 교수협의회는 이런 배경이 통영수전의 단독승격 전망을 어둡게 한다고 보았다.(참고로, 여수수산대학은 1998년에 여수대학교로 개편되었고 이후 2006년에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로 통합되었다.)경상대-통영수전 통합 합의서 | 1991.5.경상대-통영수전 통합 최종합의서 조인 | 1991.3.9.1991년 8월 13일, 통영수전 본부는 우리 대학 본부와 가좌캠퍼스에서 양교의 통합합의서에 전격적으로 서명하고 다음 날 교수협의회의 추인을 거쳐 교육부에 통합합의서를 제출하였다. 교육부는 8월 19일에 양교의 통합에 따른 개편 지침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9월 5일, 통영수전 본부는 통영수전 동문회의 반발로 인해 우리 대학에 통합철회를 통보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통영수전과 우리 대학의 일차 통합시도는 불발로 끝이 나게 되었다.1992년 4월, 통영수전의 4년제 승격은 다시 한 번 대통령의 공약사항이 되었다. 1993년 당시 교육부는 전문대 육성 방침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대통령과 지역 국회의원의 전문대 4년제 승격 공약과 상충하는 것이었다. 교육부는 그동안 병합승격을 종용해 온 반면 통영수전의 동문회와 학생회는 우리 대학과의 병합승격에 심하게 반대를 해 왔다. 1993년 12월, 결국 정부의 병합승격계획은 사실상 무산된 것으로 평가되었다. 1993년 12월, 통영수전의 본부와 총동창회는 충무시의회와 통영군의회에 통영수전의 4년제 승격에 적극 나서줄 것을 요청하는 건의서를 전달하였으며 두 의회는 즉각적으로 이러한 내용의 건의문을 채택하였다.그런 활동에 힘입어 1994년 1월 초, 통영수전의 4년제 승격이 32건의 대통령 공약사업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되었다.그러나 그 공약사업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고 1994년 9월, 교육부는 통영수전에 우리 대학과의 통합에 관한 의견을 묻는 공문을 발송하기에 이르렀다. 9월 30일, 통영수전과 우리 대학은 1991년 8월에 이어 다시 한 번 통합신청서를 교육부에 제출하였다. 1994년 10월, 통영수전의 동창회는 통합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이어서 충무시 의회와 통영군의회도 교육부에 병합승격 반대탄원서를 제출하였다.우리 대학이 통영수전과의 통합에 합의한 주된 배경으로는 국책공대 선정에서 탈락된 것에서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관보 제12951호 | 1995.2.28. 국가기록원대통령령 제14,539호 국립학교설치령이 증개정되어 공포되었다. 국립학교설치령의 주요 개정사유로는, 통영수산전문대학을 경상대학교 수산대학으로 개편하는 것이었다.1994년 12월, 통영수전과 우리 대학의 통합은 대통령의 재가를 받게 되었다. 1995년 3월 1일, 대통령령 제14539호에 의해 통영수전은 우리 대학과 통합되어 경상대학교 수산대학이 되었으며, 이때 각 학과의 정원은 80명에서 40명으로 감축되었다, 1997년 3월, 수산대학은 해양과학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수산대학 후기 신입생 모집 | 1995.1.통영수산전문대학이 경상대학교 수산대학으로 개편 통합 후 후기 신입생모집에 대한 경상대신문 기사경상대학교 통영캠퍼스 수산대학 | 1998. 통합 당시 통영수전의 규모는 9개 학과에 재학생 1,680명이었는데, 2017년 4월 20일 ‘경상남도 수산전습소 개소 100주년’ 기념일 현재 해양과학대학의 규모는 10개 학과, 2개 대학원에 재학생 1,900명이다. 이는 우리 대학과의 통합이 통영수전의 규모를 위축시킬 것이라는 병합 승격 반대 명분을 무색하게 하는 결과이다.경상국립대학교 통영캠퍼스 해양과학대학 항공사진 | 2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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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가좌캠퍼스(구. 경상대) 격동의 시대를 보내다 

    1987년과 1988년은 제5공화국에서 제6공화국으로 넘어오는 역사적 격변기로1987년 초의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5월의 연세대 이한열 군 최류탄 사망 사건을 비롯한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이를 규탄하는 시위와 집회가 이어졌다.진주시청 앞 故 이한열군 추모식 광경 |1987.7.9.故 이한열군 추모식 및 최루탄정권 규탄대회가 경상대 민주광장과 진주시청 앞에서 있었다.선두에 "이한열열사의 뜻을 받들자"는 현수막과 "이땅에서 영원히 최루탄을 추방하자"는 현수막을 들고 경상대 학생들이 행진하고 있다.   진주시청 앞에서 개최된 시국토론회 모습 | 1987.6.15. 창원시민주화운동자료경상대학생의 주도로 시민들과 함께하는 시국토론회가 개최되었다.전국을 휩쓸었던 민주화 열기가 진주에서도 불붙어 6월 항쟁의 절정이 진주에서 경상대 학생들의 주도로 전개되었다.1987년 6월 15일부터 6월 18일까지 진주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시청 앞 광장에서 시민토론회를 갖는 등 진주의 민주화 열기를 불태웠다. 16일에는 진주의 역전파출소를 비롯한 4곳의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져 불태우고 17일에는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하여 LPG 운반트럭을 빼앗아 시위를 벌이고 경전선 열차의 운행을 잠시 중지시키는 등 진주의 민주화 열기는 6월 항쟁의 절정으로 볼 수 있다.11톤 LPG가스 차량 두대를 탈취해 투쟁 중인 경상대 학생들 | 1987.6.17. 창원시민주화운동자료6.29선언의 기폭제가 된 6월 민주화투쟁으로 1987년 6월 17일 남해고속도로에서 LPG차량을 탈취하여 항쟁하던 경상대 학생들의 구호는 '죽자'였다.칠암캠퍼스 교문 앞 학생과 경찰의 투석전 | 1988.4.2.1988년 4월 2일 칠암캠퍼스에서 ‘진주지역 총학생회 협의회’결성을 마치고 난 뒤, ‘민주 통일과 민족의 내일’이라는 주제로 약 4천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백기완 씨의 강연회가 있었다. 강연회가 끝난 뒤 2천여 명의 학생, 시민들은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평화 대행진’을 갖기로 결의하고 학내를 한 바퀴 돈 다음, 교문을 나서려 했으나 경찰이 시위 군중을 막으면서 최루탄을 쏘자 시위대는 투석전으로 맞섰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부상 학생들이 생기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그 후 계속 이어졌다. 4.4 항쟁 | 1988.4.4.그러던 중 4월 4일에는 경전선 열차 화재 사건이 일어나고 언론들이 이날의 사태를 보도하면서 경찰의 과잉진압이 원인이 된 것을 무시한 채 학생들의 과격행위만 확대 보도하여 학생들을 폭도로 매도하였다. 당연히 학생들은‘명예회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것이 ‘4.2. 및 4.4. 항쟁’이다. 4월 11일부터 시작된 3차에 걸친 ‘명예회복 투쟁기간’은 학교 측에 진주 경찰서장의 사과와, 해명광고 게재를 요구하고 행정실 점거농성을 벌이는 바람에 또 다시 행정마비를 가져오는 등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3차 명예회복 투쟁기간’ 중 가두에서 유인물을 나눠 주던 총학생회장이 구속되고 교수협의회가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우여곡절과 진통 끝에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경상대 학생의 명예회복 투쟁 | 19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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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가좌캠퍼스(구. 경상대) 가좌캠퍼스에 새로운 터를 잡다 

    1970년 후반기에 이르러 급속한 경제개발의 성과와 함께 고급인력의 확충, 수급이 절실한 현실로 나타났다.이에 정부는 지방 국립대학의 중점적인 육성․확충 계획안을 마련하였다.이러한 정책에 따라 1978년도 경상대학은 종합대학으로 승격 및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기존의 칠암동의 협소한 부지난을 해결할 새로운 가좌동 이전계획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좌) 경상대학 이전사업 건설본부 현판식 | 1979.3.12.(우) 캠퍼스 부지 측량조사 및 새캠퍼스 조성을 위한 이전부지(가좌동 일대) 측량 | 1979경상대학교 가좌캠퍼스 건설계획도 | 1982. 대학의 필요한 부지인 30여 만평을 가좌동에 확보하고 그 계획안을 정부에 제출하여1978년 10월 6일 캠퍼스 이전 계획이 마침내 승인 받게 되었다.가좌 캠퍼스의 건설사업은 이전계획의 대통령 재가에 이어 문교부승인(1978. 10. 26.)이 있었고, 경상대학교 종합 기본계획 보고서의 완성(1979. 11.)과 함께 같은 해 11월 30일 첫 토목공사가 시작되어 12월 26일에 가좌캠퍼스 건설사업을 위한 기공식이 농학관 부지에서 거행 되었다.경상대학 이전 건설공사 기공식 | 1979.12.26.가좌캠퍼스에 조성을 위한 건축공사의 진행과 함께 기존 칠암캠퍼스에서 가좌캠퍼스로 이전 사업도 진행되었다. 농학관이 준공(1981. 9. 21)되고, 1차로 농과대학과 법경대학이 가좌캠퍼스로 이전(1983. 12. 14)하였고 같은 해 교양학관이 준공(1982. 7. 13)되면서, 교양과정부가 이전(1982. 8. 16)되었다.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후 대학의 기구‧조직이 재편성되고 캠퍼스 조성사업도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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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가좌캠퍼스(구. 경상대) 개척 정신, 개척탑을 세우자 

    개척의 탑은 학생들의 성금으로써 경상 대학의 영원한 상징으로 개척 정신을 기리고자 건립되었다. 제25대 박창명 학생회장과 8명의 학생회 간부진으로 추진 위원이 결성되었다. 또한 형성해 학장, 빈영호 교무과장, 이희석 학생과장, 김상조 문화재 전문위원을 지도위원으로 위촉하여 추진되었다.개척탑건립추진위원회 회의 | 1973, 문인규 동문 기증개척의 탑 건립추친위원 일동 | 1973. 개척의 탑의 높이는 7.5m 폭은 1.5m로 설계는 김상조, 탑명 휘호는 정명수, 글 지은이는 려증동, 글쓴이는 강영일이다.탑석은 산청군 신안면 원지 주민들의 협조로 공군 9821부대와 육일운수 등에서 지원하여 5월 8일 기공할 수 있었다.개척의 탑 기공식 | 1973.5. 박창명 동문 기증개척의 탑 골조공사 완성 | 1973.(추정)개척의 탑 공사 모습 | 1973.5. 박창명 동문 기증개척의 탑은 1973년 5월 8일 부터 7월 10일까지 약 2개월 간의 공사기간이 소요되었고 총 공사비 198만여원을 들었다. 그러나 당시 학생들의 의지와 달리 개척탑을 건립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개척탑 보수 공사(2008.8.18.) 시 발견된 탑지에는 "재정난으로 허덕이는 중 민관식 문교부 장관께서 50만원을 희사하여 순조로이 진척되어 흥농토건사 진주석공공업사의 시공으로 7월 11일 제막하게 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개척의 탑 탑지 | 1973.7.11.개척의 탑의 건립 경위를 적어 건립 당시 탑배면에 함께 묻었고 개척탑 명판 보수공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탑지를 발견하였다. 문교부 장관까지 나서서 도와주었기에 비로소 개척탑을 준공을 하게 되었다.개척의 탑 제막식 | 197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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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가좌캠퍼스(구. 경상대) 대학설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펼치다 

    1948년 진주농림중학교 황운성 교장을 중심으로 한 "진주농과대학 설립 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진주농림중학교를 비롯한 경상남도 내 17개 농업학교에서 배출되는 많은 졸업생의 진학 문제가 지역사회의 중요한 현안으로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서부 경남의 교육, 문화, 행정 및 교통의 중심지인 진주에 농과대학이 설립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추진위원회에는 황운성 교장 외에 진농 졸업생인 김재규, 고영근, 김택조, 권종완, 김용표, 장성룡, 김인식 등이 참여하였다. 진주(晋州)에 농과대학설립(農科大學設立)? 신학기목표(新學期目標)로 기성운동맹렬(期成運動猛烈) | 1947.2.15. 민주중보, 국립중앙도서관농과대학 설립 추진위원회 구성에 이어 진주농림중학교 기성회를 중학교 기성회와 농과대학 설립 기성회로 이원화하였다. 대학설립을 위한 기성회의 큰 사업의 하나가 기성회 회원권의 판매에 의한 모금이었다. 기성회 회원권은 1946년 당시 진주농림학교 학생에게 1인당 10매씩(1매당 100원)을 나누어 주고 겨울방학 동안 판매하도록 하여 모금하였는데 이것이 기금의 큰 몫을 차지하였다. 당시 학제를 보면 1946년 3월 1일 진주공립농림학교로 개칭되고 모두 20학급으로 편성되었으나 기성회 회원권을 판매한 겨울 학기에는 1946년 8월 31일자로 진주농림중학교(6년제)로 개칭, 신학제 실시에 따라 수업연한이 6년제로 되면서 농업과 2학급, 임업과․축산과․농업토목과 각 1학급씩 모두 30학급으로 정원 1,500명의 큰 규모의 농림학교였기 때문에 회원권 모금의 몫이 컸던 것이다. 당시 진주농림중학교(6년제)의 최고 학년 대부분의 재학생이 뒷날 진주농과대학의 첫 입학생이 되고, 첫 졸업생이 된 것은 그러한 인연 때문이기도 하다.진주농과대학(칠암동 92번지) 캠퍼스 조성을 위한 토지매입(매도협정) 영수증 | 1954.3.칠암동 토지매입(매도협정)의 조건에는 [ 1) 부지는 현 시세의 30% 이상의 가격으로, 2) 대지는 현 시세의 50% 이상의 가격으로, 3) 가옥은 초가를 함석집으로 개축할수 있게 세세의 두배로 보장하고, 4) 매도자 중 자녀가 진주농과대학에 진학 희망시 우선 입학 허용 ] 이 있었다.기성회 회원권에 의한 기금은 진주농림학교 제2교사 신축에 쓰이기도 하고 오늘날의 칠암의학캠퍼스(칠암동 92번지) 부지매입에도 쓰여 졌다고 한다.진주농과대학이 설립되어 10년간의 요람기를 진주농림학교 안에서 같이 지내고, 칠암캠퍼스로 독립하여 발전되어 내려온 과거사를 살펴볼 때, 진주농과대학은 진주농림학교가 있었고, 진주농림학교 졸업생 일색의 대학설립 추진위원회가 있었기 때문에 설립될 수 있었으며, 설립 추진 당시의 진주농림학교의 황운성 교장, 변경섭 교감 그리고 전 교직원의 이해와 협조가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진주농과대학과 진주농림중학교 | 1955.(추정)진주농과대학(칠암동 92번지, 사진의 하단)과 숲과 넓은 논밭의 진주농림중학교(칠암동 150번지, 사진의 상단)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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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칠암캠퍼스(구. 경남과기대) 4년제 승격, 한마음으로 이뤄내다 

    1980년대 들어 전문대학들은 사회적으로 심화되는 구직난과 고학력자를 선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발전 방향에 대해 모색하였고,  진주농림전문대학도 예외는 아니었다.'진농은 이래서 개방대학으로 승격되어야합니다' 대자보 | 19911984년부터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본격적인 4년제 대학 승격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89년부터다.   4년제 대학 승격을 위한 공청회 | 1989.1.교수협의회가 주관한 이날 공청회에서는 산업사회에 부응한 학제의 다양화, 지방대학의 육성책, 교육의 자율성 등을 주제로 한 발표가 이어졌다. 또한 동문과 지역사회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한지역사회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추진운동을 펴나가기로 결의를 하였다.4년제 대학 승격을 위한 공청회가 여러 차례 개최되고, 진주농림전문대학이 4년제 산업대학으로 승격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지역사회에 확산되었다.4년제 개방대학 승격을 위한 학생 결의대회 및 거리행진 | 1991.6.'교육의장! 농전을 개방대학으로!"와 '진농인의 지혜로 개방대학쟁취하자!'의 슬로건으로 현수막을 내걸고 학생들이 결의대회 열었고, 이후 거리 행진에 나섰다. 당시 15개학과 1,000여명이 참석한 대규모 집회였다. 교직원, 학생, 동문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힘을 다한 결과, 진주농림전문대학은 1993년 3월 진주산업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산업대학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하고 학과와 행정부서를 개편하는 한편 학교시설을 확충했다. 진주산업대학교 대학종합발전계획 수립을 위한 공청회 | 1993.(추정)진주산업대학교 종합기본계획 배치도에 관한 공청회 | 1994.3.24.단시간 내에 종합대학의 기틀을 다진 진주산업대학교(구. 경남과기대)는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1998년부터 6년간 우수산업대학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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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칠암캠퍼스(구. 경남과기대) 칠암벌의 상징 진농종 다시 울리다 

    칠암캠퍼스 옛 정문을 들어서서 오래 세월 학교를 지켜 온 울창한 수림을 지난 진농관(구. 경남과기대박물관) 앞에 다다르면 종탑이 우뚝 서 있다. 지난 진주공립농업학교 시절에 학생들의 일과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진농종' 을 복원한 것으로, 2000년 동문에 의해 세워져 학교의 역사를 알리고 동문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진농관과 진농탑 | 2009. 6. 15.칠암벌의 상징이었던 '진농종'은 1931년 4월 2일 교사가 남중학교 부지에서 현 위치로 이전할 당시 본관 건물 중앙 옥상에 설치되었다가 교사가 신축되면서 1972년 11월에 철거되었다. 종이 철거된 후에는 종소리 대신 사이렌이나 전령이 이용되었다.철거된 진농종 | 1983.7.17.동문들은 1999년 4월 30일 개교 89주년 총동창회 정기총회에서 종탑을 다시 세우는 사업을 논의하여 개교 90주년을 기념하여 종탑을 설립하기로 하였다.종탑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화강석으로 마감하였으며, 규모와 모형은 상징성을 고려하여 칠암을 뜻하는 7m 높이로, 평면 기단은 개교기념일인 4월 30일을 상징하는 430cm로 제작되었다. 바닥은 진주산업대학교에서 자란 느티나무의 나이테를 그대로 동판에 새겨 10년 주기로 묶어 2000년도까지의 90주년을 표기하였다. 삼면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지향하는 상징 마크를 부착하였다.종탑의 비문은 김상철 전 학장(33회)이 지었으며, 김호인 동문(51회)이 글씨를 썼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진농종”추억 속의 옛 종을 다시 세운다. 이 종은 1931년 4월 2일 본교가 이 자리에 옮겼을 때, 본관 중앙에 설치되어 40여 년간 학교생활의 시간을 알리는 중요한 일을 맡아 왔다. 교사가 신축되면서 1972년 11월에 헐리게 되어 그동안 박물관에 있었으나, 개교 9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모교와 동문 여러분의 뜻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칠암벌을 스쳐 간 수많은 동문의 가슴에 남아 있던 종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는 날, 이 종은 모교의 찬란한 역사를 증언하며 온 누리를 영원히 메아리 칠 것이다.진농종 종탑 준공식과 타종 행사 | 2000.4.30.'진농종'을 복원 하여 세운 종탑은 진주산업대학교(구. 경남과기대) 개교 90주년을 기념하여 준공식을 가졌다.준공식은 2000년 4월 30일에 진농관(구. 경남과기대 박물관) 앞에서 열렸고 이유근 총장, 고만석 총동창회장, 이토 아키라 일본 진농 총동창회장, 일본 동문과 가족 일행등이 참석했다.종탑의 '진농종'을 내빈과 원로 동문이 10년 주기를 1회로 하여 9회를 타종합으로써 개교 90주년을 기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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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칠암캠퍼스(구. 경남과기대) 진농탑을 건립하다 

    진농탑은 진농의 상징으로 건립된 조형물이다. 1983년 3월부터 1984년 6월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고 1억 4천만 원의 예산이 들었다. ‘진농얼의 전통을 이어받은 후배들이 동서 문화를 집대성하여 행복과 광명의 빛으로 밝아오는 미래의 주역으로 커 나가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은 이 탑은 당시 경상대 사범대에 재직하던 정도화 교수가 설계했다.진주농림전문대학 시기 진농탑 건립 | 1983.(추정)진농탑 건립 계획은 1980년 5월에 재학생들이 주축이 된 진농탑 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시작되었다. 추진위원회는 ‘긴 역사의 진농에 농학도의 상징적, 정신적 지주가 될 조형물’을 세우자는 취지문을 만들고 1982년까지 재학생 모금 운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교내 모금 운동과 동시에 동문 선배들의 찬조도 받아 250만 원의 기금을 모았다. 상징탑을 건립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모금액이었지만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애교심에 화답하고자 예산을 확보해 상징탑 건립을 결정했다.진농탑과 진주농림전문대학 시기 교문 | 1984.(추정)수직으로 솟은 탑신의 형태는 진출, 비약, 웅비, 발전 등의 강렬한 의미를 나타낸다.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인 진농의 대학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탑신 중앙의 펼쳐진 책모양은 높은 학문과 진리 탐구 정신을 뜻하며, 그 의미가 점차 승화되면서 고결하고 높은 이상을 지닌 학의 형태로 환원되고 있다. 학이 농업의 상징인 벼 이삭을 물고 진리의 광명을 상징하는 태양을 향해서 비상하는 형상은 진리, 광명, 빛나는 학문, 드높은 이상 등을 뜻한다. 이렇게 진농탑에는 높은 이상의 진리 탐구를 성취하여 온 누리에 빛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 정문과 진농탑 | 202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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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칠암캠퍼스(구. 경남과기대) 피란 중에 학교의 역사를 지켜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정부는 대전, 대구로 옮겨 가며 대책을 찾았으나 전열을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결국 부산을 임시수도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전세가 날로 험악하고 불리해져 포성이 하동 방면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진주에도 긴박한 사태가 눈앞에 닥쳤다.  교직원들도 각기 피란길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학교는 거의 텅 빈 상태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몇몇 뜻있는 교직원들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학교를 끝까지 지켰다. 1950년 7월 30일 진주가 함락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할 즈음에는 최후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김용관 교장, 이규석 선생, 서규대 선생 등은 40년간 간직해 오던 많은 서류 중 학적부 등 중요 서류들을 당시 무기고 옆 수목원(현재 쥬라기공원 자리) 한 모퉁이에 구덩이를 파서 묻고서야 피란길에 나섰다. 칠암캠퍼스 쥬라기공원 전경 | 2011  도심 속 공원인 "쥬라기 공원"은 2016년 16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받았다   6.25 전쟁 시기 미보병 1연대가 진주에서 후퇴하는 모습 | 1950.7.31. 국가기록원 진주는 북한군이 낙동강 전투의 보급 기지로 삼고 완강한 저항을 한 곳이기 때문에 여느 도시 못지않게 피해가 컸다. 진주농림중학교도 예외 없이 교내 곳곳이 폭격으로 웅덩이가 파이거나 목조건물을 비롯하여 수목에 이르기까지 전투기의 기총 사격에 구멍이 생겼다.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거나 허리가 잘리는 등의 폐허가 되어 버렸다. 북한군이 후퇴할 때 버리고 간 각종 포탄과 불발탄 등도 곳곳에 널려 있었다. 심지어 북한군은 교내에 지뢰까지 매설하는 바람에 나중에 국군이 주둔하면서 탐지기로 지뢰를 제거하였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본관(현 칠암캠퍼스) 건물 | 1950.(추정) 진주가 수복되자 교직원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일찍 돌아온 이들은 폐허 속에서도 학교를 열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1950년 10월 5일경 학교에 출근하여 개학을 서둘렀다. 학생들에게도 개별 통지를 하거나 학교를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등교를 독려하고 학생들이 출석하는 대로 수업을 시작하였다. 학교는 차츰 복구되어 11월 중순경에는 대다수 학생이 등교하여 수업을 받게 되었다. 파괴된 시설들은 한꺼번에 보수가 어려워 일부 학급은 운동장 모퉁이나 탱자나무 울타리 앞에서 노천수업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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