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방식
매트릭스3 레볼루션
박대윤 | 경상국립대 철학과 강사
매트릭스 3편은 매트릭스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으로 인간과 기계문명의 대립이 종식되는 것을 메인 스토리로 한다. 매트릭스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이해해 볼 수 있고, 영화에서 나오는 등장인물이나 상황 역시 여러가지 은유로 해석해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인간과 기계를 자본가와 노동자(브루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관점에서 이해해보고자 한다.
우선 2편의 마지막에서 네오는 아키텍트를 만나고 예언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즉 그는 메시아가 아니라 시스템의 부분, 시스템의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한편 기계(센티넬)의 공격을 받은 함정(ship)을 탈출하던 중 네오는 무언가 바뀌었다며, 기계들이 느껴진다고 말하고, 마치 스타워즈에서 제다이들이 포스를 쓰는 것처럼 손을 들고 기계(센티넬)들을 파괴시키고 기절하게 된다. 3편의 시작은 이 기절한 네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여기서 관점의 전환이 도입된다. 우선 매트릭스는 단순히 인간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3편 시작부에서 네오는 매트릭스에 접속하기 위한 장치 없이 기절한 상태에서 매트릭스와 연결된 어떤 가상공간에서 깨어나게 된다. 거기서 그는 프로그램들을 만나게 되고, 프로그램들이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이 상황을 이해하는 관점이 두 가지일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이 있고, 인간과 유사한 기계가 있다는 관점, 다른 하나는 인간이 기계를 닮았다는 것, 다시 말해 모든 것이 기계라는 것. 이 영화에서는 두 번째 관점이 중요하다.
한편 우리는 매트릭스 3편을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점, 혹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자본가는 자신의 자본을 증식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자본주의는 바로 이 자본의 증식이 핵심 가치이다. 그런데 이 증식은 자본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현실세계가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자본의 무한한 증식이 오히려 현실세계를 파괴하고, 최종적으로 이 자본주의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든다면 어떨까? 매트릭스 3편의 스미스는 바로 이 자본의 증식의 은유로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스미스는 매트릭스 내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자기자신으로, 즉 자본으로 바꾸어 낸다. 자본주의는 모든 가치를 자본으로 치환한다. 우리는 모든 인간적인 가치들이 자본적 가치로 계산되는 상황을 자주 목격하는데, 이러한 가치전도의 상황은 사회, 현실세계를 파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본의 증식만을 자본주의의 우선적 가치로 둘 때, 자본주의 자체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우리는 대공황을 통해서 이것을 보았다.
따라서 매트릭스 3편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혁명을 나름의 방식으로 전개시킨다. 자본가인 기계들은 자신의 도구였던 스미스, 즉 자본에 의해서 더 이상 자신들의 기계문명, 즉 자본주의를 작동시킬 수 없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체모순에 의해서 몰락할 것이고, 그때 공산혁명에 의해서 자본주의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예언과는 다르게 자본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기계문명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혁명의 방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독교적 방식, 메시아의 대속에 의한 희생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네오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스미스(자본)를 제거해 주는 것으로 기계문명의 인간문명에 대한 공격(즉 전쟁)을 종식할 것을 제안하고 기계문명은 이것을 받아들인다. 네오는 자신을 희생하여 기계문명과 인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평화를 가져온다. 그런데 이러한 매트릭스 3편의 혁명의 방식은 설득력을 가지는가? 영화속에서 기계들이 과연 약속이라는 가치, 계약이라는 가치를 따른다는 것이 가능할까? 너무나 인간적인 관점은 아닐까? 마지막에 아키텍트는 오라클을 찾아가서 이 평화가 얼마나 오래 갈 것이냐고 묻고, 오라클은 가능한한 오래가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도 너무나 인간적인 관점이 아닐까? 기계는 자신의 선택에 변덕을 부릴 것인가? 애초에 기계와 거래가 가능한가?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과 기계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매트릭스 3편에서 중요하게 다루어 지는 것이 기계도 사랑을 느낀다는 것, 즉 인간적이라고 불리는 감정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 기계들의 감정은 단순히 인간을 모방한 것일까? 결국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본성적 차이가 아니라 정도상의 차이는 아닐까, 혹은 앞서 이야기한 기계에 대한 두 관점 중 모든 것이 기계라는 관점이 여기서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을 그대로 자본가와 노동자로 대입해보자. 마르크스는 자본가와 노동자사이의 관념 자체가 다르다고 보았고, 어떻게 보면 존재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자본가와 노동자는 현대사회로 오면 올수록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내에서의 위치의 차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 위치는 여러 변수들에 의해서 극단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즉 자본가도 영원히 자본가가 아니며 노동자도 영원히 노동자가 아닐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특정한 개인의 희생이 혁명을 이룰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한번의 희생으로 혁명은 끝이 나거나 완결되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매트릭스 3편의 혁명에 대한 관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시스템은 영웅적인 어떤 사건에 의해서 해결되는 그런 시스템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은 자본의 증식이라는 목적을 위해 다양한 변수들이 조정되는 유동적인 시스템이기 때문이다.(즉 특정 형식을 고수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단 한번의 헌신적 희생으로 해결되는 것은 없다.
들뢰즈는 혁명을 되기(becoming)의 관점에서 사유한다. 우리가 매트릭스 3편처럼 고전적인 방식의 혁명을 생각한다면 그 혁명은 항상 실패한다. 모든 역사속에서의 혁명은 실패했다. 혁명은 완결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속에서 계속적으로 시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고 고착화될 때, 그 질서가 혁명이라고 불리는 사건의 결과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노예의 삶을 살게 된다. 왜냐하면 세계는 계속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과거 학생운동을 통해서 혁명을 꿈꾸던 젊은이들이 나이가 들어 반동적이 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본다. 그것은 그들이 혁명되기를 그만두고 현실세계에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고착화되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되기의 형식으로만 완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박대윤 | 경상국립대 들뢰즈랩의 연구원이며, 동 대학에서 <비판적 사고>를 강의하고 있으며 수년 째 지역 서점인 <진주문고>에서 철학에 관심 있는 시민들과 함께 철학책을 읽고 토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