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이미지출처 <세상의 모든 문화>, 양을 치는 몽골인
아래 이미지출처 <클립아트 코리아>

Everyday Philosophy <좌파와 우파>를 쓰다보니,
이 사례를 통해 유목적 분배distribution nomadique를 설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들뢰즈가 주장하는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테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마와 정확히 대립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여기저기에서 특히 5권 7장 <있음>에서
'<있음>의 의미는 다양하다'는 존재의 다의성equivocity이라는 테마를 전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는 목수로 있음과, [집을] 지음이라는 두 <있음>이 다르고,
-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존재[있음]이므로 -
건강함과 걷고있음 등의 <있음>이 모두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제부터는 있음을 존재로 바꿔 말하겠다)
즉, 목수라는 존재와 지음[집을 지음]이라는 존재는, 실체로 있는 것과 실체에 속하는 것으로서 차이가 나고
건강함이라는 존재와 걷고 있음이라는 존재는 성질과 능동으로서 차이가 난다는 식이다
이렇게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더 이상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10개의 범주로 분류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다
범주는 존재에 대한 최후의 분류인 셈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테마에 정면 반박하면서 '존재는 모든 개별적인 차이들
혹은 내적인 양상들에 대하여 단 하나의 같은 의미로 말해진다'(DR, 53)는
다소 어려운 주장을 한다 이것이 존재의 일의성univocity 이다
<유목적 분배>라는 테마는 바로 여기에서 등장한다
말하자면 존재가 다양한 의미로 말해진다는 입장은 존재가 10개의 범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철학에서] 분배된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으로...)

존재가 일의적이라면 존재자들이 모두 뒤섞인다는 말인가?
존재의 분배가 없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들뢰즈의 대답이 바로 유목적 분배이다
존재가 일의적이어도 위계와 분배는 있다 (DR, 원서 53~54/ 번역번 페이지는 나중에 추가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때 위계와 분배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위계와 분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유목적 분배는 분배될 땅, 분배될 몫, 분배될 비율 등이 미리 정해져 있어서
거기에 존재를 나누어 넣는 것이 아니고[이것은 정착적 분배],
존재의 움직임에 맞춰 땅이나 몫을 나중에 할당하는 것이다
정착적 분배라는 것은 말하자면,
좌파라는 땅에 분배-평등-환경-노동자라는 몫을 배정하고,
우파라는 땅에 자유-성장-경쟁-개발-기업가 등의 몫을 배정한 후에,
민중을 두 땅 중 하나의 땅으로 분배하는 것이고,
유목적 분배라는 것은 말하자면,
민중-욕망의 흐름이 있고 그 흐름이 강력하게 기울어[강도가 높아져서]
어느 순간 하나의 욕망이 개별화되고, 하나의 현실적인 요구가 될 때,
그 요구에 맞춘 그때 그때의 운동이 발생하고 그 운동에 이름을 붙이는 식이다


재치와 유머가 가득한 요즘의 집회 깃발들이다
이들이 지금 저자리에 함께 모여 강한 에너지를 폭발시키면서
단 한가지를 요구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유목적 분배의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저렇게 다양한 기질과 감정과 욕망과 생각들에
갑자기 좌파와 우파라는 깃발을 붙이면
아마 많은 이들이 불쾌해할 것이다
좌파와 우파라는 경직된 분배에 민중이 분배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많은 점에서 현실과 괴리되고 망상적 신념을 생산하고 반목과 혐오를 낳는다
정당정치는 존재할 것이다
그들의 입법도 필요하다
민중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충실하고 그 흐름에 이름을 분배함으로써
정당들이 따라오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것이 바로 유목적 분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