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이미지 : 쌍곡기하학의 위구 이미지
근래에 들뢰즈를 열심히 읽고 공부하는 학부생으로부터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것은 차이 흐름의 절단면이냐,
혹은 차이의 효과이냐는 질문을 들었다
들뢰즈에 진입할 때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말을 통해 도달할 법한 생각이다
내재성의 평면이 설명하기 참 까다롭고 또 전달하기 참 어렵다
우선 들뢰즈 본인이 내재성의 평면과 관련하여 언급해둔 가장 자세한 텍스트를 참고해보자




■ 이 글은 각주에 나와있는 것처럼 짧은 텍스트로 출판되었다가 나중에 <디알로그>에 편집되었으며, 우리말로는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509쪽에 실려있다.
이 텍스트는 우선 <선험적인 장champs transcendental>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지만 이것이 곧 내재성의 평면으로 이어지므로
선험적인 장이 무엇인지부터 이해해보도록 하자
아마 들뢰즈는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고싶었던 것 같다
그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선험적인 경험론empirisme transcendental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의 첫 저서가 흄과 경험주의에 바쳐졌고,
경험주의의 오류는 경험을 너무 비좁해 제한했다는 점에 있다고 했던 데 따라서,
혹시 이 평면 혹은 장이 경험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일단 유보적으로라도 우리는 우리의 경험 그 자체 → 어쩌면 그것이 내재성의 평면이나 선험적인 장과 가장 가까울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서 들뢰즈는 이 평면이 대상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주체에 속한 것도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
그것이 경험과는 분명히 구분된다고 못 박는다
여기서 확인하고 넘어갈 점은, 들뢰즈가 말하는 이 평면 → 말하자면 사유의 누메나noumena가
플라톤과 같은 어떤 객관성도 아니고, 칸트가 말하는 것 같은 어떤 주관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 평면을 주관에 귀속시킴으로써 내재성의 평면을 왜곡하고,
그것을 인간적인 경험을 복사하는 것으로 격하시켰다고 본다
이 지점이 바로 들뢰즈를 말할 때 항상 나오는 표현들, <주관도 객관도 없는>이라는 표현이 근거하는 지점이다
그러면서 들뢰즈는 이 평면이 자아가 배제된 의식의 질적인 지속이라고 말한다(509쪽, 위의 첫페이지)
물론 뒤이어 이때의 의식은 사실적인 의식이 아니라 권리상의 의식이라고 말한다(위의 세번째 페이지)
(이러한 구분을 더 이해하고 싶다면 대학원에 들어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사실적 의식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자기의식이 없기 때문에 이 장은 바로 내재성의 평면이라고 말한다 (세번째 페이지)
즉, 그 평면에는 자기의식을 갖춘 주체가 아직 없다는 뜻이다
자의식을 갖춘 주체가 없는 곳에는 아직 대상도 출현하지 않은 것이다
즉, 또 다시 말해서, 내재성의 평면은 아직 주체에 의해서나 대상에 의해서나 아직 어떠한 규정도
초월적인 방식으로는 분배되지 않은 상태이고,
그렇다고해서 아무런 분화도 없는, 규정성과 상호규정이 없는 <아름다운 영혼>의 상태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이러저러한 세계와 주체의 규정과 기준으로는 끝내 소진시킬수도,
끝끝내 전부 규정해낼 수도 없는 것으로서,
언제나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차이와 반복의 세계이다

말하자면 세개의 축으로 파란색 덩어리를 표시하려고 한다면,
저 축들과 좌표, 변수들은 덩어리에 대해서 초월해있다고 말하면 된다
대문 이미지로 올린 쌍곡선기학의 위구에는 그 구 자체에 위도와 경도와 같은
좌표들이 몸에 붙어 그려져 있는데, 이 좌표들이 말하자면 권리상의 의식으로서
사실의 차원에서는 실현되지 않는 의식이다
저 위구가 표현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자면 선험적인 장이라고 말하면 좋을 것이고,
저 좌표들이 사실상의 의식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저 장은 내재성의 평면이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transcendental이 초월적 혹은 초월론적이라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개념들의 지평을 두고 보자면 그것을 초월이라는 단어를 넣어 번역한다는 것이 내 마음에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