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교육을 발명하자 (가제)
흔히 사교육이 문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사교육에 목을 매는가? 그것은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왜 꼭 좋은 대학에 가야만 할까? 취직할 때, 사회에 진입할 때, 출신 대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학들에는 위계가 있고, 언론도 교육부도 대학을 평가하여 순위를 매겨 공보한다. 기업도 관료조직도 사법 조직도 출신 대학을 중요하게 보고,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며,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끼리 서로를 밀어주고 이익을 공유한다. 무척 폐쇄적이다. 사회가 그렇다는 것을 모두 잘 알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 더욱이 요즘은 대다수 우수한 학생들이 일단 의대를 채우고 나서 나머지 학과를 지원한다. 직업으로는 의사가 최고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나라는 전쟁을 겪은 지 70여 년, 군부독재가 끝난 지 30여 년, 이제 군부독재로는 돌아가지 않겠지 하던 2024년에 비상계엄을 겪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안전하지 않음>은 은유가 아니라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학벌 우선, 사교육비 상승, 집값 상승, 치열한 경쟁은 바로 그 공포의 이면으로서, 죽음의 강도만큼이나 강렬하게 우리 사회를 옭아매고 있다. 그러니까 당연히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아 키울 엄두를 내기 어렵고, 인구는 줄어들고, 지역은 소멸 위험에 처하고, 서울은 미어터지고, 집값은 천정부지로 솟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현안은 이렇게 서로 물고 물리는 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자기의 꼬리를 무는 뱀, 우로보로스>
그렇다면 국가는 죽음에의 공포와도 같은 국민의 불안을 잠재우고 경쟁을 완화하고 생존과 부의 축적 외의 다른 가치들을 제시하고 설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겪어왔던 국가는 표면상으로는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서 도리어 더 경쟁을 부추기고, 불안을 불러일으키며, 투기와 일확천금에의 욕망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는 엉뚱한 정책을 끊임없이 입안하고 쓸데없는 곳에 자금을 쏟아부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우리가 원하는 좋은 것과 실제로 좋은 현상을 낳을 수 있는 방법을 종합하고 통일하는 능력이 없는 분열증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인구에 대해 정말 고민한다면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인구는 증가해야하지만 경쟁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태; 사교육은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대학들을 순위에 따라 차등지원하는 상태; 지역 소멸을 극복하자고 하면서 지역 산단을 수도권으로 모두 회수해 가는 국면. 우리 혹은 우리 정부는 정말로 인구가 늘기를 바라는가? 정말 사교육의 문제가 심각해서 완화하고 싶은가? 진정으로 지역 소멸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정부가 말하는 고민은 정책에 전혀 담기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결국 우리가 그러한 고민을 천천히 진지하게 할 수 없도록 우리 자신을 교육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은 점수를 따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지, 현실을 대면하고 그것에 대해 깊이 고민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결국 다시 교육이 문제다. 모든 문제는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인 것이다. 이미 있는 지표에서 성과를 내는 무한 재현, 지표 자체를 검토하는 능력의 부재, 부분적인 해결만을 쫓으며 새로운 지표를 추가하는 임시방편은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서로 물고 물리고 있는 이 문제들의 상황을 진지하게 대면해야만 한다.

<자기 통합이 되지 않은 사회, 분열된 개인>
안전에 대한 강박적인 욕구는 현실에서 연유한다. 과학과 수학을 하는 사람들이 IMF라는 국가적인 위기에서 보호받지 못했고, 중소기업의 노동 여건은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대기업의 횡포와 같은 외풍에 안전하지 않았다. 심지어 공부를 못해서 좋은 대학에 못 갔거나 아예 대학에 가지 못했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위험하고 나쁜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되고, 때로는 몸이 상하고 죽지만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다. 사법부는 노동자, 의료과실 사망자, 대기업을 상대로 하는 고발인들보다는, 사주, 의사, 대기업, 권력자들에게 관대하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아직 100년이 안 되었지만, 그동안 사법부는 권력이 원하는 것을 처리해 주는 역할도 해왔다. 그래서 국민은 수학과 과학도 필요 없고 오로지 의대가 최고고, 권력자들끼리 서로 봐주는 사회이니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가 있어야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힌디. 그러니까, 작금의 우리 모습은 위험했던 기억때문에 오로지 ‘안전함’이라는 유용성을 확보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 상태인 것이다.


<기억에 관한 베르그손의 두 형상>
위의 두 그림은 철학자 베르그손이 기억과 사유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것들이다. 오른쪽 그림에서 P는 세계라는 평면이고 S는 생명체가 세계를 만나는 시공간적 지점이다. 원뿔 SAB는 기억을 형상화한 것으로 정신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S 주변으로 모여들어 수축되어 있는 기억들은 매우 일반화되고 사회화된 기억으로 세계에 대한 적응을 돕는 기억이고, AB로 이완되어 있는 지점의 기억들은 매우 개인적이고 그 생명체에 고유한 기억이라 본다. 사유는 S라는 첨점에서 세계로부터 받은 자극과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자기의 기억을 전체적으로 사용하여 종합하고 판단하는 것에서 성립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교육은 정신을 동원하는 이런 활동을 촉진하지 않고 오히려 억압한다. 오로지 첨점 S에 유용한 것만을 빠르게 많이 습득하고 외우는 것만이 장려된다. 그렇게 교육된 자의 정신은 빈곤하며, 사회인이 된다고 해서 갑자기 창의적인 사유를 해낼 수 없다. 왼쪽 그림은 대상 O를 지각하는 정신이 최초에는 대상 O를 AO라는 작은 원 정도로 파악하는 정신능력을 보이다가, 대상을 분석하고 그 분석된 요소들을 해석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으며 그래서 이 둘을 종합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 영역을 BO, CO, DO 등으로 확장해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우리나라는 매우 혹독한 시련에 처해 있었고, 가난에 진저리 쳤으며, 빠르게 발전하기를 바랐기에, 적응에 필요한 지식을 빠르게 많이 획득하여 1등으로 치고 나가는 것을 장려해 왔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다. 교육만이 문제라는 것은 아니지만, 교육은 아주 어리고 아주 예민한 나이로부터 시작하기에 정말 치명적이다. 교육이 우리로 하여금 첨점 S를 중심으로 적응하는데 급급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유도하는 한, 시민이, 정책입안자가, 청년과 노인이 경쟁을 완화하고 살만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싹틔울 수 없다.
이러한 사회문제에 모든 정부가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미리 준비하지 못했기에 지금 저출산, 연금 문제 등에 직면해 있고 논의만 무성하고 해결책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는 사회의 변혁이 사람들의 사유 능력에, 그것도 한 사람의 사유 능력이 아니라 다수 국민의 사유 능력에 달려있는데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전에의 절박한 갈구, 살아남은 자만이 안전한 세상은 무한경쟁과 효율적인 공부를 강요하고, 그런 시기를 성공적으로 뚫고 나온 엘리트는 현실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 괴물이 되며,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만든 괴물의 모습에 놀라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다. 우리의 연구는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은 교육의 자세한 국면들을 해명하고, 똑같은 재난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발명해야할 교육이 어떤 모습일지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