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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몸, 몸의 장소 – 안과 밖을 잇는 감각의 여정
★ 예술가 모든 이미지, 정희정님 작품 내 작업의 시작은 언제나 경계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가령 그게 집이라면 단순히 머무는 곳이 아니라 안과 밖이 서로 접히는 주름이다. 우리가 어떤 장소에 서 있을 때 갑자기 찾아오는 “아, 내가 지금 여기에 있구나”라는 감각은 그 장소가 품고 있는 냄새와 빛, 공기와 소리가 어느 새 내 몸으로 스며들어 과거와 현재가 얇은 막 위에 포개지는 순간에 일어난다.그때 장소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내 몸의 기억을 깨우는 살아 있는 장(場)이 된다.어쩌면 나는 오랫동안 장소의 리듬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처음 분명히 자각하게 만든 사건은, 내가 살던 동네가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통째로 사라져 버리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주민등록번호처럼 주소도 영원할 거라 믿었다. 매일 걷던 골목길, 벽돌의 질감, 집집마다 다른 삶의 냄새들은 내 몸속 깊이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재개발은 그 모든 감각을 너무도 쉽게 지워버렸다. 몇 달 만에 담벼락도, 오래된 느티나무도, 그 골목의 어스름도 사라졌다. 내게 풍경의 상실은 단순한 장소 상실이 아니라, 기억의 단절, 나라는 존재의 한 조각이 뚝 떨어져 나가는 사건처럼 다가왔다. 장미 빛 인생> Rosy Life 118 х 78cm, C-Print, 2015그 경험 이후, 나는 풍경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풍경은 단순히 “밖”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풍경은 내 몸에 붙어 있는 시간의 지질,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층위였다. 그래서 풍경이 사라진 자리는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라 내 존재의 결손 부위로 돌아왔다. 전국의 도시들이 똑같은 아파트 풍경으로 대체되어 가는 과정은, 개인의 기억이라는 내부가 외부의 욕망—개발 정책과 경제 논리—에 의해 얼마든지 삭제되고 재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땅거미> twilight 120 х 80cm, C-Print, 2016그때부터 “도시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주목하면서 장소와 몸이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도시는 겉으로 보기에 매끄럽고 평평한 거울처럼 보인다. 반듯하고 효율적인 구조, 어디를 가도 익숙하게 반복되는 간판과 도로의 패턴. 언어나 제도처럼 표준화된 질서의 표면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이 평평한 거울 같은 공간에 균열을 내는 것은 배설하고 숨 쉬는 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거벗은 섬> Naked Island , Video installation, 11min 00sec , 2015어느 날, 길을 걷다가 불현듯 내 생의 모든 시간과 공간이 눈앞에서 한꺼번에 무감각하게 흘러가는 순간이 있었다. 동시에 내가 어쩌면 유령인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퉁이를 돌다 만난 검은 구멍에서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지며 휘파람을 불었다. 잠시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절간과 같은 고립된 집이다. 그림자가 되어 수줍게 달아나는 유령들의 집이다. 나는 저물어가는 황혼의 막바지처럼 풍경 속 사건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맨다. 이 사람 저 사람 행인들이 마치 나를 아는 것처럼 쳐다본다. 그러나 모두 낯선 얼굴들이다 살과 거울>Flesh and Mirror, Single Channel Video,13min 11sec, 2020몸과 언어로 경험되는 도시는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 안으로 스며든다. 경제학에서 설명하듯 교환의 장소이기도 한 도시는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도시와의 접촉 지점에서 우리가 줄여서 '느낌'이라고 부르는 모호한 정서도 주고받는다. 이런 정동의 흐름을 통해 도시를 걸으면서 나는 점점 더 작은 단위의 세계, 즉 ‘집’이라는 장소를 향해 들어갔다.집은 언제나 나의 삶을 구성해 온 가장 작은 우주였다. 타인이 하는 말보다 그 사람이 거하는 방에 들어섰을 때 상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간혹 있다. 배치된 사물 하나하나, 그 방에서 풍기는 냄새와 분위기, 머무른 흔적들이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그 사람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사적인 공간으로서의 방은 그 사회의 강박관념을 잘 보여주는 일종의 자화상이다. 바람의 집>House of wind, Single Channel Video, 08min 05sec, 2023수년 만에 찾은 고향에서 안과 밖을 잇는 매개 역할을 하는 몸은 과거와 현재라는 경계면을 뚫고 기억을 소환하였다. 바람의 집>은 집이 내 정체성의 고고학적 장소로서 개인의 내면을 구성하는 감정의 지층을 장소라는 형태로 번역해 보려는 시도였다. 기억은 뇌 속이 아니라 시간과 접촉하는 경계면이다. 타인의 집> The House of Others, Single Channel Video,10min 30sec, 2025〈바람의 집〉이 ‘내가 나를 향해 돌아오는 길’이라면, 〈타인의 집〉은 그 시선을 다시 바깥으로 돌려 ‘타인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질문한 작업이다. 일본에서 레지던시를 하는 기간 동안 진행한 프로젝트였는데 낯선 타인에게 자신의 문을 기꺼이 열어준 여러 집을 방문하며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당신에게 ‘집’이란 어떤 이미지로 떠오르나요?’ ‘‘집’을 떠난다는 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와 같은 대화를 통해 집이란 관계와 연결됨을 알았다. 첫 번째 질문만으로 타인의 가장 깊고 어두운 모서리에 들어가는 이상한 체험을 반복했다. ‘집’을 통해 관계의 형태를 새롭게 사유하게 된 시간이었다. 집은 나를 닫는 벽이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는 열린 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장소는 절대 ‘외부’가 아니다. 내 몸 또한 ‘내부’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몸과 장소는 서로 접히고 뒤집히며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밖이라고 믿었던 풍경은 실은 내 기억의 단면이었고,안이라고 여겼던 집은 타자로 건너가는 통로였다. 도시는 유령처럼 나를 스쳐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의 그림자를 반사하던 거울이었다. 그 모든 흐름은 하나의 공간에 머물지 않고 늘 안과 밖을 동시에 왕복하는 뫼비우스 띠와 같다. 장소는 늘 나보다 먼저 말을 건다.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속에서 흔들리는 몸의 반응을 작품이라는 방식으로 기록한다.진주에 도착한 첫날을 기억한다. 멀리서 보면 도시들은 서로 닮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전혀 다른 숨결을 품고 있다.진주는 강이 도심을 가로지르고, 그 강의 리듬이 사람과 거리의 시간을 끌고 가는 도시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강변을 걸었다. 물이 흐르는 속도가 도시의 시간을 정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상국립대학교에서 주관한 철학 심포지엄을 위해 책방에 모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장소와 몸, 기억과 타자성의 관계가 어떻게 다시 펼쳐지는지를 새삼 느꼈다. 모서리의 장소감과 만나는 느낌이었달까. 원근법적 중심의 시선이라면 지나쳤을 리듬의 풍경, 목소리의 입체감이 내가 서 있는 장소를 더욱 구체적이고 생기있게 만들었다. ‘로컬’이라 불리는 주변부의 공간은 단순한 지역성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삶과 시간이 만나고 스며드는 타자의 자리였으며, 나의 세계를 경계 바깥으로 열어주는 또 하나의 문턱이 되었다. 진주에서의 만남은 장소와 몸, 기억과 타자성이 서로를 끊임없이 다시 열어젖히는, 우글거리는 차이의 운동 속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앞으로도 나는 이러한 경계의 장소들—타자가 스며들고 시간이 다시 발생하는 모서리들—에서 세계가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천천히 탐색해 나갈 것이다. 정희정 정희정은 사람과 장소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동과 감각의 층위를 탐구하는 시각예술가이다. 사진, 영상, 퍼포먼스 등을 혼합한 작업을 통해 풍경·집·도시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심리적‧정서적 진동을 시청각적 언어로 재구성한다. 2025년 서울국제대안영상페스티발 (NEMAF),예레반 CYFEST Festival(2024), 클레르몽페랑 Videoformes(2024), 아이슬란드 LÁ Art Museum(2024), 로스앤젤레스 Torrance Art Museum(2023) 등 국내외 다수의 전시와 페스티벌에서 소개되었다. 2017년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에서 〈Red Room〉으로 관객상을 수상했다. 인스타그램 @navimask홈페이지 www.nnanna.com사진 제공 정희정 시각 예술작가
2025.11.25
철학과
출항 그 후 - 여서재와 만난 지 벌써 7년입니다
★ 독서모임 공감 회원, 여서재. 현 고등학교 교사. 배우고 성장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으며 철학의 향기가 묻어나는 삶을 지향함. 대문사진 이미지, 연합뉴스 여서재와 만난 지 7년, 그간 제 삶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들뢰즈 탄생 백주년 기념 학술제의 시작을 여는 자리에 초대 받아 어떤 말씀을 나눠야 할지 고민하다 이런 변화의 순간을 담은 시를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시는 여서재를 이끌던 이윤호 선생님과 더불어 거인의 어깨 모임을 진행하며 살아있는 사람들의 언어를 접했던 기쁨이 담긴 시입니다. 당시 저는 시체를 곱게 화장시킨다는 느낌으로 기술 번역을 하고 있었는데, 햇살 화창한 날 윤슬이 남슬대는 바다를 만나 출항하는 것 같았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분들이 모두 이 시에 담겨 있습니다. 두 번째 시는 제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3년 전 들어간 첫 학교에서 느꼈던 절망과 아픔이 담겨 있는 시입니다. 일반 공교육도 가끔은 필요악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제가 처음 근무했던 학교는 절대 악에 가까운 악당이 교장이자 설립자였고, 이후 횡령과 성적 조작을 비롯해 여러 유죄 판결을 받은 무수한 악행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파렴치해질 수 있는지, 서서히 물들며 자아를 상실하는 과정은 어떻게 일어나는지 참 많은 것을 보고 느꼈던 때였습니다. 속으로 이를 갈며 태양을 갈구하던 제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마지막 시는 우리 들뢰즈 모임을 위한 시입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물음이 있을 것이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정답이 있는 세상을 꿈꾸기도 했습니다만 한 개의 정답은 그 자체로도 폭력이라는 것을 이제 어렴풋이 알만큼 여기 들뢰즈 모임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정답을 찾아 떠나는 그 자리는 늘 안개로 둘러싸인 답답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계속 걸으며 물음을 찾는 자는 길을 걷는 그 걸음이 곧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들뢰즈 모임에 함께 하는 모든 분들이 전설로 남기를 기원합니다. 출항, 그 후 1. 그는 산을 향해 걸었다맨손으로 방파제를 쌓은 거인의 어깨 위눈이 나렸다는 설산에는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는 메아리가 산다고 했다 2. 바람도 피해가는 마을 바닷물은 예고 없이 들이닥쳤고사람들은 안개로 옷을 지어 입고 저마다의 동굴 속에 또아리를 틀었다 3. 늪과 황무지를 지나 해무를 걷어낸 태양을 만났다세상은 온통 희었다가 검었고 제 색상을 찾기도 했다구비구비 초록이었으나 또 가시밭이었고옹달샘인 듯 사막이었으며 노루와 전갈, 아무것도 아닌 자를 만나기도 했다 4. 길은 이어졌다 마음 속에 설산이 종종 생겨났다떠나온 길은 돌아가는 길이었고 돌아가는 길은 떠나는 길이었다 마을을 떠난 자, 그는 돌아오지 않았으나 돌아갔다전설의 시작이었다
2025.11.25
철학과
철학, 빨간약을 내밀다. - 나의 이데아 흥망성쇠기
★ 독서모임 공감 회원, 여서재 대문이미지, 김지혜님 카카오톡프로필 여름부터 달리고 있다. 주로 호숫가를 뛰는데 음악이 부실한 근육에 흥을 북돋아 준다. 어느 날 땀은 줄줄 흐르고 다리가 제 리듬을 찾아갈 즈음 소리가 꺼졌다. 충전이 부족했나 생각하는 찰나 거대한 소음이 달팽이관 안팎으로 밀려든다. 개구리, 귀뚜라미,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이렇게도 아우성치었나! 안으로는 머릿속과 마음속의 소리가 뒤엉켜 난리도 아니다. 리듬 타던 팔다리조차 근육 터져 죽는단다. 이것은 총체적 난국인가 음악의 위대한 힘인가. 이어폰이 꺼진 순간의 이야기다. 소리 들이 한꺼번에 밀려 나와 압축파일을 잘 풀지 못하고 있다. 양해를 구한다. '기름진 평야에 노예로 살 것인가, 척박한 땅의 지배자가 될 것인가.' - 헤로도토스역사> / 2016.7.4 나의 카카오톡 프로필 '헤매는 쥐 떼보단 정원에 매인 개가 나은가' - 넥스트(N.EX.T) 1997 / 2025.9.29 생각항상 '최상의 것'을 찾으려 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가장 게으른 자에게 물어보라 하지 않았던가. 나는 게을렀고, 무슨 일이든 확신과 방법과 도구까지 완벽히 갖추지 못하면 시작이 안 되는 스타일이(었)다. 높은 확률로 열심히 찾은 방법은 썩 괜찮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면 효능감을 느꼈다. 어차피 작동하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가장 좋은 책을 찾고, 좋은 필기구와 노트도 준비하고, 책상도 깨끗했으면 좋겠고, 얼마나 어떻게 공부할 지 계획도 필요했다. 정작 준비만 하다 힘이 빠지곤 했는데 드라마 속 독서실에 간 덕선이를 보니 웃펐다. 아이를 키우며 ‘가장 좋은 것’을 향한 선택과 준비의 늪에 빠졌다. 애당초 가사와 육아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없었다. 적잖은 나이인데 왜 이리 삶에 대해 아는 게 없단 말인가! 의식주를 친정엄마와 다른 사람들의 선택에 기대었다. 뭔가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계속 헤맸다. 각성은 잠깐이고 삶은 다사다난했다. 공동구매에 몰려다니며 아기를 키우고 집안 살림을 키웠다. 누가 그러라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보편적으로 완벽해지고 싶었다. 수많은 구매 목록에 책이 들어 온 것은 큰 행운이었으나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이의 그림책으로부터 나의 책 세상이 시작되었다. 어린이책을 즐기며 더 알고 싶어 탐구하는 자세로 파고들었다. 열심히 도서관과 서점을 드나들며 책장을 키웠다. 꿈꾸는 다락방 시절이었다. 뭐든 될 것처럼.그러던 어느 날, 고전이란 거 말만 하고 안 읽는 거라며? 우리 한번 읽어보자. 폼 나게.역시 고전의 꽃은 플라톤 아니겠어!아.....내가 찾던 것이 '이데아' 였구만! 근본적으로 좋은게 있지. 역시 뭔가 있어!딱 거기까지 읽었어야 했는데…. 공허해도 때때로 만족스러웠는데 말이다. 지금은 다락방도 찌그러지고 이데아도 몰락했다. 진주문고 여서재에 들어서는 바람에…. 함께 들어선 초1 딸이 이제 중2다. 이데아 함락 군은 책과 함께한 사람들인 것 같은데…. 이윤호 선생님과 시작한 독서 모임 ‘거인의 어깨’가 시작이었다. 노마디즘>을 읽을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이데아는 한물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우리가 아마 연말에 내 이데아 소멸을 슬퍼하며 술잔을 기울였던 것 같기도 하고.안 그래도 쇠락한 내 이데아를 최종적이고 불가항력적으로 박살 내버린 자가 들뢰즈 님인 건 확실하다. 니체 씨와 하이데거 씨도 제법 거들긴 했다. 니체 씨는 신도 죽이고 선악도 넘나들고 우리 모임에 팬도 있고 해서 살짝 겉멋에 홀렸고, 하이데거 씨는 죽는다고 죽는다고 난리를 하시니 들어주긴 주는데 그렇게 살긴 싫은 스타일. 근데 들뢰즈 님은 딱 멋있다. 드라이하고 쿨한 느낌. 그래서 그의 근처 어디쯤에서 철학을 알아가는 아주 알듯 말 듯 하고 골 때리는 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서서히 이데아를 말려서 죽였다. 딱히 애쓰진 않았다. 뒤돌아보니 이제 없던데? 우리의 시공간을 채운 말과 글 사이 건네받은 빨간약은 언제 먹었는지는 몰라도 장복을 해서인지 가끔 약발이 돋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데아를 대신하여.(철학이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요런 식으로는 죽어도 못 쓴다는 소리다.)요 몇 년, 내 삶은 굉장히 시끄럽다. 어느 날 일상을 지탱하던 음악이 꺼지고 내비게이션 경로에서 찍 미끄러졌다. 길 밖으로 본격 이탈하는 순간, 두려웠지만 들판을 향해 악셀을 밟았다. 누가 그러라고 한 건 아닌데 나 스스로 동의했다. 그러기로 딱 맘 먹었어! 마치 시뮬레이션해 온 것처럼. 내 선택에는 근육이 있었다. 내가 길가에서 좀 더 망설였다면 아직도 지난한 소송과 다툼 속에 있겠지. (철학이 이러라고 시킨 건 아닙니다~~)길 밖에도 삶은 계속되고, 기름진 땅의 노예도, 정원의 개도, 매트릭스 속의 인간도 행복하다. 그러나 나는 척박한 땅의 지배자로, 헤매는 쥐였다가, 빨간약을 먹은 어둠 속의 저항군이고 싶다. 때때로 온몸의 세포가 시끄럽고 덜컹거려도.징그럽게 더운 여름, 7월 중순쯤인가? 걷고 있던 신발에 입은 옷 그대로 달렸다. 심장 뛰는 느낌이 흡족했다. 다음날은 조금 더 길게 달렸다. 땀이 줄줄 흐르고 옷이 무거웠다. 신발부터 샀다. 내가 달리고 싶은 시간에 밤이든 낮이든 내 맘대로 뛴다. 야밤에 안 무섭냐고 하는데, 귀신보다 힘들어서 숨이 차 죽을 것 같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약속하지 않고. 알잖아? 어차피 러닝의 이데아는 없다.세 번째 마라톤을 앞두고 있다. 매일 조금씩 바뀌는 달의 위상을 느끼고, 날씨가 시원해져서 기쁘다. (이제는 춥다) 아침 조깅의 뿌듯한 기분과 더 빨리 뛰고 싶은 충동을 알게 되었다. 걱정하던 왼 발목은 한번도 다치지 않고 튼튼해지고 있어서 새 러닝화를 샀다. 굳은 왼쪽 어깨는 펴지고 오른쪽 어깨가 새로 아프기 시작했다. 달리기 책을 샀다. 아 그리고 오픈형 이어폰으로 바꿨다. 음악과 바깥소리가 동시에 들린다.나는 나의 대지를 달리는 지배자다.
2025.11.25
철학과
더듬거리며 가는 나
★ 독서모임 공감 회원, 진주문고 여서재 대문이미지 by shutterstock 반갑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나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여서재에서 일요일마다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공감 회원 강지연입니다1. 철학을 처음 만난 순간― 우연히 열린 문, 나를 새롭게 보기 시작하다2018년 5월 2일, 한 친구가 제게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의 안내문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날 저는 진주문고, 여서재에 가서 강의 등록을 했습니다. 그게 제 인생 첫 철학 공부였어요. 그 후 ‘거인의 어깨’라는 철학 독서 모임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어느 날, 진주문고에서 박대윤 선생님이 지도하는 흄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공부 모임 안내문을 보고 지원하며 본격적인 철학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공부가 5년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박대윤 선생님과 함께 공부한 책들을 보면 참 다양합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스피노자의 『에티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포르퓌리우스의 『입문』, 니체의 『선악의 저편』, 그리고 지금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봤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철학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을까?” 돌이켜 보면, 저는 늘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여러 공부를 했지만, 2018년에 만난 철학은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철학은 저에게 말했습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2. 옳음에 갇혀 살던 나― 단단한 옳음에서 부드러운 이해로 저는 늘 ‘옳음’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너무 교과서적이다. 틀이 너무 강하다. 너무 원칙적이다.” 저는 옳다고 믿는 것을 밀어붙이는 힘이 강했지만,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은 종종 답답했을 겁니다. 2018년 10월 말 경 철학을 공부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큰 딸이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납니다. “아빠, 아빠가 엄마에게 평생 바라던 게, 철학 공부 6개월 만에 이루어졌어요.” 그 말을 듣고 웃었지만, 속으로는 조금 마음이 아팠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의 저는 늘 자신의 옳음에 사로잡혀 있어 가족들, 특히 딸들을 힘들게 하기도 했거든요. 그게 계속되었다면, 아마 제 남편과도 끝내 이혼했을지 모릅니다. 철학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철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세계관으로 세상을 해석한다는 것을요. 칸트의 세계에 설득되었다가, 스피노자에게 끌렸다가, 다시 니체와 들뢰즈를 만나면서 조금씩 제 생각의 틀이 조금씩 깨져 나갔습니다. 제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기쁨, 그리고 그 배움을 통해 조금 더 잘 살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처음에 철학책을 읽을 때는 철학의 모든 용어가 낯설고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이해되면서, 철학자들의 언어로 세상을 읽는 재미를 느꼈습니다. 예전엔 제 세계가 단단하고 확실했습니다. 흑백으로 나뉜 세상 속에서 “이건 옳고, 저건 틀렸어.”라고 단정 지을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제 세계가 마치 슬라임처럼 물렁해졌습니다. 문제에 부딪히면 바로 답을 내리기보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명쾌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망설이고 있는 나 자신을 봅니다. 분명한 답을 내리지 않고, 복잡한 문제를 복잡하게 바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철학이 제게 준 가장 큰 선물입니다.3. 교사로서의 위기, 그리고 철학― 무너짐 속에서 다시 서게 한 사유의 힘 저는 35년차 현직초등학교 교사입니다. 33년 차가 되던 2023년, 제 인생의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2023년 3월 27일, 학부모가 저를 ‘아동학대’로 신고했습니다. 단 하루 만에 종결된 일이었지만, 그 신고 한 건으로 제 교사로서의 자존감은 무너졌습니다. 신고당한 그 주 일요일 공부 시간을 기억합니다. 당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저, 이번 주에 아동학대로 신고 당했어요.” 물론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처벌 없이 해결된 문제였지만, 제 마음 속에서는 문제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공감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는 분들이 제 문제를 같이 고민해 주었습니다. 그 분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바라 볼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2024년 12월 3일, 그 짧은 계엄이 뭐 그리 대수냐”고요. 하지만 저는 생각합니다. 그날 밤 6시간은 한국 민주주의의 근본을 흔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의 그 하루, 학부모의 신고로 시작된 단 하루는 제 인생의 민주주의를 흔들었던 날이었습니다. 관리자들은 학부모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저는 저를 변호할 기회도 없이 '아동학대교사'가 되었습니다. 관리자들은 법적 처벌은 없었으니 아무런 일도 아니지 않느냐며,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는 말을 했지만, 제 억울함과 상처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결국 2년간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버텨야 했습니다. 그 버팀의 중심에 있었던 게 바로 ‘철학 공부’였습니다.4. 흔들리며 성장하다― 차이 속에서 나를 다시 만들어 가는 여정 철학을 공부하니 그 일들이 명쾌하게 해결되었느냐고요?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일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여전히 저는 지금도 악성 민원에 시달립니다. 때로는 단호하게 맞서지 못하고, 때로는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저는 늘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조차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 또한 삶의 한 방식이니까요. 철학을 공부하며 기억나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스피노자와 들뢰즈입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정리45에는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더 큰 기쁨에 자극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한다.”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저는 기쁨을 만들 수 있는 만남을 가능한 한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해금 공부도 하고 있고, 학교에서는 마음공부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우리반 학생들과 점심시간에 ‘설레임식탁’을 만들어 같이 밥 먹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또 다른 철학자는 ‘차이와 반복’의 들뢰즈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만이 존재한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래요, 내 삶도, 내 고통도, 심지어 학부모들의 민원조차도 ‘차이의 반복’이구나. 삶은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흔들림과 차이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구나. 그걸 알아차린 이후 저는 좀 더 자유로워졌습니다. 여전히 휘청거리고 더듬거리지만, 그 안에서 나를 조금씩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명퇴를 고민했던 저는 오늘도 교사로서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 그만둘지는 모르지만요. 그리고 여전히 철학책을 읽습니다. 저는 이제 제 자신을 이렇게 말합니다.“나는 슬라임이다.” 어느 쪽으로도 변형 가능하지만, 그 속엔 분명한 중심이 있습니다. 그 중심을 지켜주는 힘 중의 하나, 바로 철학 공부입니다. 철학책을 읽는 일, 그것이 나를 붙잡아 주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저는 더듬거리며 살아가겠지만, 그 더듬거림 속에서도 저는 제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2025.11.17
철학과
영화 <카사블랑카>를 통한 들뢰즈의 구조주의 개념 대상=x 분석
★ 경상국립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재학생 안개 낀 활주로 위, 카사블랑카를 탈출하려는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다. 릭은 두 장의 통행증을 손에 쥐고 있다. 이 종잇조각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사랑, 저항, 권력, 생존이 동시에 흔들린다. 카사블랑카>에서 통행증은 그저 줄거리 진행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영화 전체의 구조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축이다. 들뢰즈의 말을 빌리면, 통행증은 어떤 고정된 의미를 지닌 상징이라기보다 ‘빈칸’으로 작동하는 대상=x에 가깝다. 라캉이 도둑맞은 편지>에서 편지를, 앙드레 그린이 오셀로>에서 손수건을 그런 예로 읽어냈다면, 카사블랑카>에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통행증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종이지만, 누가 그것을 쥐고 있는지, 누구에게 건네는지에 따라 주변 인물들의 위치가 재배치된다. 통행증은 구조 속에 뚫려 있는 빈자리이자, 그 빈자리가 옮겨 다닐 때마다 구조가 새롭게 배열되게 만드는 매개체다. 통행증이 처음 등장할 때, 그것은 우가르트의 것이다. 그에게 통행증은 철저히 돈의 의미를 가진다. 살해와 도난의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는 물건이자, 암시장의 가격으로 환산되는 탈출권. 이때 통행증은 망명자들이 몰려드는 카사블랑카의 시장/망명 계열 안에 놓인다. 프랑스 경찰 르노에게 통행증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는 비시 정권과 나치 사이에서 카사블랑카의 권력 주도권을 기묘하게 줄타기하는 인물이다. 르노에게 통행증은 개개인의 탈출이 아니라, 자신이 어느 쪽 권력에 빚을 지고, 어느 쪽에 빚을 팔 수 있는지를 조율하는 지렛대다. 저항 운동의 지도자인 라슬로가 카사블랑카에 와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통행증이 옮겨가느냐, 가지 않느냐는 곧 누가 보호받고, 누가 보호받지 못하는지 정해지는 선택이 된다. 통행증은 이때 권력 계열 안에서 작동한다. 라즐로에게 통행증은 더 이상 개인의 안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저항 운동을 이어온 인물이고, 카사블랑카는 잠시 거쳐 가는 기착지일 뿐이다. 그에게 통행증은 단지 “여기서 살아남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도 저항을 이어갈 수 있는가의 문제다. 통행증은 여기서 정치/저항 계열의 중심에 놓인다. 릭에게 통행증은 조금 복잡한 층위를 가진다. 카사블랑카에서의 릭은 정치적 중립을 선언한 인물, “아무 편도 들지 않는”, 돈만 받고 술만 파는 냉소적인 주인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통행증이 그의 손에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다시 묻게 만드는 상징이 된다. 파리에서 일사에게 버림받았다고 믿은 이후, 릭은 모든 것에 등을 돌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통행증을 어떻게 쓸 것인지는 곧 “나는 중립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다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통행증은 여기서 릭의 정체성 계열을 뒤흔든다. 로맨스 계열에서 통행증은 “둘이 함께 떠날 것인가, 아니면 헤어질 것인가”의 문제로 등장한다. 파리에서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카사블랑카에서 통행증 하나로 뒤집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 그러나 영화에서 그 선택은 단순히 멜로드라마의 감정선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통행증이 쥐어지는 손이 바뀔 때마다, 사랑의 문제는 저항과 권력, 생존의 문제와 얽히며 복잡한 구조를 형성한다. 이 모든 흐름이 응축되는 장면이 바로 마지막 공항 장면이다. 활주로에서 릭은 통행증을 일사와 함께 사용해 도망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영화는 한동안 관객에게 그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릭은 마지막 순간에 통행증을 라즐로와 일사에게 넘긴다. 이 짧은 순간에, 앞서 말한 여러 계열들의 재배치가 한꺼번에 일어난다. 망명/시장 계열에서 통행증은 여전히 값비싼 물건이지만, 릭은 더 이상 그것을 금전적 가치로 바라보지 않는다. 로맨스 계열에서 그는 “연인과 함께 떠나는 남자”가 아니라, “연인을 보내주는 남자”를 선택한다. 정치/저항 계열에서 라즐로는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라, 다시 싸우기 위해 나아가는 인물로 재배치된다. 권력 계열에서는 슈트라서가 죽고, 르노는 나치 대신 릭의 편에 선다. 통행증이라는 빈칸이 옮겨가는 위치에 따라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의 자리는 연쇄적으로 변경된다. 통행증은 끝까지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고, 항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고 재구성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여기까지가 통행증을 대상=x로 읽어내는 구조주의적 독해라면, 릭 블레인이라는 인물을 한 발 더 나아가 후기 구조주의적인 인물로 읽어볼 수 있다. 영화의 대부분에서 릭은 구조가 그에게 할당한 자리에 머문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배경, 식민지적 공간인 카사블랑카, 비시 정권과 나치의 권력 관계, 망명자들의 혼란 속에서 그는 “중립적인 술집 주인”이라는 역할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다. 이때의 릭은 이미 주어진 구조적 관계망 안에서 특정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릭은 그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구조를 비틀어 다른 배열을 만들어 버린다. 그는 로맨스와 저항, 개인과 정치, 사적인 행복과 대의의 책임 사이에서 하나를 택해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통행증의 향방을 통해 이 모든 축을 동시에 재구성하는 선택을 한다. 이는 구조 자체가 작동하는 방식을 수정하는 선택이다. 그래서 엔딩의 릭은 고전 멜로드라마의 희생하는 남자 주인공임에 그치지 않고,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것을 비트는 사건 그 자체처럼 보인다. 통행증이라는 대상=x가 구조를 흔드는 빈칸이라면, 그 빈칸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실제로 결정하는 손은 릭의 손이다. 카사블랑카>의 마지막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한 남자의 숭고한 희생임과 동시에, 구조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이자, 그 사건 위에서 구조가 다시 그려지는 순간이다.
2025.11.17
철학과
제미나이
★ 경상국립대학교 철학 학석사과정 재학중 ★ 창작소설입니다. 대문이미지는 저자의 창작 이미지입니다. #1 “내 말 좀 들어봐!” 「⌧⌧ ⌧⌧⌧?」 “오늘 옆집 꼬마애가 글쎄, 록시가 자기보다 크면서 말도 못 한다고 뭐라고 하는 거 있지?” 「⌧⌧⌧⌧⌧. ⌧⌧⌧⌧ ⌧⌧ ⌧⌧ ⌧⌧.」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본인들이 모르는 거면서.” 「⌧⌧⌧⌧ ⌧⌧⌧ ⌧⌧⌧⌧⌧ ⌧⌧. ⌧⌧⌧ ⌧ ⌧⌧⌧.」 본인의 일이 아니면서도 씩씩거리며 화내는 코스타. 그런 코스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안아주는 록시. 그들의 부모는 둘을 애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예쁜 금발에 맑은 푸른 눈을 가진 코스타와는 달리 어쩐지 탁한 색을 가지고 있는 록시였지만, 둘은 서로에게 가장 소중했다. 의사는 록시가 태어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코스타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다. 금방 떠나버리는 건 아닐까,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부모의 걱정이 무색하게 둘은 어느 아이들보다도 잘 자랐다. 그렇지만 록시는 말을 하지 못했다. 표정과 손짓, 글과 그림으로 원하는 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코스타는 록시의 말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쌍둥이라 그런 것일까? 록시의 의견은 코스타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 의사도, 부모도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모른다. 코스타는 록시의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답답했을 뿐이다. 「⌧⌧⌧ ⌧ ⌧⌧ ⌧⌧? ⌧ ⌧⌧ ⌧⌧ ⌧ ⌧⌧ ⌧ ⌧⌧⌧ ⌧⌧⌧⌧. ⌧⌧⌧⌧ ⌧⌧⌧ ⌧⌧⌧ ⌧⌧⌧. ⌧⌧⌧ ⌧ ⌧⌧ ⌧⌧⌧⌧ ⌧ ⌧⌧?」 “혹시나! 록시가 나 몰래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 수도 있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불편하게 하는 걸 엄마나 아빠한테 얘기할 수도 있고, 또…….” 사뭇 진지하게 나열하는 코스타의 말에 록시는 무음의 웃음을 터트렸다. 「⌧⌧ ⌧⌧⌧⌧⌧ ⌧⌧⌧ ⌧⌧⌧ ⌧⌧.」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과 타인을 구분한다. 코스타도 그랬다. 코스타와 록시는 쌍둥이이기에 모든 걸 공유하고 있지만, 분명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다른 점이 나타날 거라는 걸. 코스타는 그것을 걱정했다. 록시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아버지가 이런 걸 다 보내주셨네. 이 비싼 걸…….” “그만큼 아이들이 소중하다는 의미겠지. 얘들아, 여기 봐라.”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부모를 바라봤다. 부모의 손에 들린 것은 카메라였다. “애들이 쓰기에는 무겁겠어요.” “서로 잡아주면 괜찮지 않을까? 자. 하나, 둘…….”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힌다. 코스타와 록시는 여전히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 ⌧⌧?」 코스타는 부모에게 달려간다. 어머니에게 안기며 카메라를 바라본다. “이게 뭐예요?” “카메라라고 하는 거란다. 이 안에 필름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사진사 아저씨에게 부탁하면 코스타가 찍었던 풍경이 종이에 그림처럼 그려지지.” “제가 그림을 그리지 않고도요? 신기하다!” “할아버지가 주셨어. 할아버지는 더 이상 쓰지 않는다고 하네. 코스타도 해 볼래?” 코스타는 카메라를 받아든다. 역시 무겁다. 록시가 다가와서 카메라를 같이 들어준다. 「⌧⌧ ⌧⌧ ⌧⌧ ⌧⌧⌧ ⌧⌧ ⌧ ⌧⌧.」 “록시가 의자 위에 두고 찍자고 해요!” “똑똑하구나. 하나 가져다 줄까?” 부모가 건네준 의자 위에 카메라를 두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풍경 사진을 찍고, 서로의 사진을 찍고, 부모의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사진을 찍으며 계속 웃고 있었다. 사진을 당장에 볼 수 없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 ⌧⌧⌧.」 “엄마. 이제 끝이에요?” “어디 보자…… 그러네. 스물 네 장이 끝이구나. 아빠한테 말해서 사진사 아저씨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자.” “신난다! 록시, 어떤 사진이 제일 궁금해?” 「⌧⌧ ⌧⌧ ⌧⌧. ⌧⌧⌧⌧?」 “나는 엄마랑 아빠 사진! 록시랑 내가 찍힌 사진도 궁금하고.” 「⌧⌧⌧⌧. ⌧⌧⌧ ⌧⌧⌧?」 사진은 이틀 뒤에 그들의 아버지가 가져왔다. 색 하나 없는 흑백사진이고, 흔들린 것들이 정말 많았다. 부모는 이리 비싼 걸 이렇게 막 써도 되는 것인지 걱정했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니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록시와 코스타는 사진을 한 장 한 장 바닥에 펼쳤다. 빛이 반사되어 제대로 나오지 않은 걸 보면서 웃기다는 듯 코스타가 깔깔거렸다. 그런 코스타의 눈에 들어온 사진 하나. 록시가 숲을 찍은 사진이다. 흑백 사진임에도 색이 보이는 것 같았다. 생동감이 있다. 마치 빨려 들어갈 것 같이. 코스타는 사진을 들어 록시에게 보여준다. “이 사진이 제일 마음에 들어.” 「⌧⌧⌧⌧ ⌧⌧⌧ ⌧⌧⌧ ⌧⌧⌧⌧. ⌧ ⌧⌧⌧ ⌧⌧ ⌧⌧⌧⌧ ⌧⌧ ⌧ ⌧⌧?」 “나비가 날아다니고, 예쁜 요정들이 노래할 것 같은 곳이야.”「⌧⌧ ⌧⌧⌧ ⌧⌧⌧. ⌧⌧⌧⌧ ⌧⌧⌧ ⌧⌧⌧ ⌧⌧ ⌧⌧⌧⌧⌧.」 “정말 좋은데!” 그날 밤. 잠결에 물을 마시러 나온 코스타는 항상 침대에서 같이 자는 록시가 없어졌다는 걸 눈치챈다. 화장실에 간 걸까? 아니면 부모한테? 머리로 생각하며 집안 곳곳을 돌아다닌 코스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사진을 발견한다. 록시가 숲을 찍은 사진이었다. 분명 정리했는데, 라고 생각한 코스타는 사진을 든다. 어두워서 그런지 사진에 색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순간, 빨려 들어간다. #2 코스타가 눈을 뜬 곳은 어느 숲속이었다. 분명 집과 가까운 숲과 비슷한데, 더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늘은 밤처럼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나무들이 형형색색으로 반짝였다. 나비들이 줄지어 춤을 췄다.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모습이 코스타에게 인사하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맑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코스타는 바닥에 놓인 흰 자갈길을 따라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간다. 버섯에서 빛이 나고 있다. 완전히 동화 속 풍경이다. 그렇게 안으로, 안으로……. 수풀들을 헤치고 나아가 도착한 곳에는 마치 사람이 지내는 듯 생활공간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서랍이 위태롭게 쌓여있고 침대에는 여러 천을 덧대어 만든 이불이 있으며, 고급스러운 찻잔과 뿌연 거울, 책상 등이 널려 있었다. 흰 자갈길은 어느 순간 포근한 카펫으로 바뀌어있었다. 요정들이 날아다닌다. 날개에서 반짝이 가루가 떨어지고, 코스타의 손보다 작은 요정들이 아이가 신기한 듯 빤히 바라보았다. 그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예쁜 금발의 아이가 앉아서 노래를 흥얼인다. 요정들이 아이 곁으로 날아가 같이 노래를 부른다. 아름다운 소리다. 환상적인 모습이다. 코스타는 고개를 돌린다. 놓여 있는 거울 속 스스로와 눈이 마주친다. 거울 속 코스타는 부스스한 금발에 탁한 푸른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코스타는 깨어난다. 아침이다. 사진을 찾았던 바닥에 누워있다. 곁에서 록시가 코스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나 방금 엄청난 꿈을 꾼 것 같아, 록시!” 「⌧⌧ ⌧?」 “우리가 이 사진을 보며 이야기했던 것들이 전부 나왔어. 그리고 또, 나무들과 버섯에서 빛이 났고,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있고, 포근한 카펫이랑, 나랑 닮은…….” 나랑 닮은. 코스타와 닮은 뒷모습의 아이가 있었다면, 코스타가 거울로 본 자신은 누구인가? 분명 그건 코스타 앞의 록시와 마찬가지였다. 「⌧⌧⌧⌧ ⌧⌧?」 “그냥, 그랬다고! 정말 좋은 곳이었어. 록시에게도 소개해주고 싶은 곳.” 「⌧⌧⌧ ⌧ ⌧⌧. ⌧⌧ ⌧⌧ ⌧⌧⌧⌧ ⌧ ⌧⌧.」 코스타에게 그곳은 마치 꿈같은 곳이었다. 아침에 확인한 사진은 여전히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져있을 뿐. 다른 색은 하나도 없었지만, 여전히 사진에는 생동감이 넘쳤다. 정말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갔었나? 록시는 항상 그 사진을 들고다녔다. 책갈피로 쓰는 듯했다. 코스타는 매일 록시의 곁에서 사진을 흘겨보았다. 다시 그 꿈을 꾸고 싶다고. 분명 그 사진에 힘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 날 이후, 코스타가 잠에서 깨어나면 침대 위인 날이 없었다. 어느 날 밤.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코스타는 항상 침대에서 같이 자는 록시가 없어졌다는 걸 눈치챈다. 코스타는 눈이 어둠에 적응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인다. 록시가 항상 들고 다니던 책을 찾는다. 책 위에는 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에 손이 닿는 순간, 빨려 들어간다. 저번과 같은 풍경이다. 어두운 밤, 빛나는 나무들이 손을 흔들고 요정들이 노래하며 흰 자갈길이 끝없이 펼쳐진 숲속.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살짝 움츠렸다. 코스타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천천히 나아간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마치 코스타와 똑 닮은 아이는 위태롭게 쌓인 서랍 제일 위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코스타는 거울을 본다. 탁한 색을 가진 자신은 마치 록시 같았다. 코스타는 그 아이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인가 막혀있는 기분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위를 올려다본다. 「너는 누구야?」 아이가 반응한다. 고개를 숙여 코스타를 바라본다. “⌧⌧ ⌧⌧⌧?” 「……나?」 “⌧⌧ ⌧⌧. ⌧⌧…… ⌧ ⌧⌧⌧⌧ ⌧ ⌧⌧ ⌧⌧.” 코스타는 혼란스러웠다. 그 아이는 개의치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작은 요정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작은 요정들은 나뭇잎의 이슬을 먹고 왔다던가, 버섯의 반짝임을 가져왔다던가, 저 하늘 끝까지 다녀왔다고 이야기한다. 아이는 이 숲의 주인인 것처럼 여유로운 모습이다. 코스타는 그 모습을 바라만 보다가 전달한다. 「내가 널 뭐라고 부르면 될까?」 “⌧⌧⌧⌧ ⌧⌧⌧⌧ ⌧. ⌧⌧⌧⌧ ⌧⌧ ⌧.” 꿈속의 록시와 만나게 되었다. 진짜 록시인지는 모른다. 꿈속의 록시는 노래를 부른다. 코스타가 여태 전달받은 것과 다른 소리로. 목으로 나온 소리가 아니었던 그 소리는, 지금 이곳에서 목으로 전달되고 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한참을 그곳에 서서 바라보았다. 코스타는 깨어난다. 아침이다. 저번처럼 바닥에 누워있다. 책은 떨어져 있고, 록시가 곁에서 코스타를 바라보고 있다. 「……⌧⌧⌧?」 록시에게 전달받은 말에 답할 수가 없었다. 코스타는 그저 록시를 바라본다. 록시가 고개를 기울인다.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 ⌧⌧⌧?」 꿈속의 아이를 록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 코스타와 같은 맑음을 가진 아이가 사실은 록시라면, 그곳의 코스타는 무엇이고, 이곳의 록시는 무엇일까? “그냥…… 악몽을 꾼 것 같아.” 록시는 걱정이 담긴 얼굴로 코스타를 바라본다. 「⌧⌧⌧ ⌧⌧⌧⌧ ⌧⌧⌧⌧ ⌧⌧. ⌧⌧ ⌧⌧ ⌧⌧⌧ ⌧⌧⌧ ⌧⌧⌧⌧⌧⌧. ⌧ ⌧⌧⌧ ⌧⌧ ⌧⌧?」 “록시는, ……록시도 밤이면 내 옆에 없잖아?” 「⌧⌧ ⌧ ⌧⌧. ⌧ ⌧⌧ ⌧⌧⌧ ⌧⌧ ⌧⌧⌧⌧.」 서로의 말이 맞물리지 않는다. 코스타 혼자 언성을 높이며 다투는 것을 본 부모들이 아이들을 말린다. 하지만 그들도 알 수 없다. 둘 다 사진에 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록시는 모를뿐더러 코스타는 사진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록시는 코스타에게 말을 전달하지 않았고, 코스타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은 코스타가 가져갔다. 더이상 록시에게 사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코스타와 록시는 따로 지내기 시작했다. 불편함은 없었다. 코스타는 원래 모두와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록시는 늘 혼자였다. 잠도 따로 자기 시작했다. 록시는 말을 하지 않으니 코스타가 부모와 떨어져 혼자 자기로 했다. 가끔 부모의 방을 몰래 살펴보긴 하지만 록시는 늘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다. 정말 꿈이었을까. 록시에게 못되게 군 걸까? 코스타는 계속 생각했다. 또다시 밤. 눈을 뜬 코스타는 밖으로 나와 부모의 방을 슬쩍 본다. 록시가 보이지 않는다. 코스타는 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베개 밑에 두었던 사진을 들어 올린다. 그 순간, 빨려 들어간다. 숲속은 항상 그대로다. 코스타가 들어왔을 때처럼 밤의 숲속이다. 나무들이 가지를 흔들고 흰 자갈길이 연못까지 이어져 있다. 꿈속의 록시는 색색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꿈 밖의 코스타와 거의 같은 외모. 옆의 거울은 탁한 코스타를 비춘다. 예쁜 머리카락을 건드린다. 부드럽게 떨어진다. 꿈속의 록시는 코스타와 눈을 맞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 선다. 「일어났어?」 “⌧⌧⌧ ⌧⌧ ⌧ ⌧ ⌧⌧⌧?” 「무슨 소리야?」 “⌧⌧⌧ ⌧…… ⌧⌧⌧, ⌧⌧ ⌧⌧⌧⌧ ⌧⌧⌧.” 「다툰 거…… 맞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잖아.」 “⌧ ⌧ ⌧⌧⌧ ⌧⌧⌧⌧⌧ ⌧⌧. ⌧⌧ ⌧⌧⌧ ⌧⌧⌧ ⌧⌧⌧⌧.” 「알아. 근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꿈속의 록시는 코스타의 손을 잡는다. 그대로 다시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 반짝이는 나무들과 흰자갈길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숲속은 미지의 곳이었다. 아직 보지 못한 곳이 더욱 많았다. “⌧⌧⌧?” 「궁금해.」 “⌧⌧ ⌧⌧ ⌧.” 꿈속의 록시가 그 자리에서 손뼉을 짝, 하고 치니 하얀 천에 쌓인 둥근 식탁이 생겨났다. 손뼉을 또 치면 케이크가, 주스가, 작은 인형들이 계속 나타났다. “⌧⌧⌧⌧⌧. ⌧⌧ ⌧⌧⌧ ⌧ ⌧⌧⌧⌧ ⌧ ⌧ ⌧⌧.” 「내가 원하는 것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마치 동화 같은 곳. 환상적인 세계. 꿈속의 록시는 코스타를 연못 쪽으로 이끈다. 나무가 반짝인다. 요정들이 반짝이 가루를 날리며 하늘을 날고 있다. 꿈속의 록시는 그 앞에서 코스타와 춤을 춘다. 흥얼이는 소리가 들린다. 요정들이 흥얼이고 꿈속의 록시가 흥얼인다. 요정들이 꽃잎을 들고 와 꿈속의 록시와 코스타 위에 뿌린다. 코스타는 하늘을 바라본다. 꽃잎이 바람에 흩날린다. 나무의 빛에 가려진 별들이 보인다. 완벽한 세계다. 록시가 말을 할 수 있고, 노래를 흥얼이며 춤을 출 수 있는 곳. 새로운 것들을 경험할 수 있고, 상상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곳. 요정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곳. 꿈속의 록시와 빙글, 하고 춤을 추면서 생각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있는 게, 록시에게 좋은 게 아닐까? “⌧⌧⌧⌧ ⌧. ⌧ ⌧⌧⌧ ⌧⌧.” 코스타는 깨어난다. 여전히 밤이다. 다행히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록시는 곁에 없었다. 다시 부모의 방으로 향하지만, 침대 위에 록시는 없었다. 그러면 어디로 간 것일까. 부모의 방에서 나온 코스타는 문득 현관을 바라본다. 바람에 문이 흔들린다. 문이 열려있다. 코스타는 맨발로 집 밖으로 나가 숲으로 향한다. 집 주변의 숲은 나무가 많았다. 공기는 좋았지만, 위치가 좋은 곳은 아니었다. 길을 헤매기도 쉽고, 숲속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안으로, 안으로……. 까마귀가 운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다. 코스타는 부모도 부르지 않은 채 온 것을 약간 후회했다. 한참을 걸으니 무언가 보인다. 록시가 숲속에 쓰러져 있었다. 코스타는 재빨리 록시 곁으로 다가간다. “괜찮아?” 코스타가 록시를 흔들면, 록시가 천천히 눈을 뜬다.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얼굴. 하지만 그건 상관없다는 듯 록시는 코스타를 붙잡고 전달한다. 「⌧ ⌧⌧ ⌧⌧⌧ ⌧⌧ ⌧ ⌧ ⌧⌧, ⌧⌧⌧!」 “무슨 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나랑 닮은. 「⌧⌧ ⌧⌧ ⌧⌧⌧ ⌧⌧ ⌧⌧⌧ ⌧⌧ ⌧⌧⌧⌧.」 “너를 닮은 아이가 슬픈 눈으로 너를 바라봤어?” 하늘을 바라본다. 나무는 빛나지 않는다. 요정들도 없다. 찬 바람만 불고 있다. 별들도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삭막한 풍경이다. 코스타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마음을 록시에게 전할 수 있을까. 록시는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살펴본다. 숲속이다. 아무것도 없는 숲속. 아름다움 따위 없는 곳. “있잖아, 록시.” 록시가 고개를 기울인다. 듣고 있다는 듯 시선을 맞춘다. “너는 그곳에 있을 때 행복해 보였어.” 「⌧⌧ ⌧⌧⌧ ⌧⌧ ⌧ ⌧⌧⌧ ⌧⌧⌧⌧?」 록시는 알 수 없는 말. 코스타만 알고 있는 록시의 행동들. 꿈속의 록시지만, 록시가 그곳을 보고 왔다면. 그 꿈속을 이곳의 록시가 원한다면. “너는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 #3 숲이 일렁인다. 나무들이 이상하게 반짝인다. 평화로운 세계를 깨버리는 침입자를 좋아하는 이들은 없다. 올바르게 규정된 세계의 모든 것들이 소란스럽게 떠든다. “원래 그 아이는 이곳에서 태어났어야 했어.” “걱정 마. 너도 마찬가지니까.” “둘로 나눠질 수 없는 것이 둘로 나누어져서 그래.” “수많은 파동이 일고 있어.” “여기는 완벽한 세계. 변함없이 그대로.” “다른 건 없어.” “그 아이는 우리를 발견해줬어.” “감각으로 느껴봐.” “그 아이를 통해 우리는 세계을 넓힐 수 있어.” “너는?” “너는 어때?” “너는 그 아이를 위해 이곳에 있을 수 있어?” 하나하나가 코스타의 귓가를 치고 지나간다. 작은 것들이 잉잉거리는 소리. 바라지 않았던 것을 바라게 되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을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면 자신의 세계가 변한다. 하지만 애초부터 바라지 않음을 몰랐더라면? 필요하지 않음을 몰랐더라면? 그 파동은 더욱 크다. 본인이 몰랐던 본인의 마음을 남이 알려준다면 더욱. 록시가 귀를 막는다. 숨기고 있던 감정이 드러난다. 록시가 소리를 지른다. 목소리가 들린다.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목소리. 코스타의 목이 막힌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마치 두 세계가 합쳐지듯이. 그들은 코스타의 선택을 요구한다. 이곳 자체가 하나의 세계이기에, 애초부터 둘은 하나였기에 그들에게는 코스타나 록시나 다름이 없다. 그럼 이건 코스타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인가? 「나는…….」 “⌧⌧……!” 「그곳이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해.」 “⌧⌧⌧ ⌧⌧ ⌧⌧⌧⌧ ⌧⌧⌧⌧ ⌧⌧⌧…….” 코스타는 록시를 바라본다. 코스타의 생각이 록시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다. 겨우 뱉어내는 말들. 코스타의 선택은 록시의 선택. 코스타가 말하는 것이 곧 록시가 말하는 것. 「동화 같은 곳. 그곳의 목소리는 정말 아름다웠어.」 “동⌧ ⌧⌧ ⌧. ⌧곳의 목⌧⌧⌧ ⌧말 아⌧⌧⌧어…….” 「아마 시간도 흐르지 않을 거야. 항상 환상적인 풍경을 볼 수 있겠지.」 “아마 시⌧⌧ 흐르⌧ ⌧⌧ 거야. ⌧⌧ 환상적⌧ 풍경⌧ ⌧ 수 ⌧겠지…….” 「상상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곳이라면.」 “상상⌧⌧ 모⌧ 것을 이⌧ ⌧ 있는 곳⌧⌧면…….” 「그곳을 선택할 거―」 “싫어.” 록시가 전달을 막았다. 말을 뱉어내지 않는다. 록시가 자리에 주저앉는다. 귀를 막은 모습 그대로다. 숲이 일렁인다. 같은 대답이 아니다. 나와 같은 소리로 말을 한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그곳을 선택하지 않는 거야?」 “당연하잖아. 그곳에서는.” 다른 아이들에게 그곳을 보여준다면 모두가 그곳으로 떠나려고 할 것이다. 코스타도 그랬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누가 마다할 수 있을까. 원할 때 자고, 원할 때 일어나고, 원하는 걸 먹고,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곳. 밤이 되면 잠에 드는 게 아니라, 밤에도 깨어나 세계를 둘러볼 수 있는 곳.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곳. “너와 내가 함께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조금 추운 곳. 「우린 원래 하나래. 원래 우리는 각자에게 혼자였어.」 “싫어. 그게 싫었어. 함께할 수 있는데. 혼자잖아. 그건 하나가 아니야.” 「너도 그곳을 마음에 들어했잖아. 나도 그곳이 좋아. 마음에 들었어.」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슬퍼하는 나를 봤어. 슬퍼하는 너를 봤어. 그건 행복이 아니야.” 그곳은 물론 누구에게나 행복한 곳. 하나인 존재가 둘로 나뉘었기에 하나의 선택만을 요구하지만 다른 하나도 입을 연다. 둘이 된 것이 코스타와 록시의 선택이 아니었던 것만큼, 새로운 경험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은 코스타와 록시의 선택이어야만 한다고. 누군가가 만든 인위적인 곳에서 그럴 수 없다고. “둘이어야만 해.” 록시가 고개를 든다. 여전히 숲이 일렁이고 바람이 차게 분다. 나무와 바람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린다. 더 이상 반짝이는 나무들은 보이지 않는다. 일순간 고요해진다. 세계는 합쳐지지 않았다. 두 아이는 아침이 될 때까지 숲속에 있었다. 아이들을 찾으러 온 부모가 둘을 껴안으며 안심했다. 코스타는 더이상 록시의 말을 전달받지 못했다. 록시는 이곳에 머무는 것을 선택했다. 코스타의 선택은 록시의 선택, 록시의 선택은 코스타의 선택. 본인이 몰랐던 본인의 마음을 남이 알려준다면 그 파동이 크다. 사실은 서로로 남아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나가 된다면 차이를 확인할 수 없으니까. 그곳의 기억은 잊기로 했다. 사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의 부모는 아이들에게 일어난 사고를, 아이들이 경험한 사건을 이해하길 포기했다. 서로가 되었기에 더 이상 서로에게 동일하지 않은 타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성장이자 생성의 과정이 아닐까? 머무르는 것을 선택하지 않은 아이들은 계속 변화할 것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살아가기로 했다.
2025.11.04
철학과
들뢰즈 100주년과 파리의 지적 동향
대문이미지 : Paris 대학교 문장 설명은 아래 참조 안녕하세요. 저는 파리 낭테르(구 파리 제10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문성균입니다. 전공은 프랑스 철학이며, 특히 질 들뢰즈의 철학과 형이상학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들뢰즈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파리 곳곳에서 다양한 기념 행사와 학술 프로그램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동향은, 들뢰즈가 뱅센-생드니(현 파리 제8대학) 시절에 진행했던 강의들이 최근 본격적으로 출판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이 강의들은 webdeleuze.com을 통해 일부 녹음본이나 전사본의 형태로만 접근할 수 있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공식 출판이 지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1~2년 사이, 파리 소르본-팡테옹(파리 제1대학)의 다비드 라포우자드(David Lapoujade) 교수를 중심으로 이러한 강의들이 체계적으로 편집·교정·번역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스피노자, 국가 장치와 전쟁 기계, 회화에 관한 강의들이 출판되었으며, 앞으로도 다른 강의들이 순차적으로 공개될 예정입니다. 이 작업은 단순한 자료 복원이 아니라, 들뢰즈 사유의 생생한 현장을 다시 불러내는 철학적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의록 출판 외에도 올해는 들뢰즈 철학을 재조명하는 다양한 세미나와 학술 행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로는 최근 출간된 Deleuze aujourd’hui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프랑스의 젊은 들뢰즈 연구자들이 최근 연구 성과를 엮은 것으로, 카미유 샤무아(Camille Chamois)와 토마 데슈베리(Thomas Detcheverry)가 공동으로 편집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2000년대 이후 급변한 세계정세―기후 위기, 신자유주의의 급진화, 인류세의 도래, 가속주의의 부상, 교육의 위기 등―와 관련하여 들뢰즈의 사유를 어떻게 ‘사용(usage)’할 수 있을지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이처럼 Deleuze aujourd’hui는 동시대의 문제들에 대응하는 들뢰즈 철학의 새로운 생명력을 보여주는 시의적이고도 중요한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올해 파리에서는 기후, 인간, 인공지능, 전지구화를 주제로 한 학술 행사들이 다수 개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지적·철학적 아젠다들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며, 철학이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세계의 문제들과 다시 접속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2025.11.04
철학과
함수와 개념, 에 대한 생각 몇가지
★ 들뢰즈랩 연구원, 경상국립대학교 강사, 박사수료본 글 「함수와 개념, 그 사이에서 펜을 들다」는 석사를 갓 들어온 어린 연구자가 자신의 관심사와는 멀리 있다고 생각되는 철학자의 책을, 그것도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면서, 또한 말년에 써서 더 부담스러운 그러한 책을 읽으면서 그 나름대로 배우게 된 점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들뢰즈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몇몇 개념들을 좀 더 세밀하게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실제로 이 글이 나오기 전에 피드백이 오고 갔지만 그 때문에 더.....- 제 잘못입니다. 이전 버전이 더 좋았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더라도 훌륭하게 본인의 생각을 잘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이 글을 읽으면서 궁금증이 든 것은 우선 철학적인 내용보다는(이것은 발표를 들은 청중들이 해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발표자가 기존에 생각했던 철학, 혹은 과학철학이 어떤 것이었냐에 대한 것입니다. 구체적이지 않더라도 철학의 이미지나 과학의 이미지가 기존에 본인에게 어떠했는데, 이 글을 준비하면서나 수업을 들으면서 어떻게 바뀌었는지가 듣고 싶습니다. 발표문의 마지막에 발표자는 개념의 발명, 개념의 창조가 ‘철학’이라는 들뢰즈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연구해 나갈지에 대한 방향을 그려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쓰지않은 것에 대해서 묻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궁금하여 질문드립니다.(제 개인적으로 저는 철학사를 연구하고 있지만 과연 내가 개념을 창조하는 철학자가 될 수 있는지가 항상 물음표 이기 때문에...)두 번째 궁금한 점은 들뢰즈가 철학과 과학을 비교하면서 과학이 무한을 포기하고 지시 관계에 머물렀다고 했을 때, 이러한 들뢰즈의 주장이 과학과 과학철학을 주로 공부해 왔던 발표자에게 설득력이 있었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우주 그 자체를 탐구하고(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을 고려하더라도)있고, 그렇다면 실재 우주를 다루고 있다면 연속성이나 무한을 포기했다는 들뢰즈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5.11.04
철학과
함수와 개념, 그 사이에서 펜을 들다
★ 경상국립대학교 철학 학석사과정 재학중『철학이란 무엇인가?』과학철학을 전공하는 내가 들뢰즈 철학 학회에서 발표를 한다는 것은 마치 다른 대륙의 세상을 횡단하는 모험이자 도전과도 같은 일이었다. 들뢰즈의 저서라고 접해본 것은 수업 시간에 더듬더듬 읽어본 『철학이란 무엇인가?』 뿐이었고, 그마저도 말년의 들뢰즈가 쓴 책답게 몹시 어려운 내용으로 날 괴롭혔었기 때문이다. 철학이라 불리우는 하나의 영역 안에 서 있음에도, 들뢰즈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그 간극이 매우 컸다. 그런 이유로 발표의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가 이미 난제인 것은 당연했다. 발표 제의를 받았을 바로 그 무렵, 날 난감하게 한 것은 들뢰즈의 낯선 언어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스스로의 학문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방황하던 차였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활동이며 이를 통해 나는 뭘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공부한 그 책,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는 철학에 관한 근본적인 고민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이 말하기를,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어쩌면 "노년이 되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할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물을 것이 없게 된 한밤중에, 고요한 불안 속에서" 제기되는 질문이며, 자신들이 평생 해온 그 일이 무엇이었는지 마침내 자문할 수 있는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겨우 시도해 볼 법한 작업이다(Deleuze & Guattari, 2). 비록 나는 노년의 반성과 지혜를 가진 철학자가 아니며 이제 막 학문의 길에서 걸음마를 뗀 입장이지만, 비슷한 무게의 질문을 품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평생을 함께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 철학 안에서, 나는 과연 무얼 하고 있는 걸까?‘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들뢰즈는 아주 섬세하며 아름다운 고찰을 기록해냈다. 그리고 철학 뿐만 아니라, 과학과 철학을 구분하는 구체적인 기획 또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혹시 들뢰즈의 그러한 작업이, 특히 과학에 대한 철학을 공부하는 나의 이 방황에 있어 나침반이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따라서 이 글은 들뢰즈 철학에 대한 냉철한 학술적 분석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지나온 사유의 과정을 통해 나의 고민을 성찰하고, 그 과정에서 뜻밖의 위로와 새로운 방향성을 얻게 된 여정의 기록에 가깝다.들뢰즈의 지도: 과학과 철학의 구획 문제들뢰즈와 가타리는 과학과 철학을 어떻게 구분 짓는가? 그 기준은 한 마디로 “‘혼돈Chaos’을 어떻게 마주하는가?”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혼돈은 단순히 무질서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형태가 출현과 동시에 소멸하는 "무한한 속도"를 지닌 잠재성의 영역을 의미한다(42). 그리고 이 혼돈(Chaos)과 질서(Cosmos)는 끊임없이 공존하고 서로를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장을 이룬다. 철학의 전략: 무한과 함께하기철학은 “혼돈의 무한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전략을 택한다. 이 무한한 운동을 자신의 작업 공간인 ‘내재성의 평면The plane of immanence’(47) 위에 개념을 통해 정립함으로써, 그 일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평면은 마치 혼돈을 걸러내는 체와 같이 작동하여, 무한한 운동 중에서 사유가 붙잡을 수 있는 움직임들을 선별한다. 철학이 이 평면 위에서 창조하는 도구는 바로 '개념'이다. 개념은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살아있는 실체이다(5). 개념의 핵심은 그 구성 요소들이 ‘불가분적 변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요소들은 하나의 개념 안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도록 섞여 들어가며, '식별 불가능성의 문턱' 을 형성한다. 이러한 내적인 결속력, 즉 부분적으로 겹치고 이웃하는 지대 덕분에 개념은 일관성을 얻게 된다. 철학의 최종 목표는 현실의 구체적인 '사태‘나 복잡한 '혼합물'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물질적이지 않은 순수한 ‘사건(event)'을 추출해내는 것이다(77). 들뢰즈가 말하는 '개념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그러한 활동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혼돈이라는 무한한 다양체 속에서 특정한 문제들을 잘라내고, 그 문제와 맞닿은 사건의 윤곽을 드러내는 활동이다.과학의 전략: 무한을 감속하기이에 반해 과학자들은 혼돈의 무한한 속도를 "포기"하는 전략을 선택하며, 세계에 대한 명확한 '지시(Reference)' 체계를 확보하고자 한다. 과학은 무한을 ‘감속’ 시킴으로써 자신의 작업 공간인 '지시의 평면The plane of reference'(118)을 구축한다. 이 과정은 마치 무한한 움직임을 카메라처럼 포착하여 관찰 가능한 기준점을 설정하는 것과 같다. '감속-속도 늦추기'는 연속적인 것을 불연속적인 것으로 변환하는 핵심 과정이다. 예를 들어, 빛의 속도라는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과학은 무한히 빠르고 예측 불가능한 혼돈의 세계를 측정 가능하고 좌표 위에 표시할 수 있는 '사태(state of affairs)'로 변환시킨다. 이 감속을 통해 잠재적인 것이 측정 가능한 현실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지시의 평면 위에서 과학이 창조하는 핵심 도구는 함수로, 그것은 '독립 변수' 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섞여 들어가는 ‘개념’과는 다르다. 함수의 변수들은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하며 설정되고, 과학은 이 독립된 변수들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세계의 특정 상태를 정량적으로 기술한다. 함수를 사용해 이러한 현실의 사태에 명확한 지시 대상을 부여하고, 세계의 물리적 작동 방식을 측정해 검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들뢰즈의 눈으로 과학 바라보기과학의 핵심 도구인 함수는 지시 체계 내에서 부분적 관찰자라는 존재를 통해 비로소 기능한다(129). 이 부분적 관찰자들은 맥스웰의 악마,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의 관찰자와 같이, 과학 영역 내부의 중재자로 기능한다. 이들은 라플라스의 '악마'처럼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총체적 관찰자가 아니며, 과학적 진술이 언제나 부분적이고 조건 지어져 있음을 내포한다. 이 부분적 관찰자는 지식의 주관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양자 물리학을 포함한 과학에 대해 "측정과 대상 사이의 주관적 간섭에 따라 결과가 바뀐다"는 식의 주관주의적 해석이 부적절하다고 말한다(130). 특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들뢰즈의 입장이 분명해진다. 이 원리는 보통 "우리가 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재려고 하면 그 속도(운동량)를 알 수 없게 되고, 속도를 재려고 하면 위치가 불분명해진다"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현상을 '관찰자 효과'라고 부르며, 마치 관찰자(주체)가 개입하여 대상을 측정하는 순간 그것을 흔들어버려 결과가 불확실해진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러한 주장을 거부한다. 그는 관찰자의 관찰 행위가 주관적인 개입이 아니라, 과학이 구축한 좌표계 시스템 내에서 객관적인 사태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 정확한 측정을 시도하는 순간, 우리가 사용하는 함수의 작동 방식으로 인해 특정한 한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측정은 독립 변수의 수를 줄어들게 만들고, 이로 인해 측정하고자 했던 입자의 상대적인 위치와 같은 필수 정보가 '현실화될 수 있는 영역(현실화 영역)'의 바깥에 남게 된다. 쉽게 말해, 우리가 세계의 한 부분을 명확히 보려고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는 순간, 초점 밖에 있는 다른 부분들은 흐릿해지거나 아예 포착되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이 불확실성은 누군가의 주관적 개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측정하는 과학적 도구와 시스템 자체’가 만들어내는 객관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측정의 불확실성은 관찰 주체의 주관적인 개입이 아니며 함수가 작동하는 좌표계 시스템이 객관적 현실화를 수행하는 데 내재된, 필연적인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는 과학이 구성하는 진리의 상대성—진리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의 진리—특정 시스템과 조건 하에서만 유효한 객관적 진리—라는 들뢰즈의 주장을 뒷받침한다.『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을 때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이 들뢰즈의 위와 같은 해석 방식이었다. ‘이런 시선으로도 과학을 바라볼 수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나는 과학철학을 공부하면서 늘 과학적 진리의 객관성과 주관성의 문제 사이에서 고민해 왔다.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시된 패러다임 개념은, 과학적 지식이 결코 순수하고 절대적인 객관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시사했다. 쿤에 따르면, 과학자들의 공동체는 특정 패러다임(세계관, 방법론, 문제 해결 방식의 총체)에 따라 그 안에서 약속된 규칙을 기준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이 패러다임이 달라지면 관찰 대상과 개념, 심지어 객관적 사실에 대한 해석 자체도 다르게 인식된다. 점점 더 가속화 되는 과학사의 변화 과정은, 현재의 객관적 지식도 언젠가 결국 폐기될 또 하나의 시대적 이론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하는,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한다. 진리라는 것은 어쩌면 ‘그때’의 맥락 안에서만 성립하는 단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안다. 들뢰즈의 접근 방식은 이 끝없는 참과 거짓의 논쟁-과학에서 뿐만 아니라-을 다르게 바라볼 여지를 제공해준다.그는 불확정성 원리를 '관찰 주체의 주관적 영향력'도 아니고, 단순히 '관찰 도구의 물리적 한계'도 아닌, '과학의 평면 자체가 만들어내는 한계'로 끌어올렸다. 그는 진리의 상대성을 말하는 대신 상대적인 것의 진리를 말함으로써, 과학적 지식의 유효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제한적 성격을 드러냈다. 이는 과학적 진리의 절대적 정당성을 독립적인 자연 그 자체에 의존하여 답하려 했던 그러한 전통을 벗어난 접근이었다. 들뢰즈는, 과학의 진리가 지시의 평면 위에 설치된 좌표계와 함수라는 틀을 통해 비로소 정립된다고 말한다(130). 그의 시선은 이처럼 과학적 진리를 '자연 속에서 찾아낸 실재'로 볼 것인지, 아니면 ‘평면에 의해 구성된 필연적 진리'로 볼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나에게 던져주었다.지층을 딛고: 새로운 스케치이 문제는 단순히 과학적 진리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끝나지 않고 나의 학문 전체를 되돌아보게 했다. 들뢰즈가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철학과 과학은, 말 그대로 그가 철학의 ‘평면’과 ‘개념’을 통해 ‘사건’을 꾸려나가는 창조의 현장이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을 읽을 때면 종종,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예술 작품을 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잘 만들어진 이론과 규정된 형식을 ‘따라 그리는 재현’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자주 날 낙담하게 만들었다. 과학철학을 비롯해 어떤 분야의 철학을 공부하든, 정립된 사유의 맥락을 익히고 분석하며 답습하기에만 급급했다. 거인들의 사유에 묶여 있었다. 차라리 그 어깨에서 내리고 싶었다. 기존 철학자들의 사상을 연구하는 일은 학문적 토대를 다지는 중요한 역할이었지만, 정작 나의 사유는 시작하지 못한 채 그들의 구조에 갇힌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철학을 ‘하는’ 활동보다는, 이미 완성된 철학을 ‘공부’하는 데에만 집중했던 탓이다. “그래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활동이며, 이를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결국 내가 주어진 그림을 따라 그리기만 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들뢰즈의 철학은 뜻밖의 위안을 주었다. 그에게 철학은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생성’의 활동이다. 그가 바라본 철학사는 여러 사유들이 '지층적 순서'로 중첩되어 공존하는 웅장한 시간이었다(45). 그는 기존의 지층이나 개념적 유산을 완전히 버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학자의 진정한 과업은 그들이 쌓아 올린 이 탄탄한 지층을 딛고 일어서는 데 있다. 위대한 철학자들을 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그들의 말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창조하는 그 행위' 자체를 직접 체화하여 실천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28).이는 곧 과거를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미래의 지평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닐까? 내가 이 길에 들어섰을 때 품었던 꿈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리고 들뢰즈는, 다시 나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것이 그들의 지층에 겨우 흙 한 줌 뿌리는 일일지라도, 나는 철학 ‘하고’ 싶다. 들뢰즈의 철학은 작지만 무한한 나의 혼돈 속에서 하나의 스케치북으로 펼쳐졌다. 그 첫 장에는, “주어진 그림을 따라 그리지 말고, 너의 그림을 그려라” 라는 말만이 적혀있을 뿐이다. 이제 이 스케치북과 철학이라는 펜을 쥐고, 나만의 개념을 위한 첫 번째 선을 긋는다. 참고문헌 Deleuze, Gilles, and Félix Guattari. (1991) 1994. What Is Philosophy? Translated by Hugh Tomlinson and Graham Burchell.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Original French: Qu'est-ce que la philosophie?]-
2025.11.04
철학과
들뢰즈의 시선, 에 대한 답변
★ 들뢰즈랩 연구원, 경상국립대학교 강사, 박사수료 이주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놀람과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전공자인 저도 미처 정리하지 못해 조각으로만 떠돌아다니고 있는 『시네마』를 이리 잘 이해하고 계신 데다가 깔끔하게 정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베르그손의 철학에 대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는 『시네마』는 새로운 사유의 모험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정리해 주신 첫 번째 모험의 역량은 ‘눈으로 만질 것’, 두 번째는 ‘임의의(quelconque) 공간을 찾을 것’,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모험의 역량은 ‘환상을 용인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을 대신하여 이주희 선생님은 이 세 가지 제안이 들뢰즈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저도 선생님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회의론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 흄에 대한 들뢰즈의 해명이 담긴 『경험주의와 주체성』에서도 ‘세계에 대한 믿음’에 대한 들뢰즈의 주장이 나오는데, 그 부분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심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가 말하는 이 종교적인 무조건적 신앙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오해가 해소되었습니다. 들뢰즈는 “믿는다는 것, 그것은 자연의 한 부분을 주어지지 않은 다른 부분으로부터 추리하는 것이다.”(ES, 170)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단순히 이해하더라도, 들뢰즈는 어떤 초월에 대해서가 아니라 내재적 연결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주희 선생님이 제기하신 물음에 대해 제가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더라도, 들뢰즈로 연결된 저보다 더 들뢰즈에 대해 잘 알고 계신 분들이 저의 부족한 점을 메워 주실 것이라 믿으면서 조심스럽게 제 생각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이 제기하신 첫 질문은 “들뢰즈 시선에서는 ‘정주의 공간’은 확보되지 않는 것인지, 정말 끊임없이 움직이기만 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들뢰즈의 철학을 소개할 때, ‘유목주의(nomadism)’ 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유목민은 터를 잡고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정주민과는 다르게 이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배적 구조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배치와 관계 맺는 행위를 강조하는 들뢰즈의 사유는 정주민보다는 유목민에 맞닿아 있습니다. 제가 지난해, 몽골 여행을 갔다가 진짜로 유목민들이 이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요, 그들은 계속, 무작정 움직이면서 살지 않습니다. 양과 염소, 야크들과 자신들이 머물러 살 수 있는 마땅한 곳을 찾게 되면, 게르라는 집을 짓고 그곳에 잠시 머무르는 것이지요. 변화되는 자연의 조건을 지각하며 한동안 머물러 살다가 필요한 때가 되면 다시 다른 곳을 찾아 떠나는 것입니다. 이를 들뢰즈의 개념으로 말하면, 영토화와 탈영토화라고 할 수 있는데, 탈영토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토화’ 가 필요한 것처럼 들뢰즈에게는 ‘탈영토화’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 들뢰즈는 정지에서 운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에서 정지를 설명하는 철학적 평면 위에 있습니다. 생명 또는 시간은 운동 그 자체입니다. 오히려 정지가 이상한 사태이지요. 유목민은 정주민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들뢰즈에게서 사물에 대한 응답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사물의 사물화 능력 즉, 사물이 사물로서 드러나는 능력을 인정한다고 설명하셨는데, 이 부분은 들뢰즈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존재의 일의성 안에서 인간도 사물도 모두 존재의 아우성으로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사물에 대한 인간의 보살핌을 강조하신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선생님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보살핌은 지배나 관리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응답, 보존, 허용을 의미한다고 덧붙이셨는데 그럼에도 그 관계는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스럽습니다. 하이데거는 사물을 세계와 인간(현존재) 사이의 존재적 관계로 설명하면서 그 중심에 사물을 놓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들뢰즈가 사물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들뢰즈는 에 대해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동물-되기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표준과 상수에 관련되는 ‘다수’는 되기가 될 수 없습니다. 들뢰즈의 는 고정된 정체성을 벗어나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대한 개념입니다. 상수를 빼는 것이 입니다. 모험의 역량으로 제시하신 ‘눈으로 만지기’나 ‘임의의 공간을 찾을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감각 능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시각을 빼야 눈으로 만지기가 가능해집니다. 그때 사물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새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하이데거는 사물의 존재 방식을 사유했다면, 들뢰즈는 사물과의 감응과 배치, 즉 을 사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은 ‘들뢰즈의 사유가 자유분방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외롭고 고독해’ 보인다는 소회와 함께 “들뢰즈에게 ‘우리의 세계’에 대한 믿음은 가능”한지, 다시 말해 “이 시대에 어떠한 윤리적 실천을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우선, 그의 사유가 자유분방하다는 것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외롭고 고독해 보인다는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주류철학에서 벗어나 있기에 외로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체보다는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이들과의 집합적인 이행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는 평가와 더불어 해석되는 외로움과 고독함의 느낌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만, 우선 논평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들뢰즈는 라는 개념이 ‘파시즘’과 연결되는 위험성을 함의하고 있기에 피하고 있습니다. ‘차이의 철학자’라 불리는 들뢰즈에게 ‘타자’는 하이데거 못지않게 중요한 개념입니다. 또한 들뢰즈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의 은 ‘동일한 자들끼리의 결속’이라며, 이러한 우정이 차이를 배제하고, 동일성에 기반한 공동체를 강화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렇다면 들뢰즈에게 어떻게 ‘우리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 가능한지 묻지 않을 수 없겠군요. 그가 말하는 ‘우리’는 대체 누구일까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는 타자를 배제하는 우리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우리’라는 점입니다. 이제 선생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해 응답할 시간입니다. 이 세대에 어떠한 윤리적 실천을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저는 『시네마』를 통해 들뢰즈가 심혈을 기울이며 설명하였던 사유의 모험>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문제가 매 순간 다르듯이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하나의 정해진 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상대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 스피노자의 말대로 코나투스를 끌어올리는 방향의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답을 찾아가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는 문제임에도 문제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삶의 유용성에 함몰되어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유용성에 따른 지각이 우리를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 간파한 들뢰즈는 그걸 해결하기 위해 카메라의 눈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입니다. 문제임을 알아챈다는 것부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는 스스로, 새롭게 사유하는 힘이 꼭 필요합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이주희 선생님이 들뢰즈의 철학 속에서 고독함을 느끼셨다면, 그 부분은 격하게 공감합니다. 들뢰즈가 기다리는 ‘도래할 민중’은 바로 이렇게 사유하는 힘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이고, 그들이 함께 변화시킬 세상에 대한 믿음은 저를 설레게 합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좋은 자극을 주신 이주희 선생님께 존경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202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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