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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
대문이미지 출처 ; https://www.lifegood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722[국제뉴스] 2024년 보고서에서 선정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20개 도시 입력 2024.06.29 12:58언젠가 빈에 대해서 한번 써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지 7년이 됐다그때 빈은 이미 3년 연속 1위였는데, 글을 쓰려고 검색해보니 작년에도 역시 빈은 1위를 했다고 한다 빈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은 것일까?빈의 신호등, 도시의 유머- 이미지출처 @atelier_wien2박 3일의 일정으로 빈에 도착했을 때 사실 공항만해도 별 인상이 없었다 그런데 도심으로 들어가 지하철을 타면서, 또 버스로 갈아타고 내려 걸으면서, 나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 도시가 이미 라고 벌써 확신하게 되었다 아래 사진은 빈의 지하철 개찰구이다 이 개찰구는 탑승객이 어떤 통로를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는 한지만 출입을 가로막은 봉이라든지 자동문같은 장애물이 없다 그런데 다른 많은 역에는 이 정도의 개찰구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의 다른 지하철 역에는 지하철 표를 개찰하는 기계가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찾아야할 정도로 작고 조용하게 벽면이나 구석에 자리잡고 있으며, "여기서부터는 표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표시하는 듯한 게이트도 없다 즉, 빈의 지하철은 작은 아이를 안거나 손잡고 데리고 다녀야하는 사람들, 짐이 많은 사람들, 휠체어를 타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 모두의 이동에 거슬리는 것이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사람들이 과연 모두 자기가 산 표를 개찰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들의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다 아마도 정기권 같은 것들을 가지고 다니겠지?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시스템이야 우리나라도 잘 되어 있다갈아타야할 버스가 도착했고, 버스 안에서도 나는 우리나라에서의 습관대로 환승을 증명하기 위해 지하철표를 다시 찍을 요량으로 개찰기계를 찾았다그러나 버스에는 그런 기계 자체가 없었다그냥 타면 된단다 표를 소지하고 있기만 하면 된단다멀리서 롤러보드를 타던 젊은이가 버스까지 쏜살같이 와서 문앞에서 보드를 정리하고 올라탄다그 쿨한 모습이라니... 탑승객이 장애인이면 버스의 탑승구가 탑승객쪽으로 기운다 모두 아무 스트레스가 없어보인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간 곳은 빈의 내부에서는 이미 공연이 한창인 것 같았다아래 사진에서처럼, 오페라하우스 벽에는 대형 스크린이 있었는데, 그 화면으로는 공연중인 오페라가 중계중이었다그 앞으로는 지나가던 사람들, 혹은 그 공연을 보려고 일부러 온 사람들, 특히 아직 오페라공연티켓을 사기에는 부담스러운 젊은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보드를 타고 와 앉아 공연을 감상하고 있었다 천국이 이런 모습일까?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겼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를 발표하는 EIU(Economist Intelligence Unit)는 매년 Global Liveability Index 를 발표하는데, 이 지수는 안정성, 의료, 문화, 환경, 교육, 인프라 등 여러 범주로 분류된 30개 지표로 측정되며, EIU는 173개 도시를 조사한 후 100점 척도로 순위를 매긴다고 한다 EIU 디렉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올해 비엔나는 5개 부문 중 4개 부문에서 다시 한번 만점(100점)을 얻었다. 하지만 문화와 환경 부문의 점수는 주요 스포츠 행사 부족으로 인해 덜 완벽한 93.5점을 기록했다."이 지표들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 평가가 적합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도시를 걸으면서 내가 느꼈던 저 짧은 경험으로도, 나는 이라는 도시가 시민을 신뢰하고, 가난하거나 약한 자를 배려하고 있으며, 부의 차이로 인해 취약한 사람들이 지나친 상실감과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리하는 도시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저 도시에 산다면, 그 때 느낄 수 있을 도시의 배려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 나는 우리나라도 이제 세계에서 가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살기 좋은 도시를 꿈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빠르게 성장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마 이런 것도 이제 가능한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시민들이 도시 안에서 편안하게 숨쉴 수 있고, 아직 취약한 계층이라 하더라도 안정감을 느끼며, 지위가 높든 낮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도시 안에서 배려받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결혼을 꿈꾸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을 꿈꾸고, 자살률이라는 것은 저점을 찍는, 그런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 20개 도시는 다음과 같다 1. 오스트리아, 비엔나2. 덴마크, 코펜하겐3. 스위스, 취리히4. 호주, 멜버른5. 캐나다, 캘거리(제네바와 동점)5. 스위스, 제네바(동점)7. 호주, 시드니(밴쿠버와 공동)7. 캐나다, 밴쿠버(동점)9. 일본, 오사카(오클랜드와 동률)9. 뉴질랜드, 오클랜드(동점)11. 호주, 애들레이드12. 캐나다, 토론토13. 핀란드, 헬싱키14. 일본, 도쿄15. 호주, 퍼스16. 호주, 브리즈번17. 독일, 프랑크푸르트(룩셈부르크와 공동)17.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동점)19. 네덜란드, 암스테르담20. 뉴질랜드, 웰링턴※자세한 내용은 맨 위에 첨부한 기사 참조
2025.06.10
철학과
평등이 불공정하다고?
대문이미지 : 아래 그림으로 제공된 책의 원저 표지 근래에 아주 듣기 불편한 말들이 돌아다녀서 새삼 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그 말들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어디 근본도 없는 것들이..."라든지, "어디서 굴러먹던 XX냐 ..."라든지 하는 것들이다근본을 따지는 이 말은 굳이 규정하자면 혈통을 따지는 것인데, 조선시대 말기에 가면 족보를 사는 행위 뿐 아니라 족보 제작 비용을 공동으로 부담하여 가상의 선조를 만들어 족보를 제작하는 방식으로도 양반이 된 사람들이 많아 양반 비율이 절반을 훌쩍 넘겨버렸고, 심지어 현재 대한민국은 국가의 모든 권리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인데 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한창 궁금한 것이 많았을때 나는 '인류는 언제부터 불평등해졌을까'를 고민하다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책을 읽게된 적이 있다흔히 '자연으로 돌아가라'와 같은 간단한 문구로 유명한 루소이니만큼, 그에게 인간의 불평등은 자연상태에서는 없었고 이라는 제도가 도입된 후에 발생한 것으로 진단하고 있었다이러한 진단을 보면 아마 많은 현대인들이 불평등을 문제로 여기고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명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은연중에 사유재산을 문제삼는 공산주의적 시도가 아닌가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이 불평등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시정하려는 시도, 상속세나 법인세나 투자세 등 세금으로 부를 재분배하려는 시도들을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적 시도로 비판하며 심지어 "평등은 불공정하다 Equal is unfair"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 것 같다 야론 브룩, 돈 왓킨스 저, 『평등은 불공정하다』 표지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이 책의 중요한 취지는 "공정은 평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업적이나 결과에 따라 공평하게 대우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혹시 그 유명한 능력주의meritocracy를 말하는 것인가? 저자들은 매우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것 같지만, 많은 사실과 가치들을 왜곡하고 개념을 단순화하여 합리적인 외양을 띠고 있을 뿐이다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맞다각자 가지고 태어난 능력도 다르고 그 능력으로 생산해내는 양도 질도 다르다 그런데 사회마다 어떤 능력과 어떤 생산에 더 많은 보상을 하는가 하는 문제는 능력과 관련하여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각 사회와 시기마다 문화나 가치에 따라 다르다, 즉 상대적이다 단적인 예가 의사 아닌가?조선시대에 의사는 기술자, 중인에 불과했고, 임금이 죽으면 어의는 목숨이 온전치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매우 높이 평가받고 존경받으며 큰 돈으로 보상받지 않는가?즉, 보상의 크기가 사회별로 각 능력에 대해 다른데, 이는 보상이 그의 능력만 측정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어떤 능력에 대한 보상이 다른 능력에 대한 보상보다 훨씬 더 크고 또 집중되고,다른 능력은 하찮게 여겨지는 바람에 보상이 작고 심지어 생존에 문제를 일으킬 정도라면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부를 재분배하여 서로 같이 잘 살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의 능력도 시대에 따라 재분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 주체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사회를 전체적으로 보자면 나는 언젠가는 돕는 사람이 되고 언젠가는 도움을 받는 사람도 되는 것인데, 이러한 분배를 불공정이라고 주장하면 정말 곤란하다 능력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조로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개념이 있다 사유를 깊이하지 않고, 그 사유의 결과가 이기적인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주장되지 않은 것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 주장이 언제나 새롭고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그 생각은 가볍고 짧고 피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류가 지금까지 차마 그러한 주장*을 소리높여 하지 않은 것이다 [*평등이 불공정하다는 주장]20세기 말 지니계수는 0.67인데, 이 말은 세계 인구 중에 하위 2/3에게 소득이 없고, 상위 1/3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라 한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사회 전체의 부를 일부 이동시키는 분배가 불공정하다는 것인가?그의 모든 것을 빼앗는 것도 아닌데? 평등의 가치는 서로 다른 개인들을 획일화하거나, 모두에게 같은 생활비를 분배하는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쉬운 말로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우리나라에도 있어왔던 가치이고, 심지어 능력주의의 창시국인 미국의 독립선언서에도 있는 가치이다 "All men are created equal" 독립선언서의 명문장이다
2025.05.16
철학과
민주주의라는 연극
대문이미지 출처 :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10050627621최근 모 기자의 말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그의 말을 제목으로 달았다"사람은 살다보면 연기를 해야할 때가 있다. 우리는 지난 77년 동안 민주주의라는 연극을 해왔으며지금 실연되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 1조 1항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하는 것이고,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부연하고 있다그런데 실제로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 권력이 특권층에게 있으며, 그 특권층이 원하는대로 해주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투표하는 것 같다이러한 투표조차 어쨌든 본인의 의지이니 민주주의에 반한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그는 이익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특권층에게 위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그의 투표가 그러한 계산에 의한 것도 아니라면, 그는 민주주의라는 연극에 참여하여 그 드라마를 망치는 가짜 민주주의자 연기를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드라마를 감동적으로 만들어가려면, 그 드라마에 임하는 연기자가 진심을 다해야하고,내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누구인지 이해해야한다민주주의라는 연극에 출연하는 자는 자신의 권력을 누구에게 위임해야하는지 생각해야하고,내가 위임한 권리를 실행하는 자들이 내 뜻에 맞게 실행하는지, 아니면 그 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하는지,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을 위해 오용하는지 감시해야한다 그 이해가 있는 자만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자 연기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무대는 민주주의이지만, 그 무대위의 모든 출연자가 진짜 민주주의자는 아닌 것이다 이미지출처https://kor.pngtree.com/freepng/illustration-of-school-or-children-s-theater-production_8353168.html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그 특권층조차 민주주의의 무대위에서 연기를 해야한다는 것이다그들이 권력을 오남용하려고해도, 그리고 거기에 많은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다고해도, 민주주의라는 거추장스러운 장치 속에서 행사해야한다우리나라의 일제 감정도, 민주주의도 갑작스러웠기 때문에,어떤 의미에서 특권층에게는 아직 한번도 실제로 그들의 세계가 무너진 적이 없고, 민중들과 대타협에 이른 적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무대는 민주주의라는 것, 그들이 민주주의자를 가장해야한다는 것은 무척 다행이다투표한 내가 진짜 이 나라의 주인이고, 모든 권력이 우리로부터 나오기 때문에아무리 높은 사람도 우리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확신은 어쩌면 아직 수십년, 혹은 수백년 더 기다려야 올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이처럼 어쨌든 민주주의라는 과정 중에 있음에 감사한다
2025.05.07
철학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 소년범에 부치는 글
대문이미지 : 넷플릭스 의 한 장면 이 세상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또 그만큼 잊어버린 유명한 경구들이 많은데,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그 중 하나이다 이는 간음하다 단죄당하게 된 여인을 보고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음 8:7) 고 말씀하신 예수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지만, 정확히 이 말을 한 것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한다 그의 라틴어 문구는 다음과 같고 : Cum dilectione hominum et odio vitiorum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 Hate the sin, love the sinner 이런 말을 들으면 보통 사람들은 이 말이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고, 혹은 종교가 요구하는 선함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 경구는 종교적이고 윤리적이기 이전에 존재론적이기도하고 또한 법적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someone 이 한 명 있다고 하자 그 혹은 그녀S/He는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외모만 보더라도 정말 많은 변화를 겪는다 그의 수십년전 사진을 보면, 그 귀엽고 어렸던 모습이 정말 그의 것이었는지 믿을 수 없을 때도 있고,그 어린 얼굴이 자잘하게 주름진 얼굴에 여전히 어려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가 그 어린아이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즉, 그는 평생 같은 사람이지만 끊임없이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열린 존재이고, 죄를 짓기도하지만 참회도 할 수 있는 존재이며, 자기의 죄를 끝끝내 인정하지 않은 채 말라비틀어지면서 소멸해갈 수도 있는 존재이다 이는 그가 존재론적으로 하나이지만 다수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래서 법적으로 우리는 그의 행위action를 단죄하지 그 인물person 자체를 단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그렇게 특별히 종교적이지도 특별히 엄격하게 윤리적이지도 않은,그저 존재를 이해한다면 해야 할 말 정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깊고 커다란 상처의 정념에 빠진 상태에서는 죄와 죄인을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도 역시 나처럼 파괴되기를 바라며, 어떤 경우에는 [이를테면 복수] 바라는대로 그를 파괴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 그렇게 하고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거나 그를 파괴시키면서 도리어 내가 더욱 피폐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믈론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복수라는 테마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그렇다면 이러한 파괴와 상처 앞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우리는 질 들뢰즈에게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대답들에 대한 의외의 말을 듣게 된다그는 "법은 텅빈 개념이요, 법률들은 영합적인 개념일 뿐, ... 중요한 것은 판례[이며] ...[이는] 판사들에게 맡겨두어서는 안될 것[으로서]... 사용자 집단...우리는 바로 거기에서 권리로부터정치로 이행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대담, 307쪽, 아래 이미지 참조) 나는 "법은 텅빈 개념이고, 법률은 영합적인 개념"이라는 테제를 『들뢰즈의 정치사회철학』 에 첨부한 한 에세이에서 다룬 바 있다라는 영화의 주인공, 2017년 1월에 18세의 나이로 저수지에 몸을 던진 한 직업계 고등학교 학생의 이야기이다그녀는 고3 학생신분으로 LG유플러스 하청 콜센터에 현장실습을 나갔고 해지방어부서에서 일하다가 이같은 일을 당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겪으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관련법령을 만들거나 개정하기를 촉구한다 어떤 경우에는 수년, 수십년의 요구에도 아무 변화가 없기도하고, 새로운 법령이 생기거나 개정되기도 한다 ['직업계고 현장실습생 보호를 위한 직업교육훈련 촉진법' 개정안]그러나 법은 상식의 최소한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최소한이며, 어떤 경우에는 그 법에 진정한 문제는 하나도 담기지 않는다 진정 문제가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취업률에 따라 학교에 대한 지원금을 차등지원하는 교육청, 진짜건 가짜건 가시적인 취업률이라는 숫자 늘이기에 집중한 학교, 비숙련 학생들을 고용한 기업의 입장,(임금과 대우가 낮고 관리가 허술할 수밖에 없다...)뭐라도 해서 돈벌이를 하기를 바라는 가족 혹은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 취업이 어려워진 메커니즘과 이에 대처하는 국가의 자세, (가짜라도 쥐어짜는 방식, 인센티브 경쟁 방식)모두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무기력, 이 모든 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이 모든 과정은 서로 얽히고 설켜 항상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삐져나오는 그 부분만 단죄하면 무슨 소용인가 그러므로 상처받은 나를 회복시키는 것은 단죄가 아니다단죄는 물론 해야한다그러나 강력한, 더욱 강력한 단죄는 해결책이 아니다게다가 소년범이라면 이야기는 한 번 더 달라진다그들은 가능성들이다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사회가 선고하는 벌을 받기 이전에 이미 벌을 받고 있는 중이다이미 벌받고 있는 그 소년의 변화가능성, 참회가능성, 깨달을 가능성을 보호하는 것은 그 죄인을 편들어주는 것이 아니며,바로 우리, 그리고 사회가 최소한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호하는 것이다
2025.04.21
철학과
뉴스에서 읽어내야하는 것들
대문이미지 : kbs 뉴스 이미지에서 캡쳐아래 내용은 특정 언론사와는 상관이 없고, 우리가 살면서 무심코 부딪치는 모든 형태의 뉴스에 대한 것임을 밝혀둔다 대통령 탄핵 선고일이 4월 4일로 공지된 지난 화요일(4월 1일) 이후의 뉴스를 보면서나는 12월 3일 이후의 보도에 대한 감상문을 쓴 이래[Everyday Philosophy- '한국언론의 지형학' ]다시 한번 크게 놀랐다 다음에 첨부된 쇼츠는 내가 느낀 것과 비슷한 것을 느낀 조갑제 기자의 영상이다 https://youtube.com/shorts/lOPa1P1xhu0?si=mRlJhV4W_vXUtVfr이 영상 역시 4월 1일 선고일 지정 이후의 보도를 보고 난 후 제작된 것이다 4월 1일에서 4월 3일까지의 보도가 왜 문제가 되는지 짚어보자 우선비상계엄 포고령 1호는, 대통령 본인 외 모든 기관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며만약 이를 어길시 영장없이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더이상 민주공화국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모든 학자들이 양심과 진실에 따라 학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또 더우기 언론사는 독재정권의 안내방송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를 드라마의 한 장면을 빌어 말해보겠다넷플릭스 SF 시리즈물인 는 1960년대 중국의 문화대혁명시절로부터 시작한다 그 첫 장면에서 당시 물리학교수였던 주인공의 아버지는 수업시간에 블랙홀을 강의하고 또 연구한 혐의로 체포되어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추궁받다가 학생들에게 맞아 죽는다 블랙홀과 공산주의에 대한 반동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블랙홀은 시지각적으로 관찰할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관념적인 생각을 하도록 이끈다는 이유다그 연결이 궤변적이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다즉, 어떤 학문도 정치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그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우든 극좌든, 파시즘은 언론부터 장악하므로 언론이 처할 상황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선고기일이 잡힌 이후의 뉴스들은 정말 이상했다비단 위의 동영상 속에서 말하듯이 헌법학자들을 탄핵인용 입장, 기각 입장으로 나누어 반반씩 보도하는 정도를 넘어서, 탄핵을 반대하는 소위 극렬지지자들이 선고일에 어떤 계획[혹시나 폭동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를 그 유튜브를 검색하여 보도하는가 하면, 만약 탄핵이 기각되어 대통령이 돌아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디테일하게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조갑제씨가 언급한 정도의, 의 문제가 아니다 언론의 이러한 보도내용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언론은 이번 사건의 의미를 아직 모른다 둘째, 언론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나 여론, 정당들의 요구 등에 의해 기계적인 중립 혹은 중간을 방송의 본질로 삼고 있다셋째, 사회가 민주적이든 반민주적이든 상관없이 적응하여 계속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존재이유이다 또는 넷째, 어떤 언론은 권위주의적 기득권을 위한 사회가 되기를 오히려 바라고 있다 어떤 이유가 진정한 이유인지 모르지만 겉으로 보이는 보도 양태로부터 시민은 다음과 같이 느낄 수 있다 혹시 기자들은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인가?그들은 그런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것에 깊은 공포를 느끼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권의 안내방송을 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위와 같은 이유들이 아니라면, 뉴스는 자기가 발딛고 있는 가치(이를테면 언론의 자유)를 견고하게 지키고, 이를 위협하는 정치를 가차없이 평가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손해나 위협을 감수하고, 뉴스를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사태의 위중함과 사명감을 알려야한다 우리는 그들의 불안과 공포를 체험하고자 뉴스를 시청하는 것이 아니다 언론은 사회의 폭력성과 이기주의, 잔인함등을 보도함에 있어서 시민들에게 그것을 알리는 이유를 본인 스스로 인지하고 있어야한다 "왜 이것을 보도하는가?"라는 질문 없이 사실을 보도한다는 것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 행위자, 의식적 자각이 없는 행위자, 자극받으면 즉각 수축하는 단세포생물의 행위와 다를바가 없다 시민들을 기만하거나 공포에 빠뜨려 선동 혹은 호도할 의지가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과 같은 보도의 양태는 진정으로 스스로 뒤돌아보아야한다또한, 에서 언급했다시피, 언론이 우리 사회의 자의식이라면, 언론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우리 모습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에도 깊이 잠겨볼 필요가 있다
2025.04.07
철학과
국민은 개 돼지?
대문이미지 - 알랭 바디우(1937~) '국민은 개돼지'라는 문구는 참 모욕적이면서도 자괴감을 들게 하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수십년동안 잊어버릴 때쯤 되면 다시 소환되기를 반복하는, 그런 불편한 표현이다 이 문구를 제목으로 글을 쓴다는 것도 참 불편하고, 어렵고, 힘들다 그래서 나는 이 문구에 그래도 점차 접근해볼 수 있도록 해주는 고마운 바디우의 아래 문장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아래는 그의 Ethique 의 한 구절이다 (영어판 11쪽, 서지사항은 맨 아래) -우리나라에서 [윤리학]으로 번역되었으나 지금은 절판됨두번째 줄부터 대충 번역하자면 '만약 지하감옥과 포로수용소의 고문하는 자들과 관료들이 그들의 희생양들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갈 운명에 처한 동물들처럼 다룬다면, ... 그것은 그 희생양들이 사실상 그런 동물들이 되었기 때문이다."이를 우리가 다루려는 문구로 바꾸어 다시 쓴다면 '만약 관료들과 정치인들과 권력자들이 국민들을 개 돼지라 부르고 개 돼지 취급한다면, ...그것은 국민들이 사실상 개 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이런 말이 되겠다 물론 바디우는 포로들이나 희생자들을 비아냥거리기 위해서 저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위의 문장은 파격적이고, 또한 일면 매우 중대한 진실을 전달하기 때문에 새롭고 충격적이다바디우가 하려고 한 말은 우리가 개 돼지 취급당하면서 만약 이 고통이 멈추기만을 바라고 죽고싶지 않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하여 그들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고통을 주지 않기를 애원한다면, 그것은 사실 동물이라면 모두 원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다른 동물로부터 인간을 변별해주는 특징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인류는 아주 오래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특별하고 우월하며 특히 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인간도 역시 동물이 맞고, 동물인 한 인간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고 죽고싶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하지만 모든 동물이 원하는 것, 모든 동물이 피하는 것을 똑같이 원하고 또 피하기를 바라는 와중에는 아직 이라는 형상이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음이나 고통의 위협에 처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여전히 그 고통을 피하고 싶더라도 그들에게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으면서 지키려고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때,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 나의 손해나 고통을 감수하려고 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무엇인가[진리]가 도래하고,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하게 되며,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 때 생산된 진리는 불사immortal다 이것은 고전적 진리의 영원불변을 대체하는 것이다만약 정치인과 권력자와 관료가 국민은 개돼지라고 말한다면, 그들에게 개돼지였던 누군가, 혹은 어떤 집단이, 아니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먹이를 던져주기만 하면 되는 그런 동물이기를 멈추자스스로 자신의 삶을 일구고 자신이 일군 삶의 모습을 만끽하되, 노력해서 벌 수 있는 만큼의 돈 이상을 욕망하지 말자자신은 눈꼽만큼의 손해도 감수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살지 말자 권력자와 관료와 정치인들에게 밥을 먹을 권리를 주장할지언정 공짜밥을 구걸하지 말자 크고 작은 돈의 달콤함에 유혹당하고 크고 작은 위협에 주눅들고 굴복하지 말자 그렇게 되는 한 우리는 개 돼지라 불려도 할 말이 없다 그들이 우리의 명령으로, 우리의 의지를 양도받아 그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하고 그들에게 명령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는 주인이며,우리가 주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때서야 개 돼지 취급을 받지 말아야할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 이 글의 제목과 내용에서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며,동물이 인간보다 낫다고도 생각하는 많은 분들이 다시 한번 마음 아팠을 수 있을 것 같아 송구합니다한 장 정도의 글에 모든 것을 다루기가 어려워 어떤 단면만을 쓴 것이니 양해해주시고, 악한 것은 오로지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몇 주 안에 2편을 올리려고 하니 기다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영어본 내지
2025.03.26
철학과
말들의 지형학 2 - 프로이트의 환자 이야기
다이아그램 작성 - 신지영 말들의 지형학 1에서 다룬 환자의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 예전과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었지만, 아버지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실제로 이미 죽었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이 말을 아래와 같이 분석해보자 ① 그 사실>을 만약 앞선 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 예전과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로 이해한다면 이 말은 "그는 실제로 이미 죽었어요”라는 절과 결코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한다. 아버지는 그 사실[아버지가 다시 살아나 예전과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는 실제로 이미 죽었어요.(어색함)② 그 사실>을 이미 앞서 말한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 예전과 다름없이 대화를 나눈 사실>이 아니라,이 문장 바깥에 있는 환자가 말하지 않은 미지의 무엇이라고 가정하면, 환자의 말은 어느정도 자연스럽다.아버지는 그 사실>도 모른 채, 그는 실제로 이미 죽었어요.③ 그러나 그 사실>이 환자의 말 바깥에 있는 미지의 무엇이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어색한 부분이 있다. 아버지는 그것도 모른 채 죽었는데, 여기에 왜 실제로> 그리고 이미> 죽었다는 두 개의 부사가 있어야 했을까? 만약 이 말이 조금 더 자연스러워지려면 다음과 같이 가정해야 한다. ③-1. 아버지는 가능성으로서의 그 사실>도 모른 채, 그는 실제로> 이미 죽었어요그런데 실제로> 벌어진 일은 아버지의 죽음이므로, 가능했던 것> 역시 아버지의 죽음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사실>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죽을 가능성과 관련된 어떤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부사가 바로 이미>이다. ③-2. 아버지는 가능성으로서의 아버지의 죽음>도 모른 채, 실제로> 게다가 이미> 죽어버렸어요. “이미 죽어버렸다”는 말에서 부사 이미>는 안타까움, 후회, 낙담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추측할 수 있는 진실은 어떤 한 곳으로 모인다;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바랬고[죽음의 가능성] 아버지는 그 사실[내가 아버지의 죽음을 바랬다는 사실]을 모른채 아들의 바램대로 실제로[가능성이 현실화됨] 이미[후회, 죄책감] 돌이킬 수 없이 죽어버렸으며 그로 인해 아들은 너무 고통스럽다. 환자에 의해 발화된 것l’énoncé에서 감추어져 있었던 것은 그 사실>이라는 대명사, 실제로>, 이미>라는 부사에 의해 지시되고 있었다. 물론 이 대명사와 부사들이 환자의 발언을 프로이트처럼 해석하도록 한 것만은 아니리라. 프로이트는 그 환자를 여러차례 대면하고, 이 발언 외에도 많은 다른 발언들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하나의 문장에 대해서, 하나의 발화체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의 직선을 따라 이어지는 단선적이고 연속적이며 또한 일방향의 것이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싶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이미지를 통해 하나의 발화체를 이해해보자.그림 1우리는 말이란 한 번에 하나씩, 하나 다음에 다른 하나, 그리고 마침표를 향하여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 환자의 발언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림 1>은 내면을 형상화해 본 것인데, 외부와 맞닥뜨리는 바깥쪽 원을 따라 흐르는 말들은 나에게 무해하고 사회적으로 안전하게 배열되기 마련이다. 문제적이지 않은 상황에서의 단순한 발언은 바깥 원을 따라 단선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말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말은 그렇게 단순한 회로를 따라 배열되지 않는다. 동심원처럼 배열된 이 원환들을 가로질러 그려진 선들[이 선들이 그림에서 아주 얇게 보입니다]이 같은 시간대라고 가정하면 목소리를 통해 발화된 하나의 단어 뒤에는 수많은 원환을 떠도는 같은 시간대의 다른 단어들이 한꺼번에 울린다. 어떤 경우에는 더 깊은 원환의 다른 단어들이 말의 흐름을 가로막거나 방해하기도 하고, 이미>나 실제로>처럼 가장 바깥의 원환에 배열된 말들의 흐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불쑥 노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환자는 여러 원주에 동시에 흐르는 말들을 한꺼번에 동원하여 말하였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트릭을 쓴다.마치 그 사실>이 선형적으로 바로 직전의 말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말한다. 그는 그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고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죄를 고백했고 또 죄책감을 드러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비밀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더 결코 그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럴수록 그 비밀의 압력은 내면에서 더욱 더 커지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것이 그의 내면이 작동하는 방식인 것이다. 문제가 많고 심각할수록 그의 말은 많이 꼬인다. 동시에 여러 가지를 말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횡설수설로 밖에는 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기록한 사례들은 정신분석 내담자들의 사례들로서 다소간 심각한 경우들이 많지만, 사실 그는 우리 모두가 신경증자라고 보았으므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느끼지 않는 대개의 사람들에게도 말이란 단순한 것이 아니다. 평이한 일상생활, 병원에 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많은 이상한> 말들을 하기도하고 듣기도 한다. 이상하다>는 것은 이를테면 위 환자의 말에서 그 사실>이 뭔지 모르겠다는 느낌, 그 문장에 실제로>와 이미>는 왜 들어갔을까 하는 그런 느낌을 말하는 것인데,이상하다>는 느낌은 어쩌면 말들의 흐름 속에서 삐죽이 튀어나와있는 진실의 돌부리 같은 것이다. 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는 단서들은 우리를 그 내면의 진실로 인도하는 문과 같은 것이므로 틀린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다. 만약 이러한 이상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러한 습관이 우리의 일상이 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짓이겨 망가뜨리게 될 것이다. 망가진 인격과 망가진 사회는 그렇게해서 탄생한다.
2025.03.10
철학과
말들의 지형학 1 - 프로이트의 한 환자의 이야기
대문이미지 : 지그문트 프로이트 (1856~1939)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을 통제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을까? 우리는 자주 우리가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지를 묻곤 하는데, 사실 더 근본적으로 물어야할 것은 위와 같은 것 같다 나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는 왜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 프로이트가 분석한 한 사례와 더불어 이 문제를 이야기해보자 (『정신분석의 근본개념』 제 1장 정신적 기능의 두가지 원칙)오랫동안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던 자기 부친을 간호한 적이 있는 한남자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그는 부친 사망 후 여러 달 동안 계속 자기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 예전과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는 자기 아버지가 그 사실도 모른 채 실제로 이미 죽었다는 것에 지극히 고통스러워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일견 말도 안되는 듯 보이는 이 꿈을 이해하는 한가지 방법은 ... (프로이트, 21쪽) 프로이트의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기 전에 “일견 말도 안되는” 이 환자의 말을 곱씹어보자. 그는 사망한 아버지가 꿈에서 다시 살아나 예전과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꿈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가 그 사실>도 모른 채 실제로> 이미 죽었다는 것에 대해 지극히 고통스러워하였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대개 이런 말을 들으면 무슨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대개 그냥 넘어간다. 우리는 대체로 그가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아들었고, 사실 그것으로 사람들 사이의 대화는 충분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좀 더 가까운 사이인 경우, 좀 애매한 구석에 대해 물어볼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잃은 사람에게 되묻기도 뭐해서 그 역시 그냥 넘어가게 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먹고사느라 바빠서 다른 데 관심을 둘 형편이 못되며, 우리가 이처럼 많은 것들을 그냥 대충 넘겨버린다는 것에 대해서 대체로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우리가 바쁘지도 않고 나의 눈치 없는 질문 때문에 상대가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 확실하고 또한 우리가 먹고사느라 힘들지도 않다고 가정해보자그리고는 사망한 아버지에 대해 꿈을 꾼 저 환자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다제가 잘 못 알아들었는데요, 당신이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인가요?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사실인가요, 아니면 아버지가 자신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인가요? 아버지가 자신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 어떤 쓸쓸함을 주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질문은 이 환자가 진실을 완전히 숨겨버리도록 하고, 진실을 발견할 가능성을 멀리 내쫓아 버릴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어진 분석을 한번 들어보자. 프로이트는 이 말도 안되는 말을 다음과 같이 [ ] 내용을 삽입하여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그가(꿈꾸는 자가) 아버지의 죽음을 바랬다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자기(꿈꾸는 자)가 바랬듯이] or [그의 소망의 결과로] (자기 아버지가) 실제로 이미 죽었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하였다.”(21-22) 프로이트의 해석을 좀 더 알기 쉽게 펼쳐보면 다음과 같다. 환자의 말 : “아버지가 그 사실도 모른 채 실제로 이미 죽었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요.”프로이트의 해석 :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가 죽기를 바랬다는] 그 사실도 모른 채, [내가 바란 것처럼] 실제로 이미 죽었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요.” 슈레버 박사 (1842~1911) 그는 1893년 드레스덴 고등법원 판사회의 의장이 된 후 망상과 환청등 정신병이 발병했고 이를 책으로 남긴 인물 - 본 글의 사례와 직접 관련 없음 프로이트에 대한 흔한 비난 혹은 오해는 그가 모든 환자를 프로이트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환자가 무엇을 말하든 간에 무조건 그 사연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해석한다는 것이다.이 환자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 역시, 흔한 아버지 콤플렉스>에 해당한다.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경쟁심을 느끼며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부친살해] 아이가 자라면서 아버지를 동경하고 때로는 경쟁심을 느끼며 종종 아버지가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일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누구의 어떤 행동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구체적인 말에서 그러한 보편적인 흔적을 위와 같이 명백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프로이트가 거의 모든 환자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해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 환자와의 오랜 대화 그리고 오랜 경험 끝에 결론으로서 내린 해석이지 선제적 해석은 아니라는 것이다. ★들뢰즈와 안티-오이디푸스 입장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겠다★아마 프로이트는 많은 환자들을 경험하면서 그들에게서 이 보편적인 정신적 과정이 한 인간의 이상 징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어느 순간 발견했을 것이고, 그것을 가정하고 환자를 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의 환자의 말을 해석하는 경우에 있어서 그 해석을 다짜고짜 강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환자는 수많은 상담세션에서 이 말 이외에 많은 말을 이미 했고, 그 결과 꿈에 대한 환자의 말이 프로이트에게 그렇게 해석되어 들렸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이렇게 해석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망한 아버지와 꿈에서 대화한 환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 예전과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었지만, 아버지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실제로 이미 죽었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환자의 이 말은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요"만 들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는 대개 남들의 말을 그렇게 듣고 말아버린다 대충 뭉갠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그런데 이 문장에 "그 사실"이 들어가면서 이상해지고, 게다가 "실제로"라는 부사가 또 수수께끼다 이 이상하고 수수께끼같은 부분에 주목하고 이를 해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물론 많은 경우 그 부분을 놓치거나 흘려버릴지라도, 이와 같은 노력이 우리의 일상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대충 뭉개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환자의 말을 기묘하게 만드는 "그 사실"과 "실제로"라는 부사를 다음회에서 분석해보기로 하겠다
2025.03.04
철학과
악을 정의하는 한가지 방법 3
대문이미지 : 구에르치노Guercino(1591~1666), The woman taken in adultery, 1621년"죄 없는 자 그녀에게 돌을 던져라"시설보호청소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그 청소년들을 보면서 세상의 가장 작고 약하고 착한 아이들이 소년원에 시설에 보호되고 있구나 생각했다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다말을 더듬고 어눌한데다가 왜소하고 마른 한 아이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앉아있었는데 그는 친구를 좋아하고 또 좋아하기 때문에 친구를 저버릴 수 없었다고 했다그가 원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수줍게 좋게 웃었다 같이 앉아있었던 아이들도 그 아이와 함께 웃었지만 사실 이건 웃을 일이 아니라고도 말하고 그를 안쓰러워해주었다그들의 외양은 부족하고 어떤 나쁜 일에 휘말렸을지언정 그 마음은 아직 예뻤다 반면, 내가 스캇 펙의 분석에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아래와 같은 부분이었다바비의 부모와 같은 이들에게는 는 생각만 꽉 차있어서어떻게든 외형상의 도덕적 순결을 유지하고자 갖은 애를 쓴다스캇 펙은 그들이 사회적 규범이랄지 그런 것에 아주 민감하다고 썼는데, 사실 그들이 민감한 것은 사회적 규범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사회의 시선정도라고 말해야한다그들은 옷도 잘 입고, 출근 시간도 잘 지키고, 세금도 잘 내는 등 겉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사고가 터지면 - 이를테면 바비 형의 자살, 바비의 일탈, 그들은 그 사고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을 수도 있다는 성찰만은 결코 하지 않는다자신의 완벽한 자아상을 지켜야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을 그들 외부로 투사시키고, 그 책임을 남에게 묻는다 그들은 자신의 겉을, 말하자면 위기청소년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말을 더듬고 왜소하면 또래들에게 무시당하고 맞아도 된다는 잘못 형성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만은 결단코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스캇 펙이 바비의 부모와 면담할 때 그들이 보여준 태도, 의사가 특별히 그들을 비판하기도 전에, 그럴 마음이 없을 때에조차도, 그들은 혹시나 의사가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을까 전전긍긍하고 자기 자신을 변호하며 (우리는 성실하게 일하느라 바빠요)남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학교에서는 바비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어요)질문하는 사람을 의심하고 (도대체 무슨일을 꾸미고 있는 건가요?)엉뚱한 말을 꺼내고 (당신은 혹시 총기반대론자인가요?)오히려 질문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등 (우리는 당신처럼 배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 있을 수 있는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혼란스럽고, 대화를 해봐야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며, 아주 심각한 경우에 (바비의 부모를 만났을 때 스캇 펙이 그러했다고 하는데) 그들은 혐오스럽고 역겹다 그들의 말은 난해하고, 그들의 마음은 완고하고 경직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그 말을 성실하게 따라갈 필요가 없다아니 오히려 그렇게해서는 안된다왜냐하면 그들의 말에는 별다른 메시지도 없을 뿐 아니라, 그 말이라는 것은 자신의 책임없음을 강변하기 위해 순간순간 이어붙인 것이라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말을 오래 듣고 있으면 듣는 사람의 영혼조차 망가질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미지 저작권자 : Jean Marie Beyinda 누군가는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자신들이 잘못한 줄을 모른다면 그들은 아무말이나 할 것이다그들의 말이 혼란스러울지언정 아무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에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진실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이다그들은 진실만을 피해서 말의 성을 쌓으며자신의 거짓을 정당화하는 기제를 점차 발전시켜나간다그들의 외양은 그럴듯하겠지만 내면은 추악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진실을 외면하기 때문에 그 진실만을 피해서 쌓은 성과 같은 그의 내면은 사실은 텅 비어있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산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 텅빈 내면은 마치 블랙홀과 양자의 세계처럼 자신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와 혼란스러움으로 그들의 영혼을 잠식해갈 것이다마땅히 대면해야할 진실을 외면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그래서, 만약 직업이 의사이고 상담자라서 이런 사람들을 상담하고 치료해야한다면 그는 더럽고 추악한 자를 보듬을 수 있는 넓고 깊은 마음이 필요하다또한 그들을 집어삼키는 블랙홀 같은 내면이 상담자마저 집어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버틸 힘과 무게의 중심을 갖춰야한다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쉬이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하디 약한 인간은 바비의 부모와 같은 인간 앞에서 혼란에 빠지고 망가질 수 있다 글 말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는 않지만직업이 그들을 대면해야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알아챘을 때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낫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싶다면 혹시 그들이 변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그때는 진지하게 공부해야한다
2025.02.24
철학과
악을 정의하는 한가지 방법 2
일리야 레핀(1844-1930), , 1885 스캇 펙은 형을 잃은 바비에게 건강한 가정이라면 마땅히 해줬어야 하는 일을 열거한다"부모는 형의 자살에 대하여 바비와 함께 이야기했어야 한다그들은 바비에게 그들도 모르는 사이 형이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는 식의 설명을 해줬어야 한다 또한 형제간의 싸움이나 흔해빠진 말장난 같은 것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도이야기해줬어야만 했다형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부모인 자신들이며, 따라서 그의 죽음에 누군가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라는 이야기를 바비에게 들려줬어야만 했다그러나 ...바비는 단 한마디의 다독거림도 들어보지 못했다"(107) 중2병이라고 불리는 나이에 접어드는 자녀를 둔 부모는 대개 어리광부리고 귀엽던 자녀들이 왜 하루아침에 저렇게 달라지는지, 왜 부모에게 적대적이거나 무뚝뚝해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이 이를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몰라 당황하며 큰 고민에 빠지게 된다물론 큰 고민에 빠지게 되는 부모는 일단 좋은 부모가 될 가능성이 있다 자녀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든 나몰라라 하는 부모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이다 우리가 청소년기의 아이들에 대해 하는 가장 큰 착각은 그들이 우리들[부모들]과 동일한 생각과 행동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15세 정도의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 나이인 대략 40대 중후반의 어른과 다를 뿐 아니라 25세 정도의 성인들과도 매우 다르다"그들에게 부모는 하나님이다 그들은 자신의 부모를 다른 부모와 비교할 능력이 없다부모에게 나쁜 아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는 스스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고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재미있는 것은 부모의 사랑에 결손이 있으면 아이는 그 결함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죄책감으로 우울한 아이를 부모가 돌보지 않으면아이는 자신이 죄책감을 느껴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만약 이런 상태에 있는 아이에게 부모가 총을 주었다면? 그는 부모의 이 행동을 이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자, 형이 자살한 총이야. 이걸로 너도 똑같이 해야해. 너는 그래야 마땅한 놈이야"바비는 다행히 그 총으로 자신을 쏘지는 않았으나, 차를 훔치는 행위를 통해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려는 시도를 했다어떤 의미에서 바비는 살기 위해서 차를 훔쳤는지도 모른다"(스캇 펙, 107-109)상처입은 아이가 부모로부터 적절하고 좋은 설명/돌봄/다독임을 받지 못하는 경우그의 심리가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위와 같은 것이다 그들의 생각하는 힘은 아직 강하지 않고 그래서 넓고 깊게 뻗어나가지 못한다자기와 부모를 완전히 분리하지도 완전히 동일시하지도 않은 애매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부모의 잘못조차 자기의 잘못으로 둔갑시키고,책임지지 않는 부모의 잘못까지 짊어지기 일쑤가 된다너무 취약한 아이는 죽어버리거나 병리적인 상태에 이를 것이고,어느정도 버틸 힘이 있다면 그 생각의 메커니즘은 엄청나게 왜곡될 것이다부모의 잘못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의 세계 자체인 부모가 보여주는 무책임한 행동 외에 다른 행동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모습밖에는 닮을 모습이 없어서 그 스스로도 무책임한 행동을 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는 점차 불쌍하고 나약하고 무책임하고 사악한, 그런 어른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모든 아이가 다 그런 길로 접어드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만약 그 아이가 훌륭한 어른으로 컸다면, 그가 걸어갔어야했던 길이 얼마나 험한 가시밭길이었을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그가 얼마나 힘들게 삶의 모든 순간들을 건너 왔는지 말이다아이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거의 못한 상태에서 느끼고 결정하고 행동한다 - 스캇 펙, 109그렇다면 인간이 합리성을 골고루 분배받아 타고난다는 생각은 진정 허구가 아닌가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크고작은 사건 사고에 대면하여 그에 비해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게 가장 적절히 반응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주변의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과업인 것 같다그것이 바로 이성logos과 적절함adequacy을 획득하고 확장한다는 것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바비의 부모는 어떻게 그런 어른이 된 것일까? 큰 아들을 잃고, 작은 아들에게 총을 선물하는 부모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그들은 일리야 레핀의 그림에서 묘사된 이반 뇌제와 같은,아들을 잃은 회한 조차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다음주에 이어짐)
202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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