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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교육은 무엇이 문제인가요? [노무현재단 부울경 연구자 지원 사업 계획서]
새로운 교육을 발명하자 (가제)흔히 사교육이 문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사교육에 목을 매는가? 그것은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왜 꼭 좋은 대학에 가야만 할까? 취직할 때, 사회에 진입할 때, 출신 대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학들에는 위계가 있고, 언론도 교육부도 대학을 평가하여 순위를 매겨 공보한다. 기업도 관료조직도 사법 조직도 출신 대학을 중요하게 보고,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며,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끼리 서로를 밀어주고 이익을 공유한다. 무척 폐쇄적이다. 사회가 그렇다는 것을 모두 잘 알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 더욱이 요즘은 대다수 우수한 학생들이 일단 의대를 채우고 나서 나머지 학과를 지원한다. 직업으로는 의사가 최고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나라는 전쟁을 겪은 지 70여 년, 군부독재가 끝난 지 30여 년, 이제 군부독재로는 돌아가지 않겠지 하던 2024년에 비상계엄을 겪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안전하지 않음>은 은유가 아니라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학벌 우선, 사교육비 상승, 집값 상승, 치열한 경쟁은 바로 그 공포의 이면으로서, 죽음의 강도만큼이나 강렬하게 우리 사회를 옭아매고 있다. 그러니까 당연히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아 키울 엄두를 내기 어렵고, 인구는 줄어들고, 지역은 소멸 위험에 처하고, 서울은 미어터지고, 집값은 천정부지로 솟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현안은 이렇게 서로 물고 물리는 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국가는 죽음에의 공포와도 같은 국민의 불안을 잠재우고 경쟁을 완화하고 생존과 부의 축적 외의 다른 가치들을 제시하고 설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겪어왔던 국가는 표면상으로는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서 도리어 더 경쟁을 부추기고, 불안을 불러일으키며, 투기와 일확천금에의 욕망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는 엉뚱한 정책을 끊임없이 입안하고 쓸데없는 곳에 자금을 쏟아부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우리가 원하는 좋은 것과 실제로 좋은 현상을 낳을 수 있는 방법을 종합하고 통일하는 능력이 없는 분열증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인구에 대해 정말 고민한다면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인구는 증가해야하지만 경쟁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태; 사교육은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대학들을 순위에 따라 차등지원하는 상태; 지역 소멸을 극복하자고 하면서 지역 산단을 수도권으로 모두 회수해 가는 국면. 우리 혹은 우리 정부는 정말로 인구가 늘기를 바라는가? 정말 사교육의 문제가 심각해서 완화하고 싶은가? 진정으로 지역 소멸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정부가 말하는 고민은 정책에 전혀 담기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결국 우리가 그러한 고민을 천천히 진지하게 할 수 없도록 우리 자신을 교육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은 점수를 따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지, 현실을 대면하고 그것에 대해 깊이 고민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결국 다시 교육이 문제다. 모든 문제는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인 것이다. 이미 있는 지표에서 성과를 내는 무한 재현, 지표 자체를 검토하는 능력의 부재, 부분적인 해결만을 쫓으며 새로운 지표를 추가하는 임시방편은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서로 물고 물리고 있는 이 문제들의 상황을 진지하게 대면해야만 한다. 안전에 대한 강박적인 욕구는 현실에서 연유한다. 과학과 수학을 하는 사람들이 IMF라는 국가적인 위기에서 보호받지 못했고, 중소기업의 노동 여건은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대기업의 횡포와 같은 외풍에 안전하지 않았다. 심지어 공부를 못해서 좋은 대학에 못 갔거나 아예 대학에 가지 못했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위험하고 나쁜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되고, 때로는 몸이 상하고 죽지만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다. 사법부는 노동자, 의료과실 사망자, 대기업을 상대로 하는 고발인들보다는, 사주, 의사, 대기업, 권력자들에게 관대하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아직 100년이 안 되었지만, 그동안 사법부는 권력이 원하는 것을 처리해 주는 역할도 해왔다. 그래서 국민은 수학과 과학도 필요 없고 오로지 의대가 최고고, 권력자들끼리 서로 봐주는 사회이니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가 있어야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힌디. 그러니까, 작금의 우리 모습은 위험했던 기억때문에 오로지 ‘안전함’이라는 유용성을 확보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 상태인 것이다. 위의 두 그림은 철학자 베르그손이 기억과 사유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것들이다. 오른쪽 그림에서 P는 세계라는 평면이고 S는 생명체가 세계를 만나는 시공간적 지점이다. 원뿔 SAB는 기억을 형상화한 것으로 정신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S 주변으로 모여들어 수축되어 있는 기억들은 매우 일반화되고 사회화된 기억으로 세계에 대한 적응을 돕는 기억이고, AB로 이완되어 있는 지점의 기억들은 매우 개인적이고 그 생명체에 고유한 기억이라 본다. 사유는 S라는 첨점에서 세계로부터 받은 자극과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자기의 기억을 전체적으로 사용하여 종합하고 판단하는 것에서 성립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교육은 정신을 동원하는 이런 활동을 촉진하지 않고 오히려 억압한다. 오로지 첨점 S에 유용한 것만을 빠르게 많이 습득하고 외우는 것만이 장려된다. 그렇게 교육된 자의 정신은 빈곤하며, 사회인이 된다고 해서 갑자기 창의적인 사유를 해낼 수 없다. 왼쪽 그림은 대상 O를 지각하는 정신이 최초에는 대상 O를 AO라는 작은 원 정도로 파악하는 정신능력을 보이다가, 대상을 분석하고 그 분석된 요소들을 해석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으며 그래서 이 둘을 종합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 영역을 BO, CO, DO 등으로 확장해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우리나라는 매우 혹독한 시련에 처해 있었고, 가난에 진저리 쳤으며, 빠르게 발전하기를 바랐기에, 적응에 필요한 지식을 빠르게 많이 획득하여 1등으로 치고 나가는 것을 장려해 왔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다. 교육만이 문제라는 것은 아니지만, 교육은 아주 어리고 아주 예민한 나이로부터 시작하기에 정말 치명적이다. 교육이 우리로 하여금 첨점 S를 중심으로 적응하는데 급급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유도하는 한, 시민이, 정책입안자가, 청년과 노인이 경쟁을 완화하고 살만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싹틔울 수 없다. 이러한 사회문제에 모든 정부가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미리 준비하지 못했기에 지금 저출산, 연금 문제 등에 직면해 있고 논의만 무성하고 해결책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는 사회의 변혁이 사람들의 사유 능력에, 그것도 한 사람의 사유 능력이 아니라 다수 국민의 사유 능력에 달려있는데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전에의 절박한 갈구, 살아남은 자만이 안전한 세상은 무한경쟁과 효율적인 공부를 강요하고, 그런 시기를 성공적으로 뚫고 나온 엘리트는 현실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 괴물이 되며,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만든 괴물의 모습에 놀라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다. 우리의 연구는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은 교육의 자세한 국면들을 해명하고, 똑같은 재난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발명해야할 교육이 어떤 모습일지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025.06.24
철학과
동물에 대한 해러웨이와 들뢰즈의 생각은 다른가요?
대문이미지 - 동물이 무리지어 이동하는 모습, 출처 : 도나 해러웨이 (1944~)해러웨이는 아래의 이유로 들뢰즈의 동물 개념을 비판한다고 한다 1. 들뢰즈는 현실 동물에 무관심하다 그가 언급하는 동물은 철학적이고 정신분석적이며 문학적이다 2. 들뢰즈가 관심을 갖는 동물은 분자적이고 악마적인 것이며, 친근한 세속의 동물은 비난한다3. 들뢰즈는 오이디푸스와 자본에 대한 비판을 핑계로 여성과 늙음과 동물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다 결국, 들뢰즈는 동물과의 구체적인 관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야생과 길들임, 동물과 인간의 이원론을 전제한다Alain Beaulieu, ‘The State of Animality in Deleuze’s Thought’(Journal for Critical Studies, Vol. Ⅸ, 1/2, 2011), 80~81.위와 같은 주장들을 앞에 두고 이를 철학적으로 논박한다는 것은 매우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들뢰즈를 두고 해러웨이가 하는 말은, '내 시간은 내 거야'라는 주장을 하는 누군가가 아인슈타인에게 그의 시간은 현실적이지 않고, 너무 과학적이라고 비판하는 것과 같다 철학자가 철학을 하는데 그의 말이 너무 철학적인 것이 비판의 지점을 구성할 수가 있는가? 반대로 보면, 해러웨이는 내 곁을 지키는 세속의 동물, 개나 고양이로서, 그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옹호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는 그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 굳이 들뢰즈를 언급할 필요도, 비판할 필요도 없었다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철학을 한편으로는 너무 어려워 자기네들끼리만 알아듣게 말한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손쉽게 생각하여 아무나 철학한다고 말하기도 한다해러웨이의 이력을 살펴보니 그녀는 기본적으로 생물학자이다그녀는 프랑스에 가서도 생물학을 공부하고 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그의 글이 수필같기도하고 문학같기도 하다고해서 그가 갑자기 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은 매우 다른 전제와 언어를 가지고 있는데,서양철학은 개념을 만들어내고, 개념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분야로서 생물학만큼이나 자신만의 도구가 있는 전문분야다과학자가 에세이를 쓴다고 갑자기 과학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의 동물은 와 함께 언급되며, 그의 는 여성, 동물, 소수자 등과 함께 쓰이고 (여성-되기, 동물-되기, 소수자-되기), 다수자-되기는 없다이때 동물은 소수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소수적이라는 것은 지배적-주류적-전체주의적이지 않은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개념어 암중모색]에서 소수자-되기 항목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2025.05.23
철학과
왜 들뢰즈를 전공했나요?
제임스 윌리엄스는 그의 책 Gilles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 에서 [이 책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 해설과 비판』으로 번역 출간되었으나 절판됨] 들뢰즈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들뢰즈는 조건과 조건지워진 것 사이의 상호 준인과관계를 밝혀낸 위대한 형이상학의 혁신과, 이는 논하기 위해 순수 차이들의 다수성과 강도들의 감쌈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개념적 혁신을 이루었으며, 『차이와 반복』은 실재가 단지 현실적인 것일 뿐이며 다른 모든 것은 불필요하고 상처뿐인 판타지라는 사실주의적이고 상식적인 믿음에 대한 주의깊은 대답이다" 나는 특히 밑줄친 문장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 내가 왜 다른 철학자가 아니고 들뢰즈에게 끌렸는지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데 윌리엄스의 저 말이라면 그 대답이 될 것 같다 20대의 나는 스스로 불필요하고 상처뿐인 판타지처럼 느꼈다 내가 굳이 무엇을 위해 내 젊음과 열정을 투자해야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그런 시간이 하루하루 지나면 지날수록 나 스스로에 대한 평가도 낮아져만 갔다 당시의 현실과 상식 그리고 사실들은 나에게 아무런 전망도, 기대도 심어주지 못했고,나 스스로도 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말하자면 나는 아래의 두 이미지로 상징되는 1990년대를 혼란스럽게 지각하는 젊은이였던 것 같다 이미지 출처 https://archives.kdemo.or.kr/contents/view/325 이미지출처 : 나무위키 당시 대학원에서는 우리나라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프랑스 원전들을 종종 복사해서 나누어 읽곤 했는데 『차이와 반복』이 그런 책들 중 하나였고,물론 무척 어려웠지만, 나는 그 어려운 문장들 속에서 얼핏 얼핏 빛나는 저 메시지를 읽었던 것 같다 "실재는 현실적인 것인 것만이 아니며, 다른 모든 것 역시 불필요하고 상처뿐인 판타지가 아니다"오히려 현실적인 것과 상식적인 것 그리고 사실들은 실재의 일면일 뿐그러한 개념과 층위로 포착되지 않는 실재가 있다내가 스스로 불필요하고 상처뿐인 판타지처럼 느꼈던 것은 이유가 있는 일이었다는 자각 같은 것이 생겼기 때문에 힘과 전망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나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었고, 그래서 이후로 들뢰즈가 내 삶과 연구에 일종의 나침반이 된 것 같다
2025.04.24
철학과
becoming을 설명해주세요
대문이미지 출처미상 ※ 책 표기 기호로 [ ] 사용함 becoming은 devenir의 영어번역어이고 우리말로는 로, 2-30년 전에는 으로 번역되었다 되기와 생성이라는 번역어는 마치 혹은 더 나아가서 는 뉘앙스를 전달해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마치 들뢰즈의 실천철학이라는 것이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되는대로 내버려두는 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종류의 오해 말이다 마치 머리카락이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것처럼 말이다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올라가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들의 운동을 다루면서 돌멩이를 던지면 아래로 떨어지고 불을 피우면 위로 타오르는 것은 각 사물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신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목적론적인 운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운동에 대한 이런 목적론적 설명은 지금은 사라졌고 뉴튼의 역학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에 대한 이러한 설명에서 제외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것과 같은 운동이다이러한 자동적spontaneous 운동은 본성이나 목적론을 적용할 가치가 없다고 본 것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시대로 넘어가보자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 1권 (1967년 판, 177-178)에는 벌과 건축가의 작업을 비교하는 부분이 있다 최악의 건축가와 최상의 벌을 구별지우는 것은 건축가는 실제로 건축을 하기 전에 머리 속으로 구조를 만든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작업을 하는 물질의 형태 변화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어떤 목적을 실현시킨다 - 마르크스 이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아마도 인간의 노동의 주체적/의식적/창조적인 반면 벌의 작업이 /무의식적/프로그램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대비를 한 것 같다 인간의 노동은 making인데, 벌의 일은 becoming이라는 그런 대비 말이다 사실 이와 같은 아이디어는 벌의 작업에 대한 많은 것들이 밝혀지면서 많은 부분 무색해졌다고 한다 "(벌은) 건축가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통신이나 지리정보체계 전문가를 무색하게 할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으로 의사소통하며, 그 복잡하고 복합적인 체계로 정보를 해석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심지어 벌 춤의 전체 구도는 어떠한 건축가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수학적 도식에 들어맞으며 오직 그러한 수학이 적용되는 양자이론의 입자와 관련된다." (데이비드 하비, [희망의 공간], 276쪽) 이제는 감히 인간의 노동이 자연의 일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becoming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것과 같은 자동성spontaneite(F)이 아니다 나는 나의 설명을 쉽게 해줄 좋은 인용문을 찾았고, 그 인용문으로 becoming에 대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들뢰즈의 becoming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본 홈페이지의 코너에 게시된 를 참조하길 바란다 다음은 카라타니Karatani의 글이다 Architecture as Metaphor, Language, Number, Money, Cambridge, Mass, p.38설계는 비트겐슈타인의 '게임'과 비슷하다. 그가 말한 바와 같이 그 게임에서 "우리는 놀면서, 우리가 따라갈 규칙을 정한다" 어떠한 건축가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어떠한 건축물도 그 맥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건축물은 만드는 사람의 통제를 벗어난 이룸(making) 또는 됨(becoming)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어떤 사건이다. 플라톤은 건축가를 은유가(metaphor)라고 칭송하였지만 또한 세속적인 노동자로서 멸시하였다. 왜냐하면 실제 건축가와 심지어 건축물 그 자체는 개연성(contingency)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연성은 설계자의 이상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실제 건축은 늘 붕괴의 위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연성은 어떠한 건축가도 설계 과정에서 관련된 '타자' 즉 고객, 스탭 그리고 다른 요소와의 관계와 무관하게 설계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한다.모든 건축가들은 이러한 타자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건축물은 공동의 규칙이 없이 발생하도록 조건지워진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이다-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정의상 동일한 규칙의 세트를 따르지 않는다.
2025.03.17
철학과
형이상학이 뭐에요? - 정의
대문이미지 : 하이데거 (1889~1976)앞선 FAQ를 작성하고 며칠이 지나서야 내가 형이상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을 읽을 분들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다 한 템포 늦었지만 다시 대답해보겠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많은 철학 개념들은 일본의 번역어들이다 이성理性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는 단어도 그렇다형이상학이라는 단어가 조어造語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형이상학에 대하여 형이하학이라는 말을 만들어 말장난을 하기도한다 번역어를 고안한 마음을 생각해보자면, 그들은 아마도 metaphysics가 형태를 갖춘 것들[구체적인 것들] 그 이상의 것에 대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구체적인 것들에 대한 학은 physics로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physics를 『자연학』이라고 번역하고, 이 단어는 현대에 물리학이 된다 어쩌면 차라리 metaphysics가 어떤 학문일까 고민고민하여 새로운 이름을 짓기보다는, 그냥 메타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메타-자연학, 메타-물리학 정도로 이름붙였다면 훨씬 받아들이기 쉬웠을지도 모르겠다그러면 철학, 그리고 형이상학이 젊은이들에게 그렇게 어렵고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체적인 사물들의 세계를 연구한 후에, 메타-자연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구체적인 여러 다양한 사물들을 그저 있다는 점에서는 점에서 그 모든 다양한 것들을 아우르는 원리로서의 있음을 찾아내려고 했던 것 같다 이것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을 다룬다고 영어와 라틴어를 섞어 쓰자면 이는 being qua(in so far as) being 이라고 표현된다 이는 무슨 뜻인고하니 이 세상에 있는 그 수많은 다양한 것들을 그 특정한 면모에 있어서 예를 든다면 그 사물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 사물의 생장과 관련하여, 그 사물의 아름다움과 관련하여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있다는 것과 관련하여 살펴보겠다는 뜻이다 가장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궁금증이다 나와 너, 그, 그들, a,b,c,d,e,..... 등의 사물과 천체들, 인간들, 생물들 등등의 다양한 것들이 그들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즉,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이 형이상학이다 베르그손 (1859~1941)여기에서 논문을 쓸 수는 없으므로 아주 간략하게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형이상학을 두 가지 손꼽아보겠다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질문이란 그저 "존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왜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지 아니하고 무엇인가가 있는가?"라고 한 바 있고, 베르그손은 그 질문이 "왜 다른 것이 아니고 이것인가?"라고 물었다 베르그손의 질문은 곧바로 아, 이것이 바로 차이에 대한 질문이구나 라는 느낌을 독자들에게 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이데거의 질문은 당시의 실존주의적 흐름을 담아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하이데거, 베르그손 등 질문들이 조금씩 미세하게 달라지는데 그에 따라 그들이 존재의 근본을 어떻게 통찰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된다 "왜 다른 것이 아니고 이것인가?"라는 질문이 들뢰즈에게 어떻게 변주되는지 다음에 이어서 알아보자
2025.03.11
철학과
형이상학이 뭐에요?- 필요성
대문이미지 : 아리스토텔레스의 Metaphysics 7권 첫 부분 William of Moerbeke의 라틴어 번역, 14세기 원고 수업시간에 이런 질문을 하는 학생은 매우 드물겠지만, 아마 정말 많이 묻고싶지 않을까?나는 학부시절 전공외 과목으로 고대철학을 수강했는데 이 과목의 기말고사 문제가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대하여 논하시오"였다 시험시간이 시작되고 10초 쯤 지났을 때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선생님, 형이상학이 뭐에요?"라고 질문하는 것이었다 그 순진한 용감함이라니... 당시 그 질문을 들으면서 정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더 놀라웠던 것은 그 질문을 받은 교수님이 아주 평온하게 대답을 해주시더라는 것이었다 !! 그래서 나는 이 "형이상학이 뭐에요?"라는 질문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30년이 지나서 나는 급기야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책을 쓰게 된 것이다아래 글은 오늘 출간된 『 차이 형이상학1 』에 대한 보도자료로 작성한 글이다 딥시크 충격으로 챗gpt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엔비디아 주가가 하락했다는 뉴스가 요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전 세계 시장이 고도의 인공지능에 의해 어떻게 재편될 것인지에 거의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직업이 가장 큰 위협을 받을까?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과 변별되는 인간의 능력은 무엇일까? 앞으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할까? 교육의 장에 인공지능을 어떻게 또 언제 도입해야 할까? 어떤 사람은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오히려 다른 곳에 있다고 경고한다. 장기적으로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존재하는 세상에 균형이 도래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인간들 사이에 능력의 격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져서 유능한 경력직은 지금보다 수십배 많은 연봉을 받게 되고, 아직 숙련되지 않은 인력이 담당할 일은 인공지능이 담당해주기 때문에 신입사원은 아예 뽑지 않아 일자리가 부족하거나 없어지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능력의 격차와 부의 격차가 더 극단화될 것이다. 우리는 눈이 부시고 현기증나는 기술의 격변을 목도하면서 우리가 살던대로 살아도 될지, 아니면 사는 방식을 변경해야할지,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세계에 살게될지 모르는 무지와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다.형이상학이란 이런 환경에서 참 낯선 단어가 아닌가? 지금 우리가 형이상학을 공부할 여유가 있는 걸까? 철학과가 여전히 대학에 남아 있어야하는 이유가 있나? 이공계만이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 수십년간 일자리가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저숙련 노동자의 고통이 심화될 거라고 진단했던 한 전문가는 아이들에게 어떤 공부를 시켜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인공지능은 패턴이 있는 모든 영역에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정보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그는 그런 사람은 교양수준이 높고 여러 분야에 대한 지식을 골고루 가지고 있으며 어떤 지식을 긴 일관성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일 거라고 말하고, 그 대책으로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했다. 책은 우리가 이미 쉽게 접할 수 있는 짤막한 글과 동영상이 제공하는 정보들과 달리 한권 분량의 내용을 어떤 하나의 일관된 논지로 펼쳐나가는 작업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 행위만이 무의미한 정보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우리는 기술의 격변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생활양식의 변화와 수준의 향상 앞에서 기술에 대한 숭배와 연마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이라는 것은 질문이라니. 그래서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를 구원할 것은 철학과 문학, 결국 인문학이란 이야기가 아닌가. 형이상학은 철학의 정수로서, 철학이 다루는 그 모든 주제들의 근본을 파고들어가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형이상학이라는 뜻이 아닌가. 차이>는 들뢰즈라는 걸출한 프랑스의 철학자로 대표되는 개념으로 현대를 해명하는 핵심 개념이다. 형이상학 시간이면 항상 이데아>나 형상>과 함께 배워왔던 그 형이상학이 아니라, 현대의 과학과 기술에 걸맞는 그에 합당한 형이상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차이형이상학이다. 이 책은 들뢰즈 형이상학의 정수인 『차이와 반복』에까지 이르는 준비 작업[1권]으로서, 니체를 거쳐 19세기의 과학을 충실하게 자신의 철학에 반영하고 있는 베르그손을 통해 고전적인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현대에 대한 탐구라도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고대적 개념이 영원성을 주제로 삼는 고대 철학에 잘 들어맞는 것이라면 현대적 개념, 현대과학은 또 다른 철학을 요구[한다]..이는 철학의 총체적인 전환이며 또한 베르그손이 궁극적으로 목표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현대과학에 대하여 그에 걸맞는, 철학사에서 사라져버린 자신의 나머지 반쪽과도 같은 형이상학을 부여하려고 했던 것이다.(들뢰즈, C1, 17/20 원본/번역본)위 텍스트는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에 대한 주석서이기도하고 영화 철학서이기도 한 들뢰즈의 『시네마』의 한 부분이다. 말하자면 들뢰즈는 베르그손에게서 서양철학이 처음부터 상실해버린 생성의 형이상학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노력은 들뢰즈 본인에게 이어졌다. 베르그손이 경험한 현대과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 대표되는 생물학의 대격변, 인간의 몸에 대한 의학과 생물학의 놀라운 발견과 발전이다. 우리는 과학과 철학의 조우를 대개 18세기까지의 뉴튼역학에서 마무리짓거나, 그 이후로는 20세기 양자물리학으로 훌쩍 뛰어넘는다. 그래서 그 사이에 있었던 생물학의 격변은 철학사에서 거의 잊혀지다시피한 것처럼 보인다. 요즘 우리는 쉽사리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e나 인간주의Humanisme을 비판하지만, 사실 그 비판이 어떻게 우리에게 왔고 우리의 사유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우습게도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의식의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를테면 종차별주의를 주장하면서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인간이 우주의 왕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동물들을 학대하는 것을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의 친소관계, 친밀감에 따라 보호해야할 것들을 고르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생물학과 신경생리학의 발견과 발전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우리의 주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격변을 가져왔는지 깊이 곱씹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우리는 들뢰즈로 대변되는 20세기 차이의 형이상학을 예견하는, 19세기의 과학적 성과를 소화한 베르그손에게서 곱씹어야할 생성의 형이상학이 어떤 모습인지 이 책에서 다루려고 하였다. 각 장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각 장의 소개 )1. 플라톤에서 니체로 전환된 형이상학 현대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철학자 니체는 현대철학의 임무를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고 보았다. 두 철학자 비교하면서 독자가 고전형이상학으로부터 현대형이상학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2. 19세기와 20세기 과학의 종합고중세와 변별되는 근대철학은 근대 과학혁명과 함께 이야기된다. 우리는 뉴튼역학의 완성 이후 그리고 양자역학 이전, 생물학의 시대인 19세기에 주목한다. 진화론과 신경생리학, 전자기장의 발견 등은 철학에 어떤 형태의 변화를 요구했는가?3. 몸진화론의 시대에 우리는 더이상 인간을 이성에 의해 다른 동물로부터 본질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생각하는 주체를 중심으로 하던 철학은 이제 운동하는 몸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지각, 감응, 행동으로 구되는 몸을 검토한다. 4. 몸과 마음을 잇는 다리 : 기억오래된 심신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서 기억이 제시된다. 몸은 습관으로 과거를 축적하고 마음은 이미지로 과거를 축적한다. 몸과 마음은 기억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 뇌는 이미지를 축적하는 기관이 아니라는 주장이 대두된다. 5. 정신크기, 무게, 형태 등으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없다고 할 수 없는 정신을 해명한다. 베르그손이 발명한 원뿔 형상과 눈사람 형상을 통해 정신의 특이성과 정신의 확장 등을 설명한다. 이성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6. 실재와 사실존재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요구에 의해 사회에 적응된 사실과 그러한 요구에 적응하는 순간으로 돌아가 미분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실재로 구분된다. 사실과 실재는 어떻게 다른가? 7. 시간시계와 측정으로 표상되는 통념상의 시간 개념 이전과 이후에 철학에서는 시간을 어떻게 사유했는지,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작으로 하여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쳐 베르그손을 검토하면서, 현재와 과거를 해명한다. 8. 개체와 개체화고전 형이상학은 기본적으로 보편자를 규명하고 그로부터 세계를 설명하는 체계인데 반하여, 현대의 형이상학은 개체가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편에서 개인으로 그 관심이 서서히 옮겨가기 시작하던 중세로부터 라이프니츠, 시몽동, 들뢰즈로 이어지는 현대의 논의를 설명한다.9. 물질과 정신의 문제 신경전달물질과 전위차, 전자기장 등의 과학적 발견이 물질과 정신의 문제에 들어오면 이 문제가 어떻게 변환될까? 현대 심신론에 반영되지 않은 베르그손의 심신론을 들여다본다.
2025.02.28
철학과
현대철학에는 선과 악이 없거나 둘을 구분하지 않나요?
대문이미지 : 니체 이 문제는 정말 자주 제기된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Yes라고 간주하는 많은 사람들이 현대는 더이상 도덕에 대해서,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시대라고 지레짐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철학이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선하게 살아야하는가 라는 질문은 참된 인식에 대한 질문과 함께 철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질문이다 누군가의 어떤 말과 행동이 선한 것인가 에 대한 판단을 감히 다른 누군가가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인류는 인류를 초월한 그 무엇[이데아 혹은 신]이 선과 악을 보증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있다고 전제했다 그런데 칸트가 살던 시대의 인류는 중세가 무너지면서 종교와 학문을 분리하기에 이르렀고, 근대 과학혁명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 무효가 되면서 목적론적 형상의 윤리적 역할 또한 폐기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조건에서도 인류는 선이 있다는 전제를 폐기할 생각이 없었고 칸트는 윤리를 복구하기 위해 신을 요청한다postulate 자아의 동일성과 영혼의 존재 역시 함께 요청되었다이후 니체는 칸트가 비판해야할 것을 오히려 전제했으며, 그 전제를 복구하기 위해 비판했다고 주장한다 참과 선 그 자체를 비판해야 하는데 그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다시 구하기 위해서 비판작업을 수행했다는 것이다그리하여 "신은 죽었다"로 대표되는 니체 주장의 핵심은 "선 그 자체는 없다"라는 것이다 이 언명은 그 자체로 인류에 아주 큰 충격과 공포를 안겼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야하지? 보편적인 선이라는 것은 없단 말인가? 그저 자기 나름대로 잘 살면 되는 것인가? 학문과 도덕을 지탱하던 이 진리에서도 무너지고, 선함에서도 무너지고, 결국 물리학에서도 더이상 구할 수 없는 것으로 역사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인류는 오랜시간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보면 니체의 저 주장이 공포스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저 주장은 이를테면 "이것이 선이다"라든지, "내가 선이다"라든지, "이것만 따르면 천국간다"라든지,스스로 절대적인 선이라 주장하는 것들을 폐기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선 그 자체이다"라고 주장될 수 있는 은 없다는 것이다니체의 비판은 어쩌면 세상에 그 어떤 독단도 남기지 않는 것으로서 그 모든 판단을 우리에게 맡긴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조금 더 귀찮아졌을 뿐이지 공포스러운 일은 아닌 것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니체가 열어젖힌 매우 현대적인 이 조건에서 우리는 어떤 윤리를 생각해볼 수 있을까? 니체 스스로 우리에게 기존의 선을 대신할만한 조언을 남겨두기는 했다 그는 "너는 네가 바라는 것을 영원히 바랄 것임이 확실한가?"라는 물음을 우리의 삶의 무게 중심이 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명령은 마치 칸트의 정언 명령을 상기시킬 정도로 그의 엄숙한 형식주의를 닮았다 내가 처하는 사건마다, 그 사건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주어져 있지 않으며, 그때마다 새로이 나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생각하고만약 조건이 다르더라도 언제나 이것을 바라는지를 되물으면서 나의 선을 만들어가는 것, 굳이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현대철학에서의 선과 악이다 그러나 또 굳이 말하자면 이것은 대문자 선the Good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개인적인 윤리에 관계하는 것이다만약 공동체나 집단, 인류의 차원에서 선과 악을 묻는다면 현대철학은 여전히 도덕상대주의로 남게 되는 것일까? 앞선 FAQ) 현대철학에는 보편성이 없나요? 에서 대답하려고 했던 것처럼, 현대철학이 보편성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의 오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여기 선/악에 대비시켜보면 어떨까 이제 우리는 주어진 선 그 자체는 잃어버렸지만, 개개인이 맞닥뜨리는 "영원히 반복할 의지"로서의 특이성singularity의 윤리가 곧바로 인류 전체에게 공명을 일으키는 보편성universality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은가우리는 누군가 아주 특수한 조건에 처한 개인이 그 삶의 우여곡절 끝에 얻게되는 깊고 고귀한 깨달음이 그에게만 가치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공감하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한히 퍼져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현대 철학이 탐험한 선[의 가치]은 그렇게 오래고 긴 과정에서 끊임없이 구해지는 그 무엇이라고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특이성과 보편성이 서로 공명한다는 주장을 좀 더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신지영, , 대동철학, 2016에서 다루었으니 참조 바랍니다
2025.01.24
철학과
현대철학에는 보편성이 없나요?
프랜시스 베이컨, 두폭짜리 습작, 자화상, 1970년 작품 아래의 사진: 프랜시스 베이컨 아마도 이 이야말로 학부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가장 어려운 개념이 아닐까 싶다 대개의 경우 학생들은 , 을 보편성이라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그래서 이라고 하면 그 말만 듣고도 곧바로 '아, 공통점을 부정하는 철학이구나'라고 판단해버린다 철학에 관심이 좀 있는 경우에 그 판단이 더 빠르고 견고하게 이루어져서 설득하기 더 어렵다 누구나 아무 전제없이 생각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대개 우리 세계에 이미 주어진 것들, 주어져있는 경계들, 주어져있는 분할들을 사유의 재료로 두고 그것으로부터 생각이라는 것을 시작한다사유거리가 마련되어 있는 탁자, 말하자면 이 사유의 탁자를 싹 비우고 생각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아마 들뢰즈는 이런 저런 사물들, 분할들, 배치들이 재료로서 올라가 있는 이 탁자를 라고 부른 것 같다 갖가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생각을 시작한다고 하자그러면 차이란 무엇이 되는가 세계를 살피자면 미국이라는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체제에 통합되지 않는 국가들,지역과 부족들을 가리킬 것이다 차이를 이렇게 이해하기 시작하면, 차이의 존재론은 다음과 같은 정치학으로 전개된다미국적 체제로의 통일이나 통합, 미국중심주의는 없[어야한]다각 국가, 각 지역, 각 부족들 각각이 자신만의 체제를 가진다... 이러한 생각조차도 그간 해오지 않은 생각이라하여 새롭다하면 어쩔 수 없다그리고 그만한 생각에도 배울만한 점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대강의 형이상학은 갖가지 부작용을 낳게 된다 바로 오늘의 FAQ와 같은 질문이 그 부작용 중 하나이다 모두들 제각각 알아서 사는 거라면 보편성이란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진리 상대주의인거지?합리성도 없고 이성도 부정하고 감각만을 쫓는 거지? 그동안 합리주의와 관념주의가 주장한 걸 정반대로만 하면 그게 바로 너희들 주장이지?이런식이다 이런 식의 몰이해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것은 전공자들의 설명이 불충분해서이거나, 현대철학에 대한 연구의 역사가 짧아서라거나, 아니면 [프랑스] 현대철학이 원래 난해해서라기보다는, 원래 우리의 풍토가 철학적 사유에 대한 볼모지여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이때 우리는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위와 같은 질문FAQ은 전 세계적이다]각설하고, 보편성 이야기로 돌아가자차이가 위와 같은 것이 아님은 알겠다고 하자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인가? [ FAQ) 참조 ]그것은 이를테면 나의 경우 이라는 고유명사를 가진 개인의 가장 고유한 무엇이다 그 가장 고유한 무엇은 너무 고유하기 때문에 일반화되지 않는다일반성이라는 것은 너에게도 있고 나에게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이는 매우 논리적인 이야기다신지영의 고유성, 신지영이라는 고유명사를 떠받치고 있는 무엇은 결코 일반화되지 않으며,그러면서도 신지영의 행동을 주도한다 말하자면 그것이 차이이자 특이성singularity이다 그런데 신지영이라는 인물은 그러한 고유성만을 가지고 살지는 않는다뻔하디뻔한 낡아빠진 말들도 하고, 매일매일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들로 하루를 채우기도한다남들과 비교할 수 있을 것들도 그 안에 있다는 말이다 비교가능한 개체성 그것은 특수성particularity이다 특수성은 비교가 가능하므로 일반화 가능하다 그러나 특이성은 비교가 불가능하고 일반화 불가능하지만 만약 내가 낡아빠진 일반성들의 더미 속에서 나를 이끌고 가는 특이성에 도달한다면 그 특이성은 보편적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낡고 편향되고 습관적이고 지루하고 지겨운 특수성[주관성]을 뚫고 들어가서 만난 나라는 개체의 발생 요소elements genetiques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 시작할 수 밖에 없는 개인적 글쓰기가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보편성이 초월적인 것, 신이나 이데아와 같이 인간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닌 한, 보편성이 개체 내에 있으리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더구나 들뢰즈 철학에 보편성이 다루어진다는 것은 확연한 사실이다왜냐하면 그의 중요한 테마중 하나가 이기 때문이다만약 어떤 철학자의 세계에 보편성이 없고 개체만이 존재한다면, 그는 를 다룰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특수한 것이 곧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이미 우리 주변에 일상적으로 있어왔다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모나드는 창이 없지만 신 안에서 예정조화롭다는 라이프니츠와 같은 세계관을 내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들뢰즈는 예정조화보다는 발산과 비동등 비평형 부조화를 선호했다 개체들 외부에는 신도 보편성도 없으며, 개체들간의 의사소통같은 것은 없지만 개체화하는 보편성, 곧 특이성이 있다고
2025.01.03
철학과
욕망과 도주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개념 아닌가요?
대문이미지 출처, 국민일보물론 FAQ의 질문을 그대로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욕망과 도주에 던져지는 질문들은 사실 위와 같은 함축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정치 사회철학에 대한 진지한 비판자로는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하비, 알렉스 캘리니코스, 에티엔느 발리바르 등으로 꼽아볼 수 있는데, 하비의 비판은 FAQ)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철학은 너무 주변적이고 제한되어 있지 않나요?에서 이미 다루었다 욕망과 도주에 대한 비판은 발리바르와 캘리니코스로부터 아래와 같이 제기되었다 우선 발리바르, "이러한 방식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것이 부정성을 배제함으로써 투쟁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것에서 하나의 긍정적인 또는 구성적인 노선[도주 - 들뢰즈랩 삽입]을 끌어내려 하는 것"(E., Balibar, “Une philosophie politique de la différence anthropologique”, Multitudes 9, 2002, p. 66.)다음 캘리니코스, "노동계급을 원자화하는 강력한 자본의 힘이 노동계급 전반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간과하면서, 제국은 해방을 향한 평민들의 근절할 수 없는 욕망에 관해 말하고 있다"(캘리니코스 외, 『제국이라는 유령,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론 비판』, 이매진, 2007, 21쪽.)우선 욕망이라는 문제이미지출처; 시사인, 이지영 그림, 욕망이라는 쓰레기 고전 형이상학에서는 존재를 실체와 속성의 결합, 혹은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이해한다존재를 이와같은 고정된 형상Figure이 아닌 힘이나 사건 혹은 욕망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스피노자가 처음인 것 같다 [아주 오래전에는 헤라클레이토스를 꼽을 수 있겠다]이후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손, 하이데거 등을 거쳐 존재는 힘과 의지, 사건 등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욕망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이므로 힘과 의지의 결합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물론 고대로부터 욕망이라는 단어는 이미 있었고, 철학이 욕망을 인지하고 개념화하려고 한 것은 플라톤이 욕망을 기술이 아니라 기술로 이해한 때가 처음인 것으로 보인다들뢰즈는 여기에 이미 이의를 제기하고, 욕망은 획득술이 아니라 생산하는 기술이라고 주장한다이 지점에서도 이미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욕망이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과 이미지를 소비하는데 불과한 획득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욕망이 생산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또 별도의 문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각자의 욕망을 따라가도록 원자화하는 마당에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개념으로 욕망을 제시한다는 것은 너무 부적절하다는 캘리니코스의 주장에는 들뢰즈-가타리[이후 D_G로 약칭]의 욕망 개념이 이미 생산된 것을 원하는 힘 혹은 의지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D_G가 주장하는 욕망은 생산된 상품을 원하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 생산하는 힘인데 말이다상품을 욕망하는 욕망은 국가와 자본에 포획된 욕망일 뿐, 욕망은 언제나 포획을 벗어난다 다시 말해 캘리니코스의 비판은 허수아비 공격이다 다음, 도주 개념 도주 역시 투쟁에 비교되면서 비겁한 개념으로 간주되고 비판받는다누가봐도 투쟁이 필요한 때에 구성주의적 긍정[도주]이라니 말이다그러나 이때의 도주 역시 당면한 문제로부터의 회피라는 의미의 도주가 아니다욕망에 대한 설명에서 언급했다시피, 도주란 포획으로부터의 도주이다 D_G는 도주를 위의 사진에서처럼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맹수로부터 도망가는 것과 같이 이해하도록 권한 바 있다욕망은 일정한 방향없이 무한히 발산하는 힘인데국가 자본주의는 이를 일정한 방향으로 포획한다포획이란 마치 맹수가 내 목숨을 노리는 일인 것과 같이 위험천만한 일이며언제 어디서 어떤 맹수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예민하고 재빠르게 도주해야한다 그것이 포획에 대면하는 욕망의 자세다 이는 발리바르의 말처럼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획에 대한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대처다그렇게 포획에서 빠져나와야 그 다음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는가그것은 다른 진지의 구축일 수도 있고 대규모 시위가 될 수도 있다 도주를 비겁한 개념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비판 대상에 대한 공부의 부족, 게으름의 고백에 다름 아니다
2024.12.24
철학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철학은 너무 주변적이고 제한적이지 않나요?
이미지 출처 : *이번 답변은 좀 길어질 것 같네요 눈에 띄는 부분만 읽으셔도 됩니다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와 분열증』1,2권으로 그들의 정치철학을 전개했다이들의 정치철학이 "너무 주변적이고 제한적이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가능한 비판중 가장 나은 비판이다우리말 번역으로는 2000쪽에 이르는 두 권의 책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테제와 테마들로 인하여 이런 저런 비판이 많은데, 그 중 가장 핵심적으로라는 테마는 그들의 철학이 "친자본주의적"이라든지, 자본주의의 문제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분열증적 경향을 폭발할 정도로 강화하는" 것으로 해결해야한다든지와 같은비평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그 와중에 그나마 두사람의 정치철학이 너무 주변적이라는 비판은 두사람의 철학을 일부 이해한 비판이라 정성스럽게 대답해볼 만 하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공동사회, 마을 또는 작은 도시)에서 거둔 자연과의조화라는 원칙에 입각해서 너무 주변화되거나 너무 제한적이다" (데이비드 하비, 『희망의 공간』, 314쪽)이 질문은 "들뢰즈는 무정부주의자인가요?"(FAQ참조)라는 질문과 일부 겹치는 질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런 질문의 세례를 받는 것은 이들이 국회와 정부 혹은 국가를 설명하거나 정치의 체제들 및 대안 체제를 다루지 않고, 기구와 기관 및 장치들을 포획으로 보고 정치를 포획과 도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기관과 기구, 정부, 의회 등의 매개들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매개 없는 직접 개입과 도주 등을 중요하게 다룸으로써, 마치 그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정치라는 것은 기껏해야 작은 규모의 조합이라든지 공동체communaute, 소수자-되기와 같은 안정적이지 않은 정치적인 운동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은 일부 일리가 있다 이에 대답하기 위해 오늘자 신문 하단의 작은 뉴스를 인용해보겠다 위 기사는 오늘(2024년 12월 10일 경향신문 13면 하단에 배치되어 있다모든 신문과 모든 방송, 거의 모든 정치관련 유튜브가 비상계엄과 탄핵 혹은 수사 등에 대한 기사로 도배가 되는 요즘에 이런 기사는 무척 눈에 띄었다 신문을 직접 찍어올린 것이라 기사 내용이 정확히 안 읽힐 수 있으나 이 두개의 기사는 "김형수 금속노조지회장 단식,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 2년반,고공농성 벌이고 있는 해고노동자 박정혜, 소현숙씨, 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자 강태완씨"를 언급하고 있다우리 사회의 문제들은 물론 이러한 노동자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옆면에는 AI 교과서 도입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신문의 한면을 다 채운 교사들의 전면광고가 있었다 나는 처음 AI 교과서 도입이라는 이슈를 접하고 '이렇게 급하게 도입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다음 광고를 보고 부분적으로는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며칠전 경향신문 1면 하단 광고였다 광고를 맡긴이가 누군가를 보자면, AI 디지털교과서 발행사 일동과 사단법인 한국교과서협회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섭섭하겠지만, 어쨌든 AI 교과서 도입에는 일부 강력한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그렇다면 '왜 교과서협회에서 굳이 이렇게 빨리 디지털교과서를 도입하려는 것일까'그것도 유추해볼만한 사회적 환경이 있다하나는 자본이란 언제나 증식하는 쪽으로 가야한다는 강력한 흐름, 다른 하나는 정부가 세금으로 운영하거나 지원하는 많은 프로젝트[우리나라는 이를 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 번역어/단어가 무척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가 있는데, 이에 지원해서 선정되기 위해서는 평가의 기준에 프로젝트의 내용과 주제 무엇보다 제목을 맞춰야하는 것이 필수적이다평가의 기준에는 대체로 , 등이 들어가게 되는데 그 기준은 기준이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로 모든 연구 프로젝트가 시류를 좇는데 급급하게 만들어버렸다예전에 이미 했던 것, 고전적인 주제 등은 점수가 낮을 확률이 높다 는 것이 항상 시류를 좇는 것과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어버린다 또한, 우리나라에 국가가 기능을 미약하게나마 하기 시작한 역사가 깊지 않기 때문에 국민들은 각자 알아서 살아온 습관이 있고, 그러다보니 어떤 사업이 잘된다 하면 그리로 전부 몰려 결국은 모두 죽는 일이 빈번해진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사례가 그러하다 프랜차이즈 거리제한 폐지, 경제적 약자는 어디로?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548뉴스의 핵심은 프랜차이즈에서 지점들을 낼 때 기존 지점과의 거리제한이 있어서 그나마 각 지점의 상권이 일부 보호되는 측면이 있었는데 그와같은 거리제한관련 가이드라인을 공정위가 전면 폐지하기로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 일환이란다그리고나서 아래 인용문을 보자 *FAQ[들뢰즈는 무정부주의자인가요?]에서 인용했던 것들이다 "국가에 의한 탈영토화는 그보다 강력한 자본의 탈영토화를 완화시키고 그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서 자본에 재영토화를 초래한다."(873쪽)"사실 노동자의 투쟁은 어디서나 ...자본주의적 기업이라는 틀을 넘어선다. 이러한 투쟁은 직접 국가의 공적 지출을 좌우하는 공리들과 특수한 국제조직..과 관련된 공리들을 대상으로 한다. ...공리의 부가를 가속하고 방향을 부여하며 테크노크라트들의 착오를 막아야하는 것이다."(888쪽) 위의 들뢰즈-가타리의 말을 약간 쉽게 각색하자면, 국가는 자본의 탈영토화를 하고 한다노동자의 투쟁은 국가의 공적 지출을 좌우하는 공리들에 직접 대면하는 것이고 그 공리의 방향을 부여하며 관료의 착오를 막아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을 우리의 현실에 대응시켜보겠다 정부는 노동자의 해고와 비정규직화를 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정부의 로 삼는다 더불어 , 는 공리를 근거로 위 뉴스와 같은 조치를 취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투쟁?은 노동개혁=노동자의 해고와 비정규직화라는 등식과 그 공리를 문제삼고경쟁이 생산성을 높인다는 공리에 의문을 가지고 이의를 제기하여야 하며 과열된 시장에는 정부가 적절한 규제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여공리의 방향을 전환하고 테크노크라트들의 착오를 예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장사가 잘되는 편의점이 있다면 그 모델에 따라 그 상권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좋은 장소를 물색하여 또 하나의 편의점을 짓도록 소상공인들을 유도하고, 유도로 안되면 규제하고,국민은 그 조치와 규제가 합리적이라는 것을,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모두가 잘 살자는 것'임을 이해하고 협조하는 것이 서로 맞물려 작동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그러한 모든 것이 잘 작동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게 얽히고 삐그덕거리면서 하나하나 메말라 죽어간다 이런 환경에서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을 리가 없다 2024년의 비상계엄은 어리석고 코믹한 일이었다 큰일이 날 뻔했고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중고등학교 다니는 어린 학생들부터 파릇파릇한 대학생 연세 지긋한 어르신까지 모두 뜻을 모으고 있다이 일은 이제 마무리될 것이다그런데 그 다음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우리는 그 다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들 깊이 속속들이 작게 크게 고통당하고 외면당하고 이해받지 못한채 괴로워하고 죽어가는 이들이 많다이런 사례들을 그나마 상당히 늘어놓으려면 한 권의 소설로도 부족할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괴로움과 고통이 어리석은 대통령을 실각시키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으면 바로 해소가 될까? 파시즘과 무도함은 최고권력자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그의 어리석음은 오히려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 것이 오히려 수월하다그러나 우리나라 전체의 실핏줄, 미세한 신경계통, 연약한 피부를 이루는 각계각층의 각종 다종다양한 모임과 조직의 파시즘과 무도함은 그대로이지 않은가그것은 만천하에 드러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깨달을 기회조차 잘 주어지지 않는다모두 작고 복잡한 기만 속에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설명하는 들뢰즈 가타리의 정치철학이 너무 주변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일거에 해소할 커다란 테마, 이를테면 공산혁명과 같은 테마를 주장하거나 국가의 이념이나 정부의 조직 개편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야만 했다는 것인가? 이미 존재하는 거대담론들, 거대이론들로 뭔가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문제는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보아야하지 않는가?왜 모두 같은 대답을 바라는 것일까? 그러한 대답들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는데 말이다
202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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