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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항거, 진주정신 실천한 강재순 가문
등록일 2024.01.05
조회수 94
작성자 관리자

불의에 항거, 진주정신 실천한 강재순 가문


혹독한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이들이 활동에 나섰다. 그런데 부모와 아들 3형제 모두가 항일 저항운동에 뛰어든 가문이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진주의 ‘강재순 가문’은 혹독한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한 지주 출신의 양반가문이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이들은 편안한 삶을 버렸다. 가장 먼저 학교를 설립하고 국채보상운동, 형평운동, 소년운동에 매진하며 전국적인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경남일보는 새해를 맞아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진주의 ‘강재순 가문’을 조명했다.


◇빼앗긴 나라를 지켜온 지역의 횃불

일제는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에는 조선의 주권마저 완전히 빼앗았다.

국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당시 경남의 도청 소재지였던 진주에서 대안면장을 지낸 강재순(1845~1929)은 일흔에 가까운 나이인 1910년, 뜻있는 이들과 힘을 합쳐 진주 최초의 사립학교인 진주봉양학교를 건립했다.

진주봉래초등학교의 전신인 봉양학교는 진주에서 선교사가 아닌 지역민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사립학교였다.

강재순의 장남 강상호는 초대교장이 돼 학교 운영에 힘을 보탰다. 봉양학교는 근대적 교과목을 강조했지만 민족정신을 가르쳤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진주에서도 만세운동에 많은 청년들이 동참했다. 당시 진주 3·1운동으로 징역형을 받은 23명 중에서 봉양학교 출신은 강상호를 비롯해 7명이나 된다.

강상호 선생의 아들인 강인수(86·대구시)씨는 “이러한 기록을 볼 때 당시 봉양학교의 민족교육과 3·1운동 직후 일제가 공립학교로 전환한 것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강재순의 처는 전주 이씨(1863~1916)로 ‘자비보살’로 불리울 정도로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1910년대 진주에 가뭄과 홍수로 많은 이재민들이 생겨나자 이씨 부인은 곳간을 열어 그들을 도왔다. 그렇게 굶주림을 면한 주민들은 그녀의 사후 공적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우며 은혜를 기렸다.

강재순 부부는 모두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형평운동가 강상호, 둘째는 강기호, 셋째는 아동문학가로 방정환 선생과 색동회를 창립한 강영호, 넷째는 천재 서양화가로 명성을 떨친 강신호다. 이중 둘째 강기호(1889~1915)는 일찍 작고해 그 행적이 알려진 바가 없지만 나머지 3형제는 각각의 분야에서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독립 향한 열망으로 항일의 삶 살아

장남 강상호(1887~1957)는 오늘날 ‘형평운동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 인권운동의 효시라고 평가받는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신분 차별을 없애기 위해 진주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강상호는 일본이 조선에 강압적으로 차관을 빌려 쓰게 한 뒤 경제적으로 압박을 가하자 1907년 국채보상운동 경남회를 결성하고 모금활동을 벌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진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대구형무소에 복역했다. 차별대우 받는 백정들을 위해 1923년 4월 형평사 발기총회 임시의장을 맡았으며 전국적으로 형평운동을 불을 지폈다. 1924년에는 일제가 진주에 있던 도청을 이전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다 구속됐다. 1927년에는 신간회 진주지부 간사로 활동했으며 해방이후 1946년에는 진주 3·1동지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셋째 강영호(1899~1950)와 막내 강신호는 서울의 휘문중·고등학교를 나왔다. 강영호는 서울에서 휘문중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의 동경대학교에서 아동문학을 전공했다.

방정환 선생과 함께 색동회를 결성하고 소년운동가로 활동했다. 그의 후손들은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의 정신으로 진주소년운동에 가담했을 뿐 아니라 색동회 활동에 많은 자금을 지원했다”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 강영호는 1920년 경남과 전남에서 항일 전단 수천 장을 뿌리다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다. 아동문학가인 그의 작품 대부분은 유실되었지만 최근에는 그에 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막내 강신호(1904~1927)는 당대 촉망받는 서양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서울 휘문고 재학시절인 1924년에는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아침의 정물’로 입선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며 여러 미전에서 특선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았다.

1925년에는 진주성에서 자신의 첫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강신호는 1927년 그의 나이 24세에 고향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다 남강 의암바위 부근에서 익사하는 사고를 당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조선이 낳은 천재 청년미술가로 조선미술계의 큰 손실’이라며 애도하는 보도가 이어졌다. 최근에는 그의 행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그가 남긴 작품들에서 항일정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안영숙 경상국립대 진주학연구센터 연구원은 “강신호 선생이 남긴 ‘촉석루의 여명’이라는 작품은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과 두 차례나 대격전를 벌인 진주성 촉석루에서 밝아오는 아침 해를 묘사한 그림으로 일본에 저항하는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최초의 춘향 영정을 강신호 선생이 그렸다는 주장이 제기돼 연구가 진행 중이다. 춘향 영정은 당시 남원 권번에서 활동하던 기생 최봉선이 진주의 강상호에게 요청해 그려지게 되는데, 강상호의 동생인 강신호가 그렸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춘향 영정은 태극의 문양으로 색감을 입혀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대의 파도 헤쳐온 선각자 가문

강재순 가문이 활동하던 시절은 일제의 침략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소수의 사람들만 제대로 교육받고 지주들만 부유했을 뿐 그러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차별에 억압받고 살았다.

그걸 깨기 위해 앞장섰던 강재순 가문은 시대를 뛰어넘어, 더 나은 사회를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했던 선각자였으며 불의에 항거하는 ‘진주정신’을 실천했다.

신진균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은 “이들이 보여준 생애는 남명 조식 선생과 진주농민항쟁, 진주3·1독립운동, 형평운동으로 이어지는 불의에 저항하는 불굴의 진주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이들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가진 재산을 형평운동과 어린이운동, 항일운동을 지원하는데 아낌없이 사용하면서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으며 꿈에 그리던 해방이 되었지만 6·25전쟁은 그들의 운명을 또 바꿔 놓았다.

본인도 모르게 국민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라가 강상호는 주변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났지만 강영호는 억울하게 희생당했다. 하지만 강재순 가문에서 정부 포상을 받은 이는 2005년 대통령 표창으로 애국지사로 추서된 강상호 선생이 유일하다.

김중섭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지만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 험난한 길을 자처했던 이들 가문의 희생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출처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http://www.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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