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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2023년 9월) 심층연구 생명체의 환경을 사유하기
  • 철학과
  • 2023.09.04
  • 444

생명체의 환경을 사유하기


문성균 경상국립대 철학과 박사과정


Ⅰ. 문제의 도입

캉길렘에 따르면, 환경(milieu)은 오늘날 생명체를 사유하기 위해 요구되는 “필수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이자 “현대인들의 사유의 범주”를 구성한다. 환경이라는 개념이 근대 생물학이 정립된 이후에야 과학의 대상으로 규정되었다는 사실과 이로부터 생명체를 환경으로부터 고립된 존재자가 아니라 환경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존재자로 표상하는 현대 생물학의 논의를 고려하면, 환경에 대한 캉길렘의 평가는 매우 정확할 뿐만 아니라 환경이라는 개념이 생명체들을 다루는 과학에서만큼이나 생명의 문제를 사유하는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생명에 대한 철학은 생명체를 영속적인 생성으로 사유한다면, 환경의 철학적인 의미는 영속적으로 생성하는 생명체에 대해 환경이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혹은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해명함으로써만 드러날 것이다.

환경의 존재를 어떻게 ‘철학적으로’ 사유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들뢰즈의 ‘문제’ 개념은 환경의 심층적인 위상과 의미를 펼쳐주는 것처럼 보인다. 베르그송과 시몽동에 대한 연구에서 들뢰즈는, 그들이 생명과 관련하여 ‘문제’라는 사유의 범주를 개념화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베르그송이나 시몽동과 들뢰즈 사이에 맺어질 수 있는 관계를 소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생명에 대한 들뢰즈의 사유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베르그송주의』에서 들뢰즈는 생명을 ‘문제-해결 과정’으로 규정하는데, 이러한 규정은 물론 생명에 대한 베르그송의 사유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것이기는 하지만, 생명이 문제-해결 과정이라는 모티프는 『차이와 반복』의 논의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시몽동의 논의를 참조하면서 개체화가 “어떤 준안정상태, 즉 적어도 두 이질적인 크기의 질서 혹은 두 이질적인 실재성의 단계들과 같은 어떤 ‘불균등화’의 현존을 가정”하고, 이러한 불균등화에 의해 “어떤 객관적인 ‘문제 제기의’ 장”이 나타나며, “개체화는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의 활동으로 출현”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들뢰즈가 베르그송이나 시몽동과 마찬가지로 생명, 즉 생명체와 환경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생성의 과정을 ‘문제-해결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생명을 이렇게 바라봄으로써 들뢰즈는 유기체 혹은 생명체의 형태를 문제-해결 과정의 효과로 규정하게 된다. “유기체는 어떤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빛으로부터 제기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눈과 같이, 유기체의 분화된 각각의 기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유기체란 물질적인 요소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조합되는 메커니즘의 인과적인 결과나 외부적이거나 내부적인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다. 유기체를 형성하는 생물학적인 조직화를 어떤 메커니즘이나 목적에 묶어두는 지성의 논리는 생명을 어떤 선(先)-결정된 방향을 향해 전개되는 과정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불충분하다. 생명이 이미 주어진 방향에 따라 전개된다는 인식은 항상 어떤 외삽법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명에 대한 들뢰즈의 규정은 생명체와 환경의 관계를 내재적으로 사유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Ⅱ. 환경의 계보(학)

생명체들에 대한 ‘과학’으로서 ‘생물학’이 성립한 이후에 생물학에서 논의되는 환경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마르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환경을 생명체를 사유하기 위한 하나의 개념이자 과학으로서 생물학의 대상으로 규정한 사람이 라마르크이기 때문이다.

라마르크의 생물학에서 환경은 그것의 이론적 기원으로 인해 역학적인 맥락에서 개념화된다. 환경은 물체들 사이의 원격 작용을 파악하기 위해 뉴턴 역학에서 유래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뉴턴은 원격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물체들 사이에 힘을 운반하는 매체로서 에테르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세웠는데, ‘힘을 운반하는 매체’라는 관념은 프랑스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물체들 사이의 공간을 의미하는 ‘환-경’(mi-lieu)이라는 용어로 번역되어 수용되었다. 이후 환경이라는 용어는 라마르크에 의해 생물학에 도입된다. 생명체가 놓인 환경이 라마르크에 이르러 비로소 실증 과학의 연구 대상으로 규정된 것이다. 이는 생명(체)에 대한 실증 과학으로서 생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라마르크가 “생명체에 작용하는 환경의 영향이 언제 어디서나 명백”하다는 “실증적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8세기에 이미 환경이 생명체의 변화를 유발하는 요인이라는 관념이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이 라마르크의 독창성을 규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라마르크에 의해 환경이 생물학의 ‘과학적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라마르크의 생물학에서 환경은 생명체에 대해 어떤 작용을 하는가? 거기서 환경은 우선 생명체에 무차별하게 주어지는 지리적인 ‘서식 환경’으로 파악되고, 이에 따라 생명체의 형태화와 변형을 추동하는 원인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고려된다. 이러한 개념화에 따르면, 생명체의 형태화와 변형은 생명체가 서식하는 환경의 끊임없는 변화에 의존한다. 라마르크에 따르면, 서식 환경에 의해 추동되는 생명체의 변형은 시간의 경과를 요구하는 일련의 연쇄적인 조직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라마르크는 풀이 거의 없는 건조한 환경에서 주로 나뭇잎을 뜯어 먹으며 살아가는 기린이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먹으려는 욕구에 따라 자신의 목을 점차 늘린 결과 현재와 같이 변형된 목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서식 환경이 생명체의 내적 욕구를 변화시키면, 변화한 내적 욕구가 생명체의 행동이나 습성(habitude)을 변화시키고, 습성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생명체의 변형을 유발하는 연쇄적인 조직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생명체의 조직화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서식 환경에 의해 인과적으로 조건화됨을 보여준다. 생명체에 작용하는 환경의 존재를 ‘실증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생명체의 “다양한 형태와 습성의 진정한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생명체가 “계속해서 마주치는 매우 느리게 변화하고 무한히 다양한 환경이 [생명체] 각각의 습성에 새로운 욕구와 필연적인 변화를 유발했음을 고려해야만 한다.”

라마르크의 생물학에서 나타나는 환경의 역학적인 의미는 윅스퀼에 의해 근본적으로 전복된다. 윅스퀼은 생명체에 관한 물리-화학적 탐구 방식이 생명체를 “단순한 사물”로 만들면서 생명체의 고유성을 망각한다고 비판한다. 이와 반대로, 윅스퀼에 따르면, 생물학자는 생명체의 고유성을 생명체가 지각하고 행동한다는 사실, 그로부터 고유한 환경을 구성한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윅스퀼은, 환경이 생명체를 점진적으로 구성한다는 라마르크의 주장을 거꾸로 뒤집어, 생명체가 환경을 능동적으로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윅스퀼은 환경(milieu)과 주위(environnement)를 “주의 깊게” 구별한다. 윅스퀼에 따르면, 환경은 어떤 생명체에 고유한 지각과 행동이 전개되는 공간을 의미한다. 반면, 주위는 모든 생명체에게 무차별하게 주어지는 지리적 공간을 가리킨다. 이러한 구별에 근거하면, 라마르크가 생명체의 변형과 관련하여 고려한 환경의 개념, 즉 역학적인 의미로 개념화된 서식 환경은 모든 생명체에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으로서 주위의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반대로, 윅스퀼은 환경을 개별 생명체에게 고유한 의미 있는 공간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떤 생명체에 고유한 의미 공간으로서 환경이 생명체가 주위로부터 “선별적으로 뽑아낸 부분”이라는 점이다. 생명체는 자신의 주위에서 특정 부분들을 선별하고, 이렇게 뽑아낸 부분이 생명체에게 의미 있는 공간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점에서 생명체의 환경은 그것을 포함하는 주위로 환원되지 않는 본성상 차이를 가진다. 환경은 주위로부터 일종의 빼기에 의해 선별된 부분이지만 환경의 선별에는 생명체의 내부적인 요인들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진드기에 대한 윅스퀼의 연구이다.

윅스퀼의 진드기 연구에 따르면, 수풀 이파리 끝에 앉아 먹잇감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진드기는 눈이 퇴화했기 때문에, 빛에 대한 전반적인 감각에 의존해서 이동한다. 눈과 귀가 퇴화한 진드기는 후각에 의존해서 먹잇감을 지각하는데, 포유동물에서 방출되는 낙산 냄새는 진드기에게 먹잇감이 가까이 있으니, 그것을 향해 몸을 내던지라는 신호(signal)로 작용한다. 진드기가 감각된 낙산 냄새에 따라 몸을 던져 온혈동물 위로 떨어지면, 이후에는 촉각을 이용해 가능한 털이 없는 부분을 찾는다. 목표한 지점에 도달한 진드기는 온혈동물의 피부 조직 안으로 머리를 박고 피를 빨아들인다. 윅스퀼이 그려낸 진드기의 이미지는 진드기에게 고유한 환경이 외부 자극과 그에 따른 진드기의 감각-운동 체계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진드기는 주위에서 유래하는 다른 감각 자극들에는 전적으로 무관심하지만, 온혈동물의 낙산 냄새에는 적극적인 행동을 실행한다. 이러한 진드기의 행동 양상은 진드기가 단순히 외부 자극들을 기계적으로 수용하고 반응하는 존재자가 아니라, 모종의 욕구나 관심에 따라 외부 자극들을 선별해서 지각하고, 지각한 외부 자극들에서 유래하는 신호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자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자는 단순히 신경계의 생리적인 흥분작용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라기보다는, 내적 욕구와 관심에 따라 지각하고 행동하는 “기술자”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환경은, 캉길렘의 정의에 따르면, 주위로부터 생명체의 감각-운동 체계에 의해 분화되는 “신호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 자극들의 총체”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생명체가 자기를 둘러싼 환경과의 관계에서 살아간다는 ‘실증적 사실’을 고려할 때, 역학적인 개념화는 생명체를 ‘하나의 사물’로 고려하면서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물’인 환경에 의해 조건화되는 수동적인 존재자로 규정하고, 생물학적 개념화는 생명체를 ‘하나의 주체’로 고려하면서 자기에게 고유한 환경을 ‘하나의 대상’으로 구성하는 능동적인 존재자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들은 결국 생명체와 환경의 관계를 인식하는 생명과학자 혹은 생물학자의 경향을 보여준다. 역학적인 개념화는 생명체를 환경으로부터 유래하는 작용을 수용하는 기계로 간주하고, 이러한 기계를 물리-화학적 방법으로 분석하려는 생명과학자의 경향에서 유래할 것이다. 반면, 생물학적 개념화는 생명체를 기계와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자로 간주하고, 이러한 존재자에 어떤 능동성을 부여하려는 생물학자의 경향에서 유래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서 생명체와 환경에 대한 과학자들의 인식은, 과학에 대한 상식적인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과 달리, 순수하게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생명체에 대한 하나의 실천을 함축한다. 따라서 과학적 지성이 실재에 대한 절대적인 인식이 아니라 단지 살아있는 과학자의 특정한 욕구와 관심에 따라 체계화되는 상대적인 인식만을 제공한다는 베르그송의 사유를 고려하면, 과학적 개념화가 환경에 대한 절대적 인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Ⅲ. 들뢰즈의 ‘문제’ 개념

들뢰즈는 유기체의 구성 혹은 형태화를 문제-해결 과정으로 개념화한다. “유기체는 어떤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개념화에 따르면, 생명체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조직화 혹은 형태화는 생명체가 자기에게 고유한 환경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해결로서 규정되기 때문에, 환경 자체는 생명체에 대해 문제의 위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환경에 대한 이러한 개념화는 부분적으로 윅스퀼의 분석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해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윅스퀼은 환경을 생명체의 감각-운동 체계에 따라 구성되는 의미 공간으로 규정한다. 이는 생명체의 내적 체계에 의해 구성되는 환경이 무엇보다도 생명체가 감각적으로 ‘마주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환경의 구성은 생명체의 감각 기관과 주위에 산재하는 자극들 사이의 접촉과 그러한 자극들에 대한 생명체의 선별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마주침의 대상”을 재인식의 대상과 구별해 “오직 감각밖에 될 수 없는 것”, 즉 “어떤 기호(signe)”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기호라는 개념으로 들뢰즈가 가리키는 사태는, 구조주의 언어학이 규정하는 것처럼 실재와 유리된 “기표들의 연쇄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어떤 사태이다. 다시 말해, 기호는 비대칭적이고 이질적인 체계 안에서 체계의 비대칭성과 이질성이 해소되면서 출현하는 일종의 효과로, 들뢰즈는 “비대칭적 요소들을 갖추고 불균등한 크기의 질서들을 거느리고 있는 하나의 체계를 ‘신호’(signal)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체계 안에서 발생하는 것, 간격 안에서 섬광처럼 번뜩이는 것, 불균등한 것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어떤 소통 같은 것을 ‘기호’라 부른다. [그러므로] 기호는 분명 어떤 효과이다.”

마주침의 대상과 기호에 관한 들뢰즈의 논의는 환경의 구성과 관련한 윅스퀼의 개념화 방식에 철학적 엄밀함을 부여해준다. 다시 진드기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들뢰즈의 개념들을 참조하면, 진드기의 서식 환경에 상응하는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주위는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크기의 질서들을 감싸고 있는 일종의 신호 체계로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서는 진드기도 우선 이질적인 신호들의 체계로서의 주위에 포함될 것인데, 진드기조차도 감각-운동 체계로 규정되는 한에서, 자기 주변에 분포하는 다른 신호와 마주쳐 어떤 구성 작용을 수행하기 전까지는 주위를 구성하는 이질적인 신호 체계의 일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이질적인 신호 체계 안에서 포유동물의 낙산 냄새와 진드기의 후각 기관이 접촉하면, 낙산 냄새가 진드기에 대해 번뜩이는 감각 기호로서 출현할 것이다. 이렇게 출현한 감각 기호는 진드기의 행동 양상을 조직화하는 조건으로 작용하게 된다.

환경의 구성을 체계들의 마주침으로 이해하면, 주위와 환경은 생명체와 관련해 고정된 항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계로 나타나게 된다. 캉길렘이 정확히 언급하였듯이, 주위와 환경은 생명체의 현재 감각-운동 체계를 중심으로 말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중심의 공간상 위치나 시간상 상태가 변화하면, 생명체의 주위와 환경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환경 자체의 심층적인 이중성이 드러난다. 주위는 이제 단순히 생명체에 무차별하게 주어지는 지리적인 서식 공간이 아니라, 생명체의 위치 이동이나 내적 체계의 상태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유동적인 공간, 다시 말해, 생명체에 대해 과거에 환경으로 구성되었던 공간이거나 미래에 환경으로 구성될 공간일 것이다. 따라서 이질적인 신호 체계로서 주위는 생명체의 잠재적인 환경을 이룬다. 반면, 신호 체계의 효과로 발생하는 기호와 같은 환경은 현재 안에서 생명체와 주위의 마주침으로부터 분화되는 현실적인 환경으로 규정될 것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분화되는 것은 현실적인 환경만이 아니다. 윅스퀼이 적절하게 파악하였듯이, 현실적인 환경은 마주침에 의해 비로소 생명체에 대해 ‘하나의 대상’으로 정립되기 때문에, 현실적인 환경의 분화와 더불어 구성되는 것은 생명체 자체의 ‘주체적 위치’이기도 하다.

들뢰즈에 따르면, 현실적인 환경-기호의 중요성은 생명체가 “문제를 제기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에 있다. “감각밖에 될 수 없는 것(감각되어야 할 것 혹은 감성의 존재)은 영혼을 뒤흔들고 ‘곤혹스럽게’ 하며, 말하자면, 마치 마주침의 대상, 즉 기호가 문제의 운반자였던 것처럼, 마치 그것이 문제였던 것처럼, [영혼이] 어떤 문제를 제기하도록 강요한다.” 이는 생명체의 현실적인 환경을 규정하는 기호들이 무엇보다도 그것의 의미가 전개되거나 설명되어야 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기호란 항상 불분명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기호가 감싸고 있는 의미의 해석은 생명체에게서 행동의 방향을 조건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령 진드기의 행동 양상은 포유동물의 낙산 냄새를 ‘먹잇감’이라는 의미로 펼쳐내고 전개하는 과정에 의해 조건화된다. 포유동물의 낙산 냄새가 진드기에게서 ‘먹잇감’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았다면, 진드기는 포유동물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과정에 의해 그러한 의미의 해석이 이루어지는가? 다시 말해, 환경-기호가 감싸고 있거나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어떻게 전개되거나 설명되는가? 들뢰즈는 여기서 사유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들뢰즈에게서 사유란 자발적으로 진리를 의지하는 능동적인 주체의 활동이 아니라, 마주침의 대상으로서 환경-기호에 의해 폭력적으로 강요됨으로써 출현한다.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이고, 사유 안에서 강제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이다. 사유는 세계 안에서 불법 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다.” 따라서 사유의 참된 실행과 사유를 참되게 실행시키는 대상이 존재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진드기조차도 사유 역량을 펼쳐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환경-기호로부터 특정한 행동 양상을 조직화하는 한에서, 진드기는 감각된 낙산 냄새를 하나의 기호로 다루는 것이며, 그러한 기호에 함축된 의미를 찾으려는 사유의 노력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서 사유의 참된 실행을 강요하는 환경-기호는 이념 혹은 문제로 규정된다. 철학적으로 문제는 “철학적이거나 과학적인 지성의 원천” 혹은 사유가 촉발되는 근원으로 개념화된다. 심지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과정은 생명 자체의 노력이라고까지 말해진다. 이러한 문제 개념의 역사적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아포리아(aporiā)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사유가 마주한 근본적인 어려움으로서 아포리아는 그것의 해결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서도 얻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는 느낌을 산출하는데, 이러한 느낌을 동반한 사유의 상태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슬에 묶인 인간의 상태에 비유했다. 사슬에 묶인 인간처럼 어떤 대상과 마주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사유의 상태가 바로 아포리아의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제에 대한 들뢰즈의 개념화 역시 기본적으로는 아포리아와 관련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어떤 마주침의 대상은 생명체에게 그것을 도저히 해결하지 못할 것만 같다는 느낌을 낳고, 생명체의 내적 동요 혹은 내적 불일치를 유발하는 그러한 느낌─이질감, 어지럼증, 현기증 등─이 결국에는 생명체를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문제를 출현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문제를 아포리아와 관련하여 규정하는 방식에 만족하지 않고, 이념적 질서에 속하는 문제와 경험적 질서에 속하는 해결의 본성상 차이를 강조하는 동시에 문제 자체를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해결들의 출현을 조건화하는 선험적인(transcendantale) 심급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문제 자체가 해소되지 않고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맞지만, 해결 불가능한 상태로 존속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에 내적인 구조에 의해 부분적이지만 완전히 해결 가능하며, 이로부터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하나의 경우로서 해결이 현실화하는 것이다.

차이의 이념적 종합에 관한 논의에서 들뢰즈는 어떤 문제가 현실적인 것들의 실질적인 발생 조건인 미분적 요소들과 그것들의 변별적 관계들에 상응하는 특이성들에 따라 비록 부분적이지만 완전히 규정 가능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해결 가능성은 미분적 요소들과 특이성들이 할당된 문제의 내적 구조, 일종의 관계적 구조로부터 유래하며, 이러한 관계적 구조가 문제가 제기되는 형식을 조직하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 가능성은 문제의 형식”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라마르크의 기린 사례는 기린에게서 나타나는 목의 형태화와 변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기린의 내적 욕구와 서식 환경, 즉 빈약한 잔디들, 건조함, 높은 나무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전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한 이질적인 요소들은 기린의 조직화를 조건화하지만, 구성된 형태와 관련하여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경험되지는 않는 미분적 요소들로서, 비대칭적이고 이질적인 신호 체계인 잠재적인 환경-신호에 분포할 것이다. 이러한 환경-신호 내에서 어떤 요소들과 기린의 감각-운동 체계가 접촉하면, 그로부터 기린의 현실적인 환경-기호가 분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화된 환경-기호는 기린에 대해 나뭇잎 섭취 혹은 식욕과 관련한 문제─예컨대, 저기 있는 나뭇잎을 어떻게 섭취할 것인가? 혹은 식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등─를 제기하도록 만든다. 문제의 해결 가능성이 환경에 분포하는 미분적 요소들─빈약한 잔디들, 건조함, 높은 나무, 그리고 식욕과 같은 기린의 내적 요인들─과 미분적 요소들 사이의 변별적 관계에 상응하는 특이성─‘나뭇잎’이라는 기호─들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기린의 목이 점진적으로 높은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들을 섭취하기에 적합한 형태로 조직화하거나 변이하는 과정은 바로 그러한 문제-해결 과정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생명체의 환경은 이중적이다. 환경의 이중성은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생명체의 잠재적인 환경-신호는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크기의 질서들을 거느린 신호 체계라는 의미에서 미분적 요소들과 특이성들이 분포하는 문제 제기의 장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환경-신호에 분포하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신호들은 생명체의 내적 체계에 의해 한정됨으로써 특이한 기호들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환경-신호는 현실화의 역량을 감싸고 있는 기호들의 체계라는 점에서 진정으로 잠재성의 영역에 속한다. 다른 한편으로, 생명체의 현실적인 환경-기호는 환경-신호를 이루는 이질적인 신호들과 생명체의 내적 체계 사이의 강도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실제로 현실화한 효과들이다. 생명체의 내적 동요 혹은 내적 불일치를 산출하는 이러한 효과들은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이렇게 출현한 문제는 그에 적합한 해결, 즉 환경-기호가 함축하는 의미를 특정 방향으로 조직화하도록 생명체를 강제한다.

Ⅳ. 생명의 논리: 문제-해결 과정

생명체의 환경을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환경을 가로지르는 내적인 이중성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체의 환경은 단순히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서식 환경이나 생명체의 내적 체계에 의해 구성되는 공간에 제한되지도 않는다. 생명체가 거주하는 환경은 우선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이며, 그러한 공간 속에서 의미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의 이중성을 개념화하기 위해 우리는 들뢰즈의 개념들과 논리에 천착했다. 들뢰즈의 사유는 환경의 이중성과 그것이 생명체에 대해 갖는 위상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요구되는 개념들과 논리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환경에 대한 고려로부터 생명체의 조직화는 생명체와 환경을 아우르는 생명의 잠재성이 분화하는 절차로 나타난다. 주지하듯이, 생명에 관한 들뢰즈의 사유는 “잠재성의 현실화”로 집약된다. 이러한 사유는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가? 생명의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기는 하지만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기 때문에, 이로부터 두 가지 태도가 유래하게 된다. 하나는 생명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태도이다. 자콥에 따르면, 현대 생명과학의 실험실은 ‘생명체’를 탐구하기 위해 “생명을 묻지[는] 않는다.” 다른 하나는, 생명체에 대한 분석적 태도에 저항하면서 생명을 일종의 규제적 원리로 개념화하고, 생명체에 대해 생명의 존재를 요청하는 태도이다. 여기서 생명은 실험적 방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명체의 전체성을 사유하기 위한 일종의 이념으로 고려된다. 이것은 생명을 생명체에서 출현하는 사건들을 지도하는 비물질적인 원리로 개념화하지는 않더라도 분명 생기론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생명에 대한 들뢰즈의 태도는 분명 생기론적이다. 들뢰즈는 『대담』에서 자신의 작업을 회고적으로 평가하면서 “내가 썼던 모든 것은 생기론적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러기를 바랐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 자체가 해석되어야 하는 하나의 기호이기는 하지만, 이와 관련해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을 잠재성의 현실화로 사유하는 들뢰즈의 작업이 생명체에서 출현하는 사건들에 상위의 통일성을 부과하지 않고서도, 그것들을 전체성의 차원─말하자면, 비유기적 전체성─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들뢰즈에게서 생명은 결코 유기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유기체 자체는 환경에 의해 조건화되며, 환경 자체는 유기체의 보존을 위해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유기체 내부에 이질적인 느낌을 산출하고, 그로부터 어떤 문제를 제기하도록 폭력적으로 강요한다. 생명은 비유기적이라는 들뢰즈의 규정이 의미하는 바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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