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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호 (2023년 3월) 철학의 시선 상업영화에서 반복되는 칸트 

    상업영화에서 반복되는 칸트정제기 영남대 철학과 객원교수  이 글에서 나는 생각보다 많은 영화에서 칸트 철학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주체의 모습을 모티브로 삼아 주인공의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드러낼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다 그렇겠지만, 한 철학자의 이론에 오랫동안 천착해서 공부하다 보면 자신의 시선이 그 철학자의 관점에 맞닿아 있을 때가 많다. 특히 연구자 스스로가 해당 철학자의 입장에 깊게 공감하며 동의할 때는 더욱 그렇다. 나는 개인적으로 칸트철학을 전공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칸트주의자가 된 나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칸트와 더불어, 칸트를 넘어 사유하는 것의 의미들을 오랫동안 고민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직업병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쉬면서 무슨 영화나 드라마를 보더라도 칸트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칸트를 떠올렸던 영화는 「서울의 봄」 이다. 주지하다시피 「서울의 봄」은 10.26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직후의 이야기로, 전두환과 하나회가 어떻게 군사반란을 일으켰는지를 세심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과장과 미화가 섞여 있겠지만, 정우성 배우가 연기한 이태신(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을 맡았던 장태완 소장을 모티브)은 전형적인 칸트주의자다. 칸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전두광의 군사반란과 횡포라는 여러 주관적 제한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수도경비사령관이자 군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의무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타 다른 장성들이 두려움 때문에 자리를 이탈하여 숨거나 회유되는 것에 비해, 이태신은 그저 “군인이기 때문에” 전두광의 군사반란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작품 내에서 이태신이 “군인이기 때문에” 수행한 모든 행동들은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즉 “의무로부터 나온” 행동이라는 점에서 정당화되며,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 그렇다면 이태신의 의무는 어떻게 칸트적인 방식으로 정당화되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설명을 살펴보자.  칸트는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 선의지der gute Wille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의무Pflicht 개념을 도입한다. 의무는 “해야만 하는” 무조건적인 명령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정언명령의 다른 설명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이러한 의무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의무에 맞는 행위pflichtmäßge Handlung”와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Handlung aus Pflicht”를 구분하면서 그 유명한 상인의 예시를 든다. 칸트에 따르면, 영리한 상인이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어린 아이나 돈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고 정직하게 정가대로 돈을 받는 행위는 “의무에 맞는” 행위일 수는 있다. 예를 들면, 만약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신용도가 높아져서 손님들이 더 많이 몰릴 것을 기대한다거나, 혹은 이 손님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다른 목적이 있었거나 하는 경우가 이러한 “의무에 맞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비록 칭찬을 받아 마땅할지는 몰라도 결코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 즉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일 수 있는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는 이 행위로 말미암아 어떤 결과가 기대될 수 있는지를 결코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의무는 오직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려고 하는 “의욕의 원리” 때문에 도덕적 가치를 지닐 수 있을 뿐이다.  주인공의 행동이 칸트적인 의미에서 의무를 다하기 때문에 숭고하게 여겨질 수 있는 작품은 그 이외에도 많다. 그 중에서도 나는 『겨울왕국 2』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이는 “칸트적인, 너무나 칸트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겨울왕국 2』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정서는 바로 “의무Pflicht”와 “희망Hoffnung”에 대한 정서이다. “엘사”와 “안나”는 『겨울왕국 2』에 이르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칸트주의자로 거듭났는데, 왜냐하면 『겨울왕국 2』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주제가 바로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do the next right thing”이기 때문이다. 두 자매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 즉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두 자매가 이 의무를 수행하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그저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뿐이다. 이는 칸트가 그토록 강조하는 무조건적인 명령인 정언명령der kategorische Imperativ을 연상시킨다.   엘사와 안나 두 자매들이 “해야만 할 일the next right thing”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언적인 태도를 취했는가? 아니면 정언적인 태도를 취했는가? 물론 누군가는 이 자매들이 의무를 수행하는 이유는 바로 “아렌달 왕국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것을 영화적인 장치에 불과하다고 보는 쪽이다. 엘사가 트롤들의 경고를 들으면서 왜곡된 과거를 바로잡기로 결정하는 행동, 그리고 마법의 숲에서 아렌달 군인들과 노덜드라인들에게 반드시 마법의 숲에 걸린 저주를 풀고 여러분들을 자유롭게 해 주겠다고 말하는 행동들은, 이 행동의 결과로 인해 엘사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갈 수 있을지를 고려하면서 수행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곤란하다. 실제로 엘사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상대방에게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엘사는 오히려 자신이 아렌달의 여왕으로서, 또 아렌달 왕인 아버지와 노덜드라 출신 어머니의 자녀로서 자신이 해야만 할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아렌달을 구함으로써 얻은 행복이나, 노덜드라의 여왕이 된 것들 등은 칸트 식으로 표현하면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한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지, 결코 엘사 자신의 “순수 의지를 규정한 것”이 아니다. 만약 내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엘사는 단순히 위에서 언급한 “의무에 맞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의무로부터 나온 행동”을 수행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마블 영화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캡틴 아메리카” 역시도 칸트적 인간의 전형임을 말하고 싶다. 이는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대립과 갈등의 구조가 공리주의 대 의무주의의 문법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빌 워』에서 아이언 맨은, 어벤져스 팀이 빌런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하여 소코비아 사태에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소코비아 협정을 통해, 어벤져스 팀이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쪽의 입장에 동의한다. 이는 국제 연맹과 같은 기구의 판단을 통해, 가능한 한 적은 피해를 받는 쪽으로 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리를 중시하는 공리주의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에 반해, 캡틴 아메리카는 이러한 국가 기관의 통제가 어벤져스 팀의 자율성과 판단을 무시하게 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통제는 결국 국제 연맹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을 선별적으로 구하게 될 수 있을 가능성, 또 다른 중요한 누군가를 위해 덜 중요한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게 될 수 있을 가능성 등을 이유로 소코비아 협정에 따르기를 반대한다. 결국 이러한 사상적 차이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 맨의 대립으로 이어지며, 이는 영화를 풀어가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이처럼 상업영화에서 칸트적 인간은 생각보다 많이 반복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가 아닌 다른 매체들에까지 영역을 확장하자면, 『왕좌의 게임』의 네드 스타크, 『스토브 리그』의 강두기 투수, 『낭만닥터 김사부』의 김사부, 심지어는 『귀멸의 칼날』의 카마도 탄지로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서 자신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칸트적 인간의 전형이다. 이처럼 대중매체에서 칸트적 인간형의 군상이 계속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칸트적 인간의 모습이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적 인간은 어떤 점에서 매력적인가? 이에 대해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는 선이 부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로나마 이상적인 도덕적 인간의 모습을 향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주관적인 제한과 방해 하에서도, 자신의 선한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전진하는 도덕적 인간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일종의 경외와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한편에서는 칸트적 인간이 현재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너무나도 찾아보기 힘든 인간의 유형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사회에서 너무나도 이 칸트적 유형의 인간이 요청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정제기영남대 철학과에서 「칸트의 최고선 개념과 희망철학 연구」(2022)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남대와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내세적 희망에서 현세적 희망으로- 칸트 실천철학에서 최고선 개념과 희망철학에 대한 연구-」와 「칸트적인, 그러나 너무나 비-칸트적인 - 김남주 시적 주체성의 철학적 원형」 등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였다.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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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호 (2023년 3월) 철학의 시선 각성: 영화 매트릭스 철학으로 읽다 

    각성영화 '매트릭스'(1999)를 철학으로 읽다박대윤 경상국립대 철학과 박사수료  영화 매트릭스는 1999년 워쇼스키 감독이 만든 sf 장르의 영화로 매트릭스라는 가상의 공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이 영화의 철학적인 함의를 다루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고, 이 글은 그런 시도 중 하나이다.  우선 영화는 구원이나 메시아적인 관점을 그려 보여주고자 한다. 첫 장면의 통화장면은 주인공 네오가 자신들을 구원할 그(He, the one)인지 아닌지를 묻고 있다. 구원이 테마인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억압하는 존재와 억압받는 존재가 등장한다. 이때 억압하는 존재는 인간들과의 전쟁에서 이긴 기계문명이고 억압받는 존재는 인류이다. 인류는 기계문명의 동력원으로서 길러지고 관리된다. 매트릭스는 이 동력원으로서의 인류를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영화 초반 나오는 문장인 The matrix has you는 인류가 매트릭스라는 관리시스템 내에서 관리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영화의 초반 대사로도 나오는 질문인 “매트릭스란 무엇인가?” 우선 영화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이것을 다룬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경험한 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장자와 나비, 호접몽의 이야기를 영화는 반복한다. 매트릭스는 바로 이 문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묻는다. 매트릭스는 가상인가 실재인가? 영화에서 주인공 만큼 중요한 인물인 모피어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꿈의 신인 모르페우스을 모티브로 한다. 모피어스는 네오를 만나자 그에게 곧 꿈에서 깰 것이라고 말하는데, 네오가 꿈에서 깬다면 그 현실은 꿈인지 현실인지 어떻게 구분하는가? 철학적인 이 문제는 영화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영화는 이 인식론적 문제를 바탕으로 우리가 꿈을(가상)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즉 가상을 이용한 인간들의 통제가 문제이다. 인류는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을 통해서 자신이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노예로서, 기계문명의 동력원으로서 길러진다. 그러나 모피어스에 따르면 네오는 그렇게 통제되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존재로서 묘사된다. 가상의 통제장치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 통제되고 있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는 존재는 그 통제장치인 매트릭스가 무엇인지를 반복해서 묻는 존재가 된다. 모피어스는 그런 네오에게 매트릭스는 모든 곳에 있고 진실을 못 보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라고 말해준다. 그렇다면 그 진실은 무엇인가? 모피어스는 그 진실이 ‘사람들이 노예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매트릭스는 사람들이 노예라는 사실을 감추는 통제장치인 것이다.   이런 관점은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과 맥을 같이한다. 마르크스는 사회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로 나누고 상부구조에서 사람들이 진실을 볼 수 없도록 하는 관념으로서 이념과 대조해서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이 자신들이 자본주의 내에서 노예로서 살고 있다는 것을 감추는 관념이라고 진단하고 최종적으로 타파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영화 매트릭스 1편도 이러한 테마와 유사한 전개를 보인다. 따라서 이 이데올로기, 매트릭스를 극복하는 것,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과연 매트릭스가 가상이라는 것을 알기만 하는 것으로 이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가? 기존의 정치 철학적 관점, 혹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은 인류가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속았다는 것을 기반으로 진실을 알려 그것을 극복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때문에 계몽이 문제가 되고, 근대적 계몽주의가 자본주의적 세계관에서 지식인층의 지향점이 다시금 된다. 그러나 우리가 매트릭스가 가상이라는 것을 안다고, 그 통제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가? 그리고 과연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속기만 한 것인가? 영화는 사이퍼라는 인물을 통해서 매트릭스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단순히 매트릭스가 가상이라는 것을 알기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이퍼는 동료들을 매트릭스 내의 관리자들에게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자신은 기억을 지운 채로 다시 매트릭스로 넣어달라고 부탁한다.   들뢰즈는 현대 정치철학의 중요한 질문은 여전히 스피노자의 질문에 있다고 말한다. 즉 “왜 사람들이 노예가 되기를 욕망하는가?” 영화에서 사이퍼는 바로 이 욕망을 표현한다. 한편 철학 내에서 진리는 인간의 무조건적 욕망의 대상, 호감의 대상으로 이해되었다.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이퍼의 행태는 바로 우리의 행태, 욕망의 문제를 드러낸다. 우리는 진실에 눈을 감고(혹은 진실을 왜곡하고) 노예가 되기를 욕망한다.   영화에서 네오는 이런 노예 상태의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가 매트릭스라는 통제장치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영화는 그렇게 네오가 매트릭스를 넘어서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 보여주며,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각성하는 드라마를 펼친다.   그런데 그가 각성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일종의 예언가로 보여지는 오라클이라는 존재는 네오와의 첫 만남에서 네오가 그(He)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그러면서도 몇몇 단서들을 다는데, 거기엔 ‘죽음과 관련된 선택’, ‘다음 생(生)’과 같은 것이 있다. 각성은 일종의 새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현대인이 사회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관점까지 연장될 수 있을까? 영화에서 네오는 생물학적으로 죽음에 직면하며, 마치 메시아의 환생처럼 다시 태어나서 매트릭스를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다수의 민중은 죽고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들뢰즈는 죽음본능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시시각각 새로 태어날 수 있다. 우리가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자아, 더 구체적으로는 주체의 죽음을 말한다. 그것은 특정하게 구조화된 주체가 해체되고 새로운 주체가 재조직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만남, 더 이상 나를 고집할 수 없는 파괴적 충격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고통을 감당해낸 자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으며, 과거의 나를 망각해 낼 수 있다. 망각도 능력인 것이다. 망각을 해낸 자만이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 1편은 시스템에 통제되고 있지만 시스템 내부의 모순들을 느낀 어떤 존재가 그 시스템을 뛰어넘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각성의 드라마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서 통제를 벗어난다는 것, 자유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다. 이 자유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이지만, 결코 행복한 것만도 아니며, 어쩌면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것으로 우리가 그것을 추구하도록 추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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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호 (2023년 3월) 카툰 개와 부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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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호 (2023년 3월) 심층연구 오온론(五蘊論)의 저자 귀속 문제 

    의 저자 귀속 문제이수진 경상국립대 철학과 박사과정1. 이끄는 말  본 글은 『오온론(五蘊論)』(Pañcaskadhaka)의 저자 문제에 대한 검토이다. 『오온론』은 불교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세친(世親, Vasubandu)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세친은 불교 부파에 있어 가장 유력했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이하 유부)에 출가하여, 이후 그의 형인 무착(無着, Asaṅga, 310?∼390?경)의 권유로 대승으로 전향하였다. 따라서 부파와 대승불교 양쪽의 사상적 면모를 모두 지니고 있다. 여기서 『오온론』은 바로 세친이 사상적인 변화를 겪는 과도기적 시기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소승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Abhidharmakośabhāṣya)(이하 구사론)과 대승 논서인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Karmasiddhiprakaraṇa), 『연기경석(緣起經釋)』(Pratītyasamutpādavyākhyā),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Viṃśatikā-vijñaptimātratāsiddhi),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Triṃśikā-vijñaptimātratāsiddhi)이며, 그는 이뿐만 아니라 다수의 문헌을 남기고 있다. 이 작품들의 저술 순서를 살펴보면, 세친이 『구사론』 저술 후, 유부에서 대승으로 사상적 변화를 겪는 과정에서 『성업론』, 『연기경석』 및 『오온론』를 저술하고, 이후 『이십론』와 『삼십송』에서는 유식사상을 전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에 기존 연구에서는 『오온론』을 『구사론』의 법체계를 따르면서, 동시에 무착의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abhidarmasamuccaya)(이하 집론)의 영향을 받아 저술된 작품으로 본 논서의 성격을 규정한다.2. 세친이인설과 저자 귀속 문제  1951년 저명한 불교학자인 Frauwallner에 의해 세친이인설(世親二人說)이 제기되었다. 그는 세친을 두 명으로 나눈다. 먼저 고세친(古世親, 320~380경)은 무착의 동생이고, 신세친(新世親, 400~480경)은 『구사론』의 저자인 세친이다. 이는 단순히 세친이 두 명인가 아닌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파생하여 세친 저작의 귀속 문제가 대두되었다. Frauwallner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며, 이후 그의 제자인 Schmithausen이 세친 사상의 점진적 변화라는 관점에서, ‘경량부적 전제’를 키워드로, 『구사론』의 저자인 신세친을 『성업론』, 『이십론』, 『삼십송』의 저자로 확정지었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구사론』의 저자는 신세친이며 무착의 동생은 구세친으로, 둘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최근 연구에서는 『오온론』이 『집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 Yogacarabhumi를 저본으로 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는데,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 논서를 『구사론』의 저자인 세친의 작품이라 특정할 충분한 근거는 될 수 없다.   혹은 R. Krizer와 하라다 와쇼(原田和宗)는 세친 사상의 점진적 진화모델이라는 가정 자체를 부정하고, 애초부터 대승유가행파이며 아비달마교도를 교화시키기 위해 변복한 대승의 유식학자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하였다. 세친이 유부에서 전향한 인물이 아닌 본질적으로 유가행파라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오온론』을 세친이 『구사론』을 저술한 이후, 유식사상으로 전향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 성향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분류하는 것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3. 구사론주 세친과 『오온론』1) 『오온론』에 대해서  초기불교 이래, 오온은 12처·18계와 함께 존재 분석의 기본 범주이다. 불교에서, 세계란 절대적 신에 의해서도 우연의 소산도 아닌, 존재 요소[諸法, dharma]들의 인연화합에 의한 것이다. 이 제법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인식의 조건으로서 12처(處, ānyatana)로 분류되기도 하고, 혹은 18계(界, dhātu)로, 다시 5온(蘊, skandha)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오온은 불교에서 세계의 존재를 해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오온론』은 이 오온을 중심 주제로, 각 온에 포함되는 제법들을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는 불교학 개론서이다.   글의 구성은 유식계열의 심법(心法)이 아닌, 색온(色蘊) 그리고 수(受)·상(想)·행(行)·식온(識蘊)의 순서로 유부의 법 분류체계를 따르고 있다. 『오온론』의 전체 법체계를 보아도 5위(位)78법(法)으로 아비달마의 법수에 가깝다. 반면 내용적인 면은 식온에서 알라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과 말나식(末那識, manas-vijñāna)을 정의하고, 법처(法處)의 무위에 허공(虛空, ākāśa), 비택멸(非擇滅, apratisaṅkhyānirodha), 택멸(擇滅, pratisaṅkhyānirodha)과 함께 ‘진여(眞如, tathatā)’를 포함시키며, 유식학파의 상징적인 개념을 다룬다. 따라서 『오온론』는 유부적 법체계를 기본 틀로 삼고, 동시에 유식의 사상적 경향을 담아내고 있다. 2) 구사론주 세친과 『오온론』  『오온론』의 작자 문제에 있어, 구사론주 세친의 작품으로 보는 입장은 티벳의 역사학자인 부톤(Buston, 1290~1364)이 언급하는 세친의 8저작에 『오온론』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야쇼미트라(Yaśomitra, 6세기경)의 Abhidharmakośavyākhyā에서 세친을 이 논서의 저자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을 논거로 든다. 또 『오온론』에는 식온에서 알라야식에 대한 논의 등 명확히 유식적 입장이 반영되어 있는 점을 들어 『이십론』 이전의 저작으로 위치시키기도 하고, 구사론적 견해도 보이기 때문에 『성업론』과 함께 세친의 과도기적 사상을 살필 수 있는 문헌이라 평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종철은 『오온론』이 『구사론』 「근품(根品)」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 불상응행법에 관해서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존재양태(avasthā)에 대해서 분별한 언어적 존재라고 보는 점이 구사론주 세친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이종철이 『구사론』과 세친의 경량부 사상적 견해에 입각해 있다는 논거를 제시하고 있을 뿐, 그 외는 이미 세친의 작품이라는 전제 하에 『오온론』를 바라보고, 그 논거를 역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먼저 세친의 작품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오온론』과 세친의 주요 작품인 『구사론』을 항목별 정의 방식 및 술어 사용 등 형식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비교 분석하여 통일적 요소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만약 세친의 작품이 아니라면, 『오온론』이 어떤 사상적 영향권 하에 있는지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품류족론(品類足論)』, 『입아비달마론(入阿毘達磨論)』 등의 유부 계열의 논서와 유식 계열의 『집론』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의 문헌들과 비교 검토 후에, 본 문헌의 저자를 확정함이 타당할 것이다.나가는 말  세친은 왜 유부와 유식사상이 접목된 개론서를 지은 것인가? 혹은 유식학파가 유부적 요소를 가미하여 그들의 사상을 알리고자 세친의 이름을 빌린 것은 아닌가? 세친이라는 인물의 불교사상사적 위상은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로 인해 그에 대한 논의는 세친2인설을 넘어서 세친3인설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온론』이 세친의 작품이라면, 유부에서 유식으로의 사상적 전향이라는 세친 사상의 점진적 변화 모델을 뒷받침해 주는 또 하나의 주요 논거가 될 것으로 본다.  만약 『오온론』이 세친의 작품이 아니라 할지라도, 유부와 유식사상이 혼용된 논서라는 본 문헌의 고유성으로 인해 불교 사상사적 면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부와 유식은 외부 세계의 존재 유무에 대한 전혀 상반되는 입장을 고수하지만, 그럼에도 유식사상의 곳곳에 유부적 사유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오온론』은 이 두 학파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료이다. 이는 또한 유식학파가 인도불교사상사에서 체계를 확립해 가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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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호 (2023년 3월) 심층연구 수학적 설명과 존재의 결별 

    수학적 설명과 존재의 결별김주원 경상국립대 철학과 석사1. 들어가는 말  23개의 딸기를 3명에게 균등하게 나눠주려고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시도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를 설명함에 있어, 우리는 “23이 3으로 나누어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수학적 설명이란, 이 예시에서처럼 경험적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 순수 수학적 사실이 설명적 역할을 수행하는(혹은 그러하다고 주장되는) 설명의 종류를 일컫는다.  수학적 설명에서 수학적 사실이 진정으로 설명적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관해선 의견의 불일치가 나타난다. 이러한 의견의 불일치는 부분적으로는 수학적 대상에 관한 존재론적 입장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에선, 수학적 사실이 진정으로 설명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주장이 종종 수학적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한 논거로 사용된다(Baker 2005, Colyvan 2010). 반대편에선, 일련의 수학적 반-실재론자들이 그들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진정한 수학적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Bueno 2013).  본고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가) 진정한 수학적 설명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수학적 대상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실재론자들의 논변이 실패함을 보인다.(나) 진정한 수학적 설명의 존재와 수학적 반-실재론이 양립할 수 없다는 종래의 입장이 설명 개념에 관한 특정한 관점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이고, 두 입장이 조화될 수 있도록 하는 대안적 관점의 설명 개념을 옹호한다.(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수학적 설명의 존재가 수학적 대상에 관한 특정한 존재론에 의존하지 않음을 보이고, 이를 통해 수학적 설명의 설명으로서의 적법성에 관한 논의가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에 관한 논의로부터 중립적임을 주장한다.2. 수학적 설명과 수학적 실재론수학적 설명의 존재론적 중립성 주장에 대한 첫 번째 위협은, 수학적 설명이 실제로 설명적이라면 이는 수학적 대상의 실재성을 옹호하는 논변을 확립한다는 주장이다.수학적 실재론에 대한 전통적 옹호 논변인 불가결성 논변은 다음과 같다.(P1) 우리는 최선의 과학 이론에 불가결한 모든 대상들을, 그리고 오직 그 대상들만을 존재론적으로 개입(be ontologically committed to)해야 한다.(P2) 수학적 대상들은 최선의 과학 이론에 불가결하다.(C) 따라서 우리는 수학적 대상들을 존재론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그러나 (P1)이 어떤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개입의 기준으로서 너무 느슨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어왔다. 과학 이론은 종종 단지 유용할 뿐인 거짓 가정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가령 과학자들은 명백히 거짓이거나 적어도 의심스러운 가정을 포함하는 이상화된 모형을 취한다. 그러나 만일 같은 현상에 대해 그러한 가정들을 제거하면서도 동등하게 좋은 설명을 제공하는 이론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거짓 가정들은 여전히 이론에서 불가결하다. 따라서 이론에서 어떤 상정의 불가결성이 그것들의 참이나 존재성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과학 이론에서 어떤 문장을 참으로 상정하는지, 그리고 이에 따라 어떠한 존재자의 존재성을 개입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가? 콜리반(Colyvan 2019)과 같은 실재론자들은, 불가결성 논변이 성립하기 위해 수학적 대상들이 단순히 불가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설명적으로 불가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위의 불가결성 논변을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Q1) 우리는 최선의 과학 이론에 설명적으로 불가결한 모든 대상들을, 그리고 오직 그 대상들만을 존재론적으로 개입해야 한다.(Q2) 수학적 대상들은 최선의 과학 이론에 설명적으로 불가결하다.(C) 따라서 우리는 수학적 대상들을 존재론적으로 개입해야 한다.앞서 언급된 단지 유용할 뿐인 거짓 가정 등은 그것이 거짓인 만큼 어떤 의미에서 설명적으로 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수정된 논변의 반례가 될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렇게 수정된 논변에 대해선 (Q2)가 (P2)만큼은 자명하지 않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즉, 수학이 과학적 설명에서 표상의 도구 등으로서 최선이라 할지라도, 설명적으로 불가결한지(혹은 애초에 설명적 역할을 하기는 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런데 이때, 만일 경험적 현상에 대한 진정한 수학적 설명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현상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과학 이론에 있어 수학적 사실이 설명적으로 불가결하다는 명제가 확립될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수학적 설명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이 수정된 논변의 (Q2)를 확립하는 것처럼 보인다.3. 수축적 유명론의 전략  본고는 진정한 수학적 설명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옹호하기 때문에, (P2) 또는 (Q2)를 거부하기 어렵다. 일단 수학이 경험적 현상에 대한 설명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인정한다면, 그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과학 이론이 어떻게 변화하건 수학의 필연성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수학적 설명은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니(Azzouni 2004)와 부에노(Bueno 2020) 등에 의해 발전된 “수축적 유명론”은 수학의 설명적 역할을 거부하기보단 (P1) 또는 (Q1)을 거부함으로써 불가결성 논변읠 결론에 반대한다. 수축적 유명론의 통찰은, 일상언어에서 ‘어떤(some)’과 같은 존재양화사가 변항들을 양화할 때, 물론 이것이 주어진 영역의 대상들의 존재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종종 존재성에 대한 함축 없이 셈의 도구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어떤 허구의 도적은 나라를 세웠다”라거나 “어떤 허구의 탐정은 베이커 가(街)에 산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우, 이 문장들에 나타나는 양화사 ‘어떤’은 존재론적 함의를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수축적 유명론은 이러한 통찰을 과학언어로 확장한다. 즉, 최선의 과학 이론에서 어떤 대상이 양화되는 경우라도, 그러한 사실이 그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개입을 곧장 함축하지는 않으며, 존재양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존재론적 개입과 구분되는 “양화사 개입”이라고 본다. 물론 수축적 유명론자들이 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개입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이론이 어떤 존재론적 개입을 갖기 위해선 단순히 어떤 존재자를 존재양화할 것 이상을 요구한다. 그리고 수학적 대상들이 이러한 요구조건을 만족하지 못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의미론에 있어서, 수축적 유명론은 수학적 문장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진릿값을 보존하면서도, 단지 존재양화사가 그 자체로 존재론적 함축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어떤 대상이 존재론적으로 개입될 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적용되는 존재 술어 를 도입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수학적 대상들에 대해 이러한 존재술어는 적용될 수 없다. 이를테면, 문장 ‘어떤 는 정삼각형이다’가 최선의 과학 이론에 불가결하다고 가정해보자. 술어 ‘~는 정삼각형이다’를 로 적으면, 이에 대한 가장 원초적 번역은 ‘’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때 양화사 개입과 존재론적 개입을 구분하고 후자를 나타내기 위해 존재 술어 를 새롭게 도입해야 한다면, 실재론자들은 불가결성 논변을 성립시키기 위해 ‘어떤 는 정삼각형이다’를 ‘’라고 번역하고 이를 참이라고 해야 한다. 반면 수축적 유명론자들은 ‘어떤 는 정삼각형이다’를 ‘’라고 번역하고 이를 참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나는 실재론자들 역시 수축적 유명론이 주장하는 양화사 개입과 존재론적 개입 간의 구분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직전 문단의 문장들을 다시 가져오자면, 만일 이러한 구분이 받아들일 만하다면 이는 실재론자의 입장에서도 ‘’가 ‘’와 동일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는 다시, ‘어떤 는 정삼각형이다’의 번역이 ‘’과 ‘’ 사이에서 미결정 상태에 있는 한, ‘어떤 는 정삼각형이다’의 불가결성으로부터 수학적 실재론을 배타적 귀결로 가질 수 없음을 말해줄 것이다.4. 존재론적으로 중립적인 양화사 도입의 정당성  나는 수학적 대상이 비-시공간적 추상체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적 실재론과, 산술이나 기하학의 용어들이 개별자들 안의 모종의 보편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실재론을 각각 검토하여, 이 두 종류의 실재론이 모두 위와 같은 양화사 개입/존재론적 개입의 구분을 받아들일 만한 좋은 이유가 있음을 주장한다.  먼저 플라톤주의적 실재론과 관련하여서, 플라톤주의자들이 수학적 대상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는지 살펴보자. 내가 보기에, 플라톤주의자들은 설령 그들이 수학적 대상의 존재성을 믿더라도, 그러한 대상들에 대해 존재론적 개입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 가지 예비사항은, 플라톤주의자들이 대체로 수학적 대상들에 대한 접촉 불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다음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철수는 홍길동은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믿지만, 산타클로스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철수는 이 두 인물과 모두 접촉할 수 없다. 이때 철수가 믿기로, 홍길동과 접촉 불가능한 이유는 그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 반면, 산타클로스와 접촉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가 절대로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더러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가령 누군가 이 두 인물의 인상착의에 대해 묻는다면, 철수는 이들 각각에 대해 이러저러한 인상착의를 하고 있다고 답변할 것이다. 이때, 두 대상에 대한 철수의 믿음 내용은 모두 각 대상의 존재성과는 무관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얻어진 것이다. 분명히, 철수가 홍길동이 이러저러한 인상착의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진술에 있어서 명제 태도는 홍길동의 존재 믿음을 개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철수가 산타클로스의 인상착의에 관해 진술할 때 반드시 산타클로스에 대한 존재 믿음을 개입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게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인상착의에 관하여서 만큼은, 홍길동에 대한 믿음과 산타클로스에 대한 믿음이 위에서 보였듯 동일한 방식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수는 산타클로스의 인상착의에 관해 말할 때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음에도) 산타클로스에 대한 존재 믿음을 개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철수의 산타클로스에 대한 태도는 플라톤주의자들의 수학적 대상에 대한 태도와 다르지 않다. 즉, 문제시되는 대상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고 그에 대해 이러저러하다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러한 믿음들은 대상과의 접촉에 의존하지 않고 형성된다. 이제, 위에서 검토한 나의 직관이 옳다면, 철수가 산타클로스에 대해 존재론적 개입이 없이 말하듯, 수학적 대상들에 대해 동일한 태도를 취하는 플라톤주의자들은 그것에 대해 존재론적 개입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다면, 플라톤주의자들 역시 이러한 언어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양화사 개입/존재론적 개입 구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실재론과 관련하여선, 이에 대해 제기되는 비판을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실재론에 대해 제기되는 전통적 비판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그들에 따르면) 보편자인 수학적 대상들을 개별자들 안에서 찾기 때문에, 어떤 수학적 속성이 예화되지 않는 경우 그에 대한 존재론적 지위에 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화사 개입과 존재론적 개입의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실재론에 이러한 문제에 손쉽게 답할 수 있는 한 가지 해명을 제공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단지 보편자로서 예화된 수학적 대상에 대해 존재 술어가 적용될 수 있는 반면 예화되지 않은 수학적 대상에 대해서는 그것이 양화되더라도 존재 술어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때 예화되지 않은 수학적 대상에 대해선 존재 술어를 적용할 수 없으므로, 어떤 닫힌 문장에서 그러한 수학적 대상이 언급되더라도 존재론적 개입이 동반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문장은 여전히 참일 수 있다. 이 경우, 예화되지 않는 수학적 대상들을 언급하는 진술의 진릿값을 보존하면서도, 분명히 예화된 대상들에 대하여선 실재론을 견지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접근은 적어도 일부 수학적 대상들에 대해 존재술어 가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양화사 개입/존재론적 개입 기준은 수축적 유명론자가 갖게 되는 기준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기준을 수축적 유명론의 기준보다 더 선호해야 할 이유가 주어지지 않는 한에서, 우리는 양화사 개입/존재론적 개입 구분이 수학적 설명의 옹호로부터 수학적 실재론을 강제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수학적 실재론의 어느 입장에서건 양화사 개입/존재론적 개입의 구분을 받아들일 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렇다면 앞 절에서 검토한 수축적 유명론은 가능한 옵션일 것이며, 따라서 적어도 진정한 수학적 설명이 존재한다는 입장으로부터 수학적 실재론이 배타적 결론으로서 따라오지는 않는다.5. 수학적 설명과 유명론 사이의 긴장  수학적 설명의 존재론적 중립성에 대한 두 번째 위협은 진정한 수학적 설명에 대한 유명론자들의 명시적 거부이다(Bueno 2013). 내가 보기에, 이러한 태도는 설명 개념에 대한 특정한 관점과 수학적 유명론 사이의 양립불가능성에서 연원한다.수학적 설명에서 수학이 설명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건 그렇지 않건, 수학은 경험과학의 탐구영역에 적용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은 설명을 요구한다. 그리고 수학적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유명론자들은, 경험적 영역과 수학의 형식적 체계(또는 수학적 허구) 사이에 모종의 구조-보존적 대응 관계를 상정함으로써 이를 설명하려 한다. 이러한 전략은 흔히 “표상주의(representationalism)”라고 불린다(Strevens 2018). 이에 따르면, 경험과학에서 수학의 언어들은 어떤 존재자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적절한 물리적 대상들 사이 관계를 표상하는 (간편하고 정확한)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상주의는, 진정한 수학적 설명이 존재한다는 주장과 긴장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설명의 개념에 대한 존재적 관점이 흔히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존재적 관점에 따르면, 과학적 설명에서 설명적 관계란 표상이나 개념들 사이의 관계라기보단,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실이나 대상들 사이의 관계이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설명 이론을 택하느냐에 따라, 설명항과 피설명항의 (반사실적) 의존관계 관한 사실, 혹은 피설명항의 발생과 관련된 인과 메커니즘 그 자체와 설명이 동일시된다.일상적 사용에서 ‘설명’이라는 용어는 모종의 언술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존재적 관점을 둘러싼 논의에서 입증의 부담은 우선적으로 그 옹호자들에게 있다. 존재적 관점의 옹호자들은 이를 다음의 세 단계를 통해 보인다.(1) 사실의 문제로서, ‘설명’은 애매하게 사용된다. 가령 “철수는 영희에게 자신이 지각한 이유를 설명했다”라고 말할 때, ‘설명’은 어떤 언술행위를 의미한다. 반면, “달의 중력이 조수간만의 차를 설명한다”라고 말할 때, ‘설명’은 사물이나 사실들 사이의 어떤 관계를 의미한다.(2) 바로 앞의 예에서 보이듯, 설명 개념이 갖는 의미의 한 가지는 바로 존재적 관점에서 주장하는 그러한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설명 개념의 한 차원은 설명항과 피설명항에 해당하는 객관적 사실들의 결합으로 이해될 수 있고, 이러한 이해에서 설명은 외부세계에 존재한다.(3) 존재적 의미에서 설명은 그것과 반대되는 인식적 의미의 설명에 대해 우선한다. 이 주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3a) 인식적 설명에 해당하는 활동이나 표상 따위는 존재적 차원의 설명 관계에 대한 기술에 불과하며, 따라서 ‘설명’의 인식적 의미가 존재적 의미에 개념적으로 의존한다(Salmon 1989). (3b) ‘설명’의 인식적 의미와 존재적 의미 사이에 개념적 우선성은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주어진 인식적-설명이 성공적인지에 대한 평가가 관련된 존재적-설명을 정확히 포착해내고 있는지에 의존하기 때문에, 설명의 개념을 다룸에 있어 존재적 차원의 설명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규범적으로 우선시된다(Craver 2014).만일 이러한 존재적 관점의 논변을 받아들인다면 표상과 같은 인식적 도구는 그것과 독립적으로, 그에 앞서 존재하는 존재적 의미의 설명적 관계에 대한 기술에 지나지 않으며, 인식적 도구 그 자체는 현상을 (존재적 의미에서)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표상주의는 수학이 바로 이러한 인식적 도구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표상주의의 입장과 존재적 관점을 결합할 때, 수학은 존재적 의미에서 설명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 한다.6. 설명에 대한 인식적 관점  그러나 우리는 과연 존재적 관점을 받아들여야 할까? 설명 개념에 대한 인식적 관점을 취하는 이들은 위와 같은 결론에 불만을 나타낼 것이다. 먼저 인식적 관점의 완강한 입장은 존재적 관점의 논제 (1)을 거부한다. 가령 라이트(Wright 2012)는 언어학에서 사용되는 애매성 검증 기법들을 사용하여, (적어도 영어에서) ‘설명’이라는 낱말이 애매하게 사용되고 있지 않음을 보인다. 그리고 언뜻 ‘설명’이 애매하게 사용되고 있는 듯 보이는 현상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애초에 ‘설명’이라는 용어는 어떤 외적 관계를 지시하기 위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으며, “달의 중력이 조수간만의 차를 설명한다”와 같은 문장은 기실 “달의 중력에 관한 모형이나 표상 등이 조수간만의 차를 설명한다”라는 진술을 의사소통적 편의를 위해 축약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크레이버(Craver 2014)는 라이트의 지적이 논제 (1)을 거부할 이유라기보다는, 기껏해야 논제 (3a)의 개념적 우선성 주장을 거부할 이유라고 생각하고 (3b)의 규범-적 우선성 주장으로 선회한다. 그에 따르면, 이를테면 우리는 “과학의 목표는 현상들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것인데, 만일 ‘설명’의 존재적 의미를 전적으로 거부한다면 인식주체와 독립하여 미발견 상태에 있는 어떤 것을 ‘설명’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라이트의 지적을 고려하더라도 이것은 ‘설명’의 두 의미가 서로 독립적임을 보여줄 뿐이라고 본다.  나는 크레이버가 제시하는 문장에서 ‘설명’이라는 단어가 ‘이유’나 ‘원인’과 같은 단어에 대한 환유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설령 ‘설명’의 존재적 의미를 받아들이더라도, (3b)의 규범적 우선성 주장조차도 일반성을 갖춘 설명에 대해선 적용될 수 없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쉐레도스(Sheredos 2016)의 지적을 보자. 먼저, 과학자들이 어떤 모형을 통해 현상들을 일반적으로 설명한다고 할 때, 이러한 설명이 적용되는 현상들은 오직 가족유사성을 지닐 뿐이며, 모형은 이들 전부와 들어맞진 않는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어떤 설명이 특정한 적용범위를 갖는다고 할 때, 그들은 그러한 적용범위 안의 현상들을 범주화하는 표상을 미리 가져야만 한다. 즉, 일반적 설명은 현상들을 범주화하는 표상과 같은 인식적 도구들에 의해 규제된다.  반면, 일반적 설명에서 설명이 외부 사물들 사이의 관계(곧, 존재적 의미에서 설명적 관계)에 대응하는지 여부는 설명에 대한 평가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규범적 우선성 주장이 옳다면, 어떤 일반적 설명을 외부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의 대응 여부에 의해 평가하고자 할 때, 주어진 일반성에 대한 대응물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설명에서 일반성은 술어에 의해 나타나며, 이러한 술어는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들의 외연으로 대체될 수 없다. 따라서 규범적 우선성의 옹호자들은 일반성을 플라톤적 순수 형식이나, 또는 보편자 따위에 대응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 전자의 경우는 비-시공간적 추상체가 어떻게 시공간상의 현상의 발생에 관여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악명 높은 문제에 직면한다. 후자의 경우, (3b)의 규범적으로 우선성 주장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크레이버의 주장에 따른다면 외적으로 존재하는 설명적 관계를 포착하는 것이 성공적 설명을 위한 초석이 되어야 하지만, 보편자 실재론에 따른다면 오히려 “일반적이고 체계화된 [인식적 의미의] 설명을 제공함에 있어서 거두는 우리의 인식적 성공이 그것들에 대응하는 [존재적 의미의] 설명으로서의 보편자들을 상정하기 위한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Sheredos 2016, p. 936). 따라서 일반성을 갖는 설명은, 우리가 동일한 표상을 적용하는 대상들 간의 관계에 대한 동일한 설명의 경험적 적합성과 같은 인식적 성공에 의해 평가받아야 한다.  존재적 관점의 옹호자들 역시, 어떤 현상이 발생하기까지의 완전한 경로를 기술할 수는 없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성공적인 인식적-설명이란 그에 대응하는 존재적 대응물을 총망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설명적으로 유관한 사항들에 선택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선택된 사실이 설명에 유관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카트라이트(Cartwright 1980)의 지적처럼, 우리는 대체로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이라는 단서와 함께 주어지는 일반법칙을 적용하여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현상들이 어떤 이상화된 현상과 유사하다고 “결정”해야 한다. 이어지는 절에서 나는 이러한 결정의 작업이 대상이나 사실들 간 설명적 관계를 성립시키는 필요충분조건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표상의 적용이 설명적이라고 논한다.7. 표상의 설명적 역할과 수학적 설명  인식적 관점을 수용한다면, 표상주의나 유명론적 입장에서 수학적 대상들의 존재성을 거부하더라도, 수학적 표상은 일반성을 갖춘 수학적 설명에서 그러한 설명의 적용범위를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수학적 표상이 대상들을 범주화하는 한에서 주어진 수학적 설명의 적용범위를 규제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제적 기능은, 피설명항으로서 주어진 현상을 범주적으로 표상하고, 주어진 표상 내에서 무엇이 그 현상에 대한 설명과 관련된 특성들인지를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수학적 설명을 진정한 설명으로 만들어준다.  이것은 수학적 표상이 주어진 물리적 현상에서 설명적으로 관련된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make it intelligible)는 기존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수학적 표상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줌의 기능을 설명적 기능으로 보아야 할지에 관한 의견의 불일치가 있다. 가령 도라토와 펠린(Dorato and Felline 2009)은 수학적 설명에서 수학적 모형과 피설명항이 되는 물리적 체계 사이의 구조-보존적 동형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모형의 수학적/형식적 특성이 갖는 설명적 성격은 바로 그러한 동형성이 모형을 통한 대용 추론을 가능케 해준다는 데에서 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바란테스(Barrantes 2020) 등은 이와 동일한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줌의 기능이 수학적 설명에서 수학의 역할이 도구적일 뿐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여긴다. 즉, 수학적 설명에서 수학적 표상은 그러한 대용 추론을 통해 어떠한 물리적 사실이나 대상이 설명항인지를 식별할 수 있게 도와줄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양측이 설명 개념이 애매하게 사용되고 있거나, 적어도 양쪽 모두 인식적 설명 개념을 간과했다고 진단한다. 설명 개념에 대한 존재적 관점을 전제하는 한에서, 바란테스의 직관은 옳다. 만일 존재적 관점의 주장처럼 설명적 관계가 외부 사물들 사이의 관계라면, 수학적 설명은 물리적 피설명항을 (유명론자의 입장에서) 물리적 설명항과 연결하거나 (실재론자의 입장에서) 추상적 설명항과 연결해야 한다. 곧 유명론을 전제하는 현재의 논의에서, 수학적 설명에 나타나는 수학적 표상은 물리적 대상 또는 사실들의 관계를 추론하기 위한 대용물일 뿐이다.  하지만 설명 개념에 대한 인식적 관점을 취한다면, 일반성을 갖춘 설명으로서의 수학적 설명은 설명적 관계를 표상이나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표상이나 개념의 내용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식주체에 의해 구성되는 차원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수학적 표상의 역할은 단지 물리적 대상이나 현상들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어떤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즉 내가 주장하기로, 적절한 수학적 표상들을 설명항에 적용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그렇게 적용된 표상 그 자체나 표상들 사이의 관계를 피설명항에 대한 적절한 표상으로 결정할 수 있는 한에서, 설명항과 피설명항 사이의 설명적 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가령 서론에서 언급하였던 딸기 균등 분배의 실패에 관한 설명을 보자. 설명에 대한 인식적 관점을 받아들이면, 특정한 양의 딸기와 사람들이 주어졌다는 사실과 균등 분배가 실패한다는 사실 사이에 외적으로 성립하는 설명적 관계와 같은 것은 없다. 이들 사이의 설명적 관계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것을 결정할 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성립한다. 첫째, 각각 3과 23이라는 수학적 표상이 주어진 사람들과 딸기들의 상태를 적절히 표상한다. 둘째, 이 표상들 사이에 23이 3으로 나누어떨어지지 않음이라는 관계가 성립한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 다시 이러한 관계가 균등 분배 실패의 상황을 적절히 표상한다.결론적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즉, 설명항에 이러저러한 수학적 표상들을 적용할 수 있고 피설명항에 그러한 표상들 사이에 성립하는 어떤 관계의 표상을 적용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때에만, (인식적 의미의) 수학적 설명이 성립한다. 이때 그러한 표상들 사이의 관계가 주어진 한에서, 각각의 수학적 표상들을 설명항과 피설명항에 적용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이러한 관계가 성립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따라서 설명항에 대한 수학적 표상의 적용은 자동적으로 수학적 설명이 인용하는 그 관계를 피설명항에 적용시킨다는 의미에서, 설명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수학을 단순히 물리적 사실들에 대한 표상의 형식이라고 주장하는 유명론 및 표상주의에서도 수학이 설명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8. 맺음말  논문의 전반부에서, 나는 과학에서 수학이 설명적으로 불가결하다는 주장을 옹호하지만, 그러한 수학적 문장들이 수학적 대상들에 대한 존재론적 개입을 항상 동반한다는 데에 반대하여, 수학적 실재론자들 역시 수학적 문장이 존재론적 개입을 동반하는 방식으로도,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도 말해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논문의 후반부에서, 나는 언뜻 보기에 유명론 및 표상주의와 진정한 수학적 설명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양립하기 어려워 보인다는 문제를 다루었다. 나는 이들 사이의 긴장에 설명에 대한 존재적 관점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것에 반대하는 대안적 관점인 인식적 관점을 옹호하였다. 이것이 인식적 관점과 존재적 관점 사이의 논쟁을 끝내기에 충분치 못 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관점에서 표상의 도구로서 수학이 설명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따라서 유명론 및 표상주의와 수학적 설명을 화해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수학적 유명론자가 그 자신의 존재론만으로는 수학적 설명을 거부하기에 충분치 못 함을 보여준다.  이상을 종합하여, 나는 진정한 수학적 설명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수학적 대상에 관한 특정한 존재론적 견해에 의존적이지도 배타적이지도 않다고 결론 내린다.참고문헌Azzouni, J., 2004, Deflating Existential Consequen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Baker, A., 2005, Are there Genuine Mathematical Explanations of Physical Phenomena?, Mind 114(454): 223 – 238.Barrantes, M., 2020, “Explanatory Information in Mathematical Explanations of Physical Phenomena”, Australasian Journal of Philosophy 98(3): 590 – 603.Bueno, O, 2013, An Easy Road to Nominalism, Mind 121(484): 967 – 982._____, 2020, Nominalism in the Philosophy of Mathematics,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Edward N. Zalta (ed.)).Cartwright, N., 1980, The Truth Doesn’t Explain Much,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17(2): 159 – 163.Colyvan, M., 2010, There is No Easy Road to Nominalism, Mind 119(474): 285 – 306._____, 2019, Indispensability Arguments in the Philosophy of Mathematics,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Edward N. Zalta (ed.)).Craver, C. F., 2014, The Ontic Account of Scientific Explanation, in: Explanation in the Special Sciences: The Case of Biology and History(Kaiser, M. I., Scholz, O. R., Plenge, D. and Hüttemann, A. (eds.)), Berlin: Springer Verlag: 27 – 52.Dorato, M. and L. Felline, 2009, “Scientific Explanation and Scientific Structuralism”, in: Scientific Structuralism(Bokulich, A. and P. Bokulich (eds.)), Boston Studies in Philosophy of Science: 161 – 176.Salmon,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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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호 (2023년 3월) 인터뷰 철학, 이 공부의 끝은 어디인가? 

    새로운 해의 두 번째 달이 차오를 즈음, 경상국립대 철학과에서 서양 프랑스 현대 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겨울에는 스노우보드 타는 것을 즐기며 살아가는 박대윤 선생과 인터뷰를 가졌다.인터뷰어 │ 학부와 대학원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박대윤 │ 학부 시절에는 학업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주로 학우들과 어울리며 신나게 놀았어요. 그렇게 잘 어울려서 놀다가 한 학기를 남기고 휴학해서 집에서 놀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너 뭐 하냐?’ 라고 하시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가정의 불화를 막기 위해서(웃음)  취업을 했습니다. 제가 일한 곳은 토목회사 하청인데, 제가 한 거는 고속도로 터널 공사인데요. 그 터널을 만들기 위해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려서, 제가 직접 하는 건 아니고(웃음), 폭파 후 미리 설치해 놓은 이완 측정 장치들을 보고 터널 크기가 변형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점검하는 거였죠. 그런데 질문이 뭐였지죠? (큰 웃음) 아! 그래서 토목회사에 다니면서 일을 하다가 어떤 회의감이, 현타라고 해야 되나?, 회의감이 들어서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 하고서는 학교로 돌아왔고, 졸업 후 철학과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원을 다닐 때, 철학과 대학원이 약간 부흥기라고 할까요? 제가 들어와서 그런 게 아닌가(웃음), 인터뷰어 │ 직장생활을 하시면서 회의감이 든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박대윤 │ 거기서 즐거운 일도 많았죠. 학교에만 있다가 이제 일을 하니까 벌이가 생기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까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겠다, 뭐 이런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그때 아는 분이 스키장에 한번 가보자고 해서 스노우보드를 처음 타보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뭐가 문제였냐면, 어떤 직장 내에서의 위계, 시공사와 원청 그리고 하도급 업체 사이에는 위계 관계가 있어요. 저희는 하도급 업체였고, 그런 위계 관계로 인해 일어나는 어떤 비상식적인 일들,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비합리적인 일들을 마치 늘 상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부조리들에 적응 못 하면 사회생활을 잘 못하는 사람들로 취급되고, 말이 안 되거나 거의 뭐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해내야만 하는 역할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너무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까 술로 연명하고.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다가 ‘내가 공부를 좀 해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요. 제가 비록 학부에서는 놀기만 했지만(웃음), 이런 것들을 잘 이해하는 분야가 철학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다시금 학교로 돌아오게 됐습니다.인터뷰어 │ 사회학이나 정치경제학을 선택하실 수도 있었는데 굳이 철학을 선택하신 이유가 뭔가요?박대윤 │ 만약에 학부를 철학과로 나오지 않았다면, 혹은 철학을 몰랐다면, 사회학으로 갔겠죠. 근데 학부를 철학과로 다니면서, 철학이라는 게 어떤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가장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뭐 그런 생각을 어렴풋하게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당시 ‘사회학보다는 철학이 이런 부분을 더 잘 다룰 수 있겠다’ 그런 생각했던 거죠. 아직 내가 공부를 안 해서 모를 뿐이지 뭔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공부를 해나갔는데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생각의 방식이나 관점들을 수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철학자는 이렇게 문제를 다루고, 저 철학자는 저렇게 문제를 다루고 하는 다양한 접근법들에 대한 경험이 쌓이다 보니까 어떤 깊이를 가지게 된 건 아닌가, 곧 깊게 파기 위해서 넓게 판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이제는 예전과 다르게 어떤 문제를, 그 사태 자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역량을, 아직 좀 미진할 수도 있겠지만, 과거에 비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신체가 됐다고 할까요? 정신이 됐다고 할까요?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너무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깊이를 가진 사람 혹은 넓게 보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그런 역량을 키우는 것이 철학이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인터뷰어 │ 프랑스 현대 철학이 전공이라고 하셨는데요. 구체적인 연구 분야랑 현재 관심사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박대윤 │ 구체적인 연구 분야는 프랑스 현대 존재론과 윤리학 혹은 정치 철학입니다. 현재 관심사는 정치 철학, 특히 주체의 윤리 문제입니다. 지금은 이것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어서 데이비드 흄과 들뢰즈의 저작들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인터뷰어 │ 전공을 선택하게 된 과정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박대윤 │ 처음에는 칸트와 후설의 합리성에 기반한 설명이 너무도 탁월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칸트와 후설의 인식론에 좀 심취했었습니다. 그러다가 학교로 다시 돌아온 4학년 2학기때 신지영 교수님의 구조주의 수업을 들었는데요. 그때 제가 한참 부조리, 사회 구조, 사회는 왜 이리 썩었나, 뭐 이런 거에 꽂혀 있었잖아요? 경제적 문제, 경제 구조 그런 것들에 대한 어떤 불만, 이런 것들로 꽉 차 있던 터에 구조주의 수업을 들으니 미셸 푸코로 관심이 돌려진 거죠. 그래서 프랑스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일단 신지영 교수님 밑에서 학부졸업 논문을 썼잖아요? 그러면 석사는 자동으로 자연스럽게 들뢰즈를 공부하게 되었는데요. 그의 글이 상당히 난해한 거예요. 이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자꾸 들면서 겉돌기만 했습니다. 들뢰즈 저작은 읽을 수가 없으니까 상당히 오랫동안 철학사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특히나 들뢰즈가 주로 참조하는 철학자들을 공부했는데요. 그 중에서 스피노자를 공부할 때는 논문을 한 편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스피노자 공부할 당시에는 한 반년 정도 진짜 집중하면서 온전히 스피노자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논문이 나름 괜찮았는지 학술상을 받았습니다.(웃음) 제가 어떤 새로운 발견을 했다기보다는 들뢰즈의 설명을 차용해서 쓴 논문이었는데, 아무튼 그 논문을 쓰고 난 이후 약간 자신감이 붙었다고 해야 하나, 거기에다 또 일이 잘 풀리면서 한국연구재단 연구비 지원도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 동안 점점 더 생각이 넓어진다기보다는, 약간 깊어지는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야 들뢰즈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게 사실 다 우연이잖아요? 우연에 의한 사건에서 비롯된 거지만 너무 만족스러운 결과에 도달했다 이렇게 정리하고 싶네요.(웃음) 인터뷰어 │ 자신에게 들뢰즈 철학의 매력은 무엇인가요?박대윤 │ 철학에 대해 아까와 같이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은 들뢰즈 때문인 것 같아요. 철학사를 연구하는 그의 방식도 그렇고, 들뢰즈의 철학을 대하는 태도, 혹은 철학에 대한 들뢰즈의 규정, ‘철학은 개념의 창조다’라면서 들뢰즈가 플라톤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플라톤의 이데아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 조금만 변형을 가하면 하고요. 철학사를 통해서 앞선 개념에 대해 연습하면서 철학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거죠. 그러고 나서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개념으로 철학을 하게 된다는 건데, 이런 들뢰즈의 태도, 철학사를 보는 접근 방식, 이런 것들이 저에게 어떤 모델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과거의 철학자들은 항상 손해를 보는 게, 후대의 철학자들은 이제 과거의 철학자들을 안 좋은 점, 혹은 부족한 점 이런 것들을 비판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현대에 나온 철학자들이 더 뛰어나냐, 뭐 그런 거는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아무튼 제 생각에 들뢰즈는 어떤 가상의 상황을 가정해 놓고 하는 그런 추상적인 설명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실제적이지 못한 혹은 현실적이지도 못한 그런 설명, 혹은 현실적인 부분만 얘기하는 그런 설명들은 구멍이 너무 성근 그물같다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예를 들면 제가 경험했던 부조리한 토목회사 생활은 사실 어떤 사회의 큰 시스템 안에서,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부조리한 지시를 해야만 하는 사람부터 지시를 따라야 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다, 하나의 시스템 내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면서 고통받고 있었잖아요. 그때 던졌던 질문들, 사회 내에서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 왜 사람들은 이렇게 고통받으면서 살고 있는가? 이런 것들은 어떤 구조적인 설명 혹은 철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들뢰즈가 『안티 오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에서 이런 것과 관련해서 부분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들뢰즈에게 정치 철학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스피노자가 과거에 했던 질문인데요, “왜 다수의 사람들은 노예가 되기를 스스로 욕망하는가?” 제가 만났던 토목회사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일을 하고, 스트레스를 술로 풀면서 참고 일을 하는 거, 저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던 모든 것이, 들뢰즈가 보기에는 사람들 스스로 욕망하고 있다는 거죠. 저는 들뢰즈의 이러한 설명에 공감이 갔고, 그리고 이러한 진단 다음에 이 사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잘 설명해 주고 있기에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인터뷰어 │앞으로 어떤 학문적 목표가 있으신지요? 박대윤 │ 공부하다 보니까, 또 일반 대중들과 같이 스터디를 하다가 든 생각인데요. 그분들이 함께 철학을 공부하면서 자유를 얻게 되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분들이 얻었다고 하시니까(웃음), ‘내가 공부한 것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구나!’ 하며 보람을 느꼈습니다. 매우 어려운 길이긴 하지만 사람들 생각의 폭을 넓히고, 그걸 통해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것이 개인적인 어떤 연구를 하는 것보다는 저의 일차적인 목표가 아닌가 싶네요.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연구를 잘해서 좀 더 깊은 내용들을 전달할 수 있어야겠지요. 저는 철학을 마냥 쉽게만 전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교양 수준에서 겉핥기식 접근으로는 절대 들뢰즈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좀 어렵더라도 어려운 거는 어렵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게 더 의미 있다고 보기 때문에, 좀 더 긴 시간을 들여서 대중들에게 이 내용들을 전달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인터뷰어 │ 후배들한테 해주고 싶은 조언 같은 게 있으면 들려주세요.박대윤 │ 예전에는 모든 사람이 철학을 할 수 있다 뭐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요즘 드는 생각은 ‘철학이라는 게 우선은 자기랑 맞아야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꼬치꼬치 따져 묻고, 근본적인 질문을 해서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하고 짜증 나게 하는 그런 일들은 자기랑 맞아야지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하니까, 왜냐하면 책을 많이 읽지 않으면 특히 수업 시간에 이상한 헛소리를 하게 되고(웃음), 그러면서 이제 말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왜냐? 이상한 소리를 하면 이제 교수님이 뭐라 하기 때문이죠.(큰 웃음) 게다가 수업과 관련 없는 책들도 계속 읽어야 하니까 힘들어요.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면 점점 시간이 쌓이면서 어느 정도 알게 되고 그때부터 재미있어지는데, 거기까지 가는 게 좀 힘든 거죠. 이게 다가 아니에요. 도대체 이 공부의 끝은 어디인가? 답도 안 보이고 미래가 안 보이는 게 큰 문제죠. 이게 끝이 없는 공부니까요. 왜냐하면 다른 학문은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나면 이제 끝이구나 할 수도 있는데, 이거는 끝이 없잖아요?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고 연구도 계속하는데 끝이 없어, 그러다 보니까 이제 허망함이라고 할까 그런 것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퇴하거나 중도 포기하는 친구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웃음) 또 힘든 일은, 하루가 너무 짧다 그게 힘든 일이에요. 책을 읽는데 24시간이 너무 짧아서 힘들다.(웃음) 그래서 저는 철학과에 온 일을 후회하고 있어요. 만약에 안 왔다면 얼마나 편한 인생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농담이고요. 후배들에게는 어차피 이왕 학교에 들어왔으니, 시간을 들여서 제대로 공부에 도전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열심히 해 보고, 그래도 안 맞으면 그때는 그만두면 되지만,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해되면서 재미가 생기니까 그때까지 잘 참아보시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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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호 (2023년 3월) 리뷰 환경에 대한 개념들, 그리고 남겨진 문제  

    환경에 대한 개념들, 그리고 남겨진 문제문성균의 「생명체의 '환경'(milieu)과 들뢰즈의 '문제' 개념」에 대한 논평김주희 독립연구자  생명 및 생명체의 개념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그것들과 내재적으로 관계하는 ‘환경’ 개념에 대한 논의와 이해가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논문의 필자는 생명체의 ‘환경’ 개념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논구할 목적으로, 대표적인 생성(devenir) 철학자인 들뢰즈의 철학 안에 나타난 ‘문제’ 개념과의 중요한 연관성을 다루고 있다. 환경 개념의 ‘과학적’ 의미와는 다른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심급에서의 ‘철학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필자는 우선적으로 생명체들에 관한 과학으로서의 생물학적 논의로부터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이러한 생물학적 논의는 라마르크의 이론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데, 여기서 ‘환경’이란 힘을 운반하는 매체로 개념화된 뉴턴 역학적인 의미에, 생명체의 조직화를 추동하는 인과성이라는 의미가 더해진 것으로 파악된다. 라마르크의 이론에서 생명체의 조직화는 서식 환경에 의해 인과적이고 수동적인 방식으로 조건화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라마르크의 이론에 맞서는 주장으로, 이어서 윅스퀼의 입장이 소개되고 있다. 필자는 윅스퀼의 ‘환경(milieu)’과 ‘주위(environnement)’의 주의 깊은 구별에 주목하면서, ‘환경’이란 생명체가 자신의 고유한 지각과 행동을 전개하면서 ‘주위’로부터 선별적으로 뽑아낸 부분이라는 점을 설명하며 ‘환경’ 개념이 갖는 보다 세밀하고 능동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라마르크와 윅스퀼의 두 가지 상반된 입장에서 생명체는 하나의 수동적 ‘사물’인가 아니면 하나의 능동적 ‘주체’인가를 선택받아야 할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 필자는 이러한 양자택일의 상황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이 두 가지 입장이 모두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인식만을 제공할 뿐인 과학적 개념화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생명체와 환경에 대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식을 궁구할 수 있기 위한 제3의 길로 들뢰즈의 철학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안내한다.  들뢰즈의 철학을 설명하기에 앞서 필자가 라마르크에서 윅스퀼로 이어지는 생물학 안에서의 ‘환경’ 개념의 변천을 설명한 것은, 생물학적 ‘환경’ 개념보다 들뢰즈의 ‘문제’ 개념이 갖는 더욱 심층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방법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윅스퀼의 논의에서 희미하게 파악된 ‘마주침’이라는 개념이 들뢰즈의 ‘기호(signe)’ 개념과 연결되어 서술되면서, 들뢰즈 철학의 ‘문제’ 개념이 생물학의 상대적인 ‘환경’ 개념에 국한되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의미를 사상하지도 않는, 따라서 더욱 심도 깊은 지평으로 확장되면서도 구체성을 결여하지도 않은 매우 적합하고 명징한 맥락에서 전개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들뢰즈 철학 안에서의 ‘기호’ 개념이 ‘마주침의 대상’으로 파악되고, ‘기호’란 그러한 마주침이 발생하게 되는 비대칭적이고 이질적인 전체적 체계로서의 ‘신호(signal)’ 안에서 생겨난 하나의 효과(effet)로 설명되면서, 생명체가 마주하게 되는 ‘환경’은 이중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어떠한 효과를 발생시키는 현실화의 역량을 지닌 ‘환경-신호’와, 그러한 환경-신호들과의 강도적 마주침으로부터 실제적으로 현실화된 ‘환경-기호’가 그것이다. 이러한 환경의 이중적 구도는 다시 들뢰즈의 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구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잠재성’과 ‘현실성’의 구도로 연결된다. 들뢰즈에게서 생명체와 환경이 서로 다른 고정된 두 항으로서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끝없이 변이 가능한 하나의 연결된 과정으로서 그려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잠재적이고 문제적인 차원과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차원에 해당하는 이 두 심급이 끊임없는 생성의 변주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환경의 이중성을 언급하며 잠재성과 현실성의 연관 구도를 연결 지은 것은 매우 적확하고 타당한 설명이라 하겠다.   앞서 보았듯이 들뢰즈의 철학 안에서 ‘환경’의 의미는 ‘신호’와 ‘기호’, ‘잠재성’과 ‘현실성’으로 이중화되면서 생명체의 생성 과정 안에 내재적이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기입된다. 필자는 논의를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마주침의 대상으로서 기호가 담고 있는 불분명하고 함축적인 ‘의미’와 그 의미를 전개시키는 ‘사유’의 폭력성 및 비자발성으로 논지를 확장시킨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사유를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이념’ 혹은 ‘문제’ 개념을 고대 그리스의 아포리아(aporia)와 연관 지으면서, 생명체가 문제를 마주하면서 겪게 되는 이질감이나 현기증 같은 ‘느낌’으로 사유의 의미를 연장시킨다. 이러한 필자의 논의들은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다루어진 ‘의미’와 ‘무의미’의 관계, 또는 『차이와 반복』에서 다루어진 ‘인식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감각되어질 수 있는 것’의 관계 등과 같은 주제와 연결되어 더 확장된다면, ‘문제’로서의 ‘환경’의 의미를 더욱 심도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주제의 논의 거리로 심화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는 이어지는 ‘환경과 조직화’라는 챕터에서 환경에 대한 분석을 ‘생명체의 조직화’라는 문제로 이어간다. 여기서 생명체의 이질적인 조직화를 야기하는 ‘차이’는 결국 시간의 경과와 맞물려 있는 ‘반복’의 문제로 우리를 이끄는데, 들뢰즈에게서 생명체의 조직화 및 진화는 재현과 유사성의 질서에 종속되지 않고 돌발적으로 출현하는 변이나 기형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논문에서 생명체의 조직화와 관련한 ‘반복’의 의미는 짤막하게 언급되는 정도로 그치고 있다. 주제상으로나 분량상으로나 들뢰즈 철학에서 논의된 ‘반복’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동일한 논문에서 모두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 논문의 내용을 출발점으로 현재의 시간, 과거의 시간, 미래의 시간에 해당하는 세 가지 반복에 대한 구체적 논의들을 ‘생명체의 조직화’의 문제와 연결지어 그 의미를 더욱 상세히 논구해 보는 것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논문을 구성할 수 있는 충분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논문의 마지막 챕터에서 필자는 생명의 문제와 관련하여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태도, 즉 기계론과 생기론을 요약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들뢰즈의 태도는 생명에 대한 사유 자체를 폐기하려는 기계론적 태도가 아닌, 생명을 일종의 규제적 원리로 개념화하며 생명 자체를 사유되어야 하는 문제이자 이념으로서 긍정하는 생기론적 태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들뢰즈는 가타리와의 공저 『천 개의 고원』에서 유기체에 반하는 미시 분자적인 ‘욕망-기계’를 언급하며 기계론과 생기론의 두 가지 굴레를 모두 벗어나려 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의 이러한 설명은 보다 섬세하고 신중한 이해가 함께 동반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논문의 마지막에 서술하고 있듯이, 들뢰즈의 ‘생명’에 대한 이해는 일자에 종속되는 통일성(unité)이 아닌, 차이와 특이성을 바탕으로 한 전체성(totalité)의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생명은 비유기적인 환경 전체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야 얼핏 모순적으로 보이는 ‘비유기적 생명’이라는 들뢰즈 철학이 낳은 개념 역시도 왜곡 없이 사유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 철학에서 ‘생명’ 개념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필자의 논문에서 잘 다루어졌듯이, 이념과 문제의 잠재적 장을 사유하지 않고는 이해 불가능하다. 이와 더불어 ‘기계’와 ‘생명’의 구분이 더욱 모호해지고 무의미해지고 있는 우리 시대에 들뢰즈-가타리가 제시하고 있는 ‘욕망-기계’라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문법은 우리 시대의 현상과 문제들을 보다 적확한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필자의 논문이 들뢰즈의 전기 철학을 바탕으로 생명과 환경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를 충분히 심화시키고 있다면, 생명의 의미가 탈각되고 있는 우리 시대에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펼친 후기 철학적 성과들을 어떻게 실천적 방식으로 재고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는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새로운 숙제라 하겠다.  김주희한양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철학과 석사과정 수료 후 파리 8대학교에서 「들뢰즈 철학에서의 사건의 이념성」으로 석사학위를, 「잠재적 물질」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관 없는 신체’에 관한 연구-탈영토화 운동의 바탕으로서의 강도적이고 잠재적인 다양체」와 「기계와 유기체의 관계 및 생명 개념의 변화, 그리고 생태철학의 문제 - 캉길렘과 들뢰즈-가타리의 논의를 출발점으로 -」 등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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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호 (2023년 3월) 리뷰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어떤 구조를 가지는가?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어떤 구조를 가지는가?조나단 샤퍼「일원론: 전체의 우선성」 비판적 리뷰차봉석 경상국립대 철학과 박사과정Schaffer, Jonathan, ‘Monism: The Priority of the Whole’, The Philosophical Review 1 January 2010, 119, (1), pp.31–76들어가는 말  예전에 인도철학을 강의하시던 교수님께서는 인도육파철학을 그들의 존재론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일원론적 존재론을 주장하는 베단타(Vedānta), 미맘사(Mimamsa) 학파이다. 이들은 아트만(Ātman, 또는 브라흐만(Brahman))을 존재론적 근원으로 여긴다.(필자가 속해있던 동아리 이름이 바로 아트만이었는데, 누가, 어떤 이유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불명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아트만은 자신의 몫을 다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원론적 존재론적을 주장하는 샹카(Sāṁkhya), 요가(Yoga) 학파이다. 이들은 푸루샤(purusha)와 프라크리티(prakriti)를 근원으로 여기며, 이들의 상호작용이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다원론적 존재론을 주장하는 바이세시카(Vaisheshika), 느야야(Nyāya) 학파이다. 이들은 존재론은 논리학적 구도가 강한데, 존재론적 근원으로 실체(dravya), 성질(guṇa), 운동(karma), 보편(sāmānya), 특수(viśeṣa), 내속(samavāya)을 제시한다.  존재론(ontology)이라는 말은 굉장히 모호한 인상을 준다. 스탠퍼드 백과사전에 따르면, 존재론은 존재자(entity)와 존재(함)(being)에 대한 논의이다. 스탠퍼드 백과사전 ‘ontological dependence’ 항목 참조 https://plato.stanford.edu/entries/dependence-ontological/ 그런데 존재자는 존재하는 것이다. 사과, 나무, 인간, 숫자, 정의 등 어떤 대상과 속성이 ‘존재(함)’이라는 상태를 가지게 된다면,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존재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논점은 존재(함)으로 집중된다. 그리고 철학과를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존재에 대하여 다음의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물어지고 있는 것은 존재이다. 즉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고 있는 바로 그것, 존재자-이것이 어떻게 논의되건 상관 없이-가 각기 이미 그리로 이해되어 있는 바로 그것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존재론이라는 말에 별 감흥이 없다면, 서양철학에 흥미가 있을 가능성이 별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술적인 분과(논리학)를 제외하고, 나머지 분과(인식론, 미학, 윤리학)는 모두 특정 존재론에 기반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 존재론이 매우 상식적이어서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매우 독특하여 가는 곳마다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존재론이 없으면 저 논의들은 어느 지점에서 막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존재론에 대해 예전만큼 깊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 존재가 그저 존재자의 양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이전 사람들이 존재라는 말에 실려 있는,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무언가를 포착하려고 한 시도 전부를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들에게 존재는, 예술작품이 직관적으로 알려지는 것처럼,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도 손이 있고, 저기도 손이 있다. 존재자는 ‘거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사물들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샤퍼(Jonathan Schaffer)는 일원론적 존재론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존재론을 존재자로 환원시키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시대착오적이고 반(反)과학적인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하에서 그가 주장하듯이, 사실 지극히 철학적이고 상식적이며, 소위, 철학사적으로 ‘근본’적인 입장이다.   논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절에서 샤퍼는 근본적 부분론을 다루면서 존재론 구도 논쟁의 논점을 명확히 한다. 2절에서 샤퍼는 자신의 입장인 ‘전체로서의 우주’를 존재론적 근본으로 삼는 일원론적 존재론을 주장한다. 부록에서는 자신의 논증과 관련한 철학사적 맥락을 소개한다.2016년 왕립철학연구소에서 조나단 샤퍼의 존재론 강의 장면.1 도입부  존재론의 두 입장인 일원론과 다원론을 정의한다. 특히, 샤퍼는 많은 사람들이 일원론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일원론은 오직 하나의 존재자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직관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이 세계에는 다종다양한 사물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일원론은 틀렸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허수아비 논증이다.(샤퍼는 이런 시각의 근원으로 20세기에 일어난 분석철학의 탄생을 지목한다.) 부록에서 샤퍼가 언급하듯이, 철학사의 대표적인 일원론자들은 하나의 존재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자가 다른 것에 비해 ‘근본적(fundamental)’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 논점으로 시선을 모은다. 핵심은 존재론적 근본성이지, 존재자가 아니다. 이런 시각에서 그는 전체로서의 우주가 근본적인 존재자로서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존재론적 우선성(priority)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2 근본적 부분론의 문제  논쟁에서 언급되는 여러 용어와 대상들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제시되는 부분이다. 네 가지 꼭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1.1절은 부분론적 구조, 1.2절은 우선성과 후행성, 1.3절은 타일붙이기 제약조건, 1.4절은 이상을 정리하여 일원론과 다원론을 재정립한다.  1.1절은 전체와 부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샤퍼는 전체로서의 우주를 ‘최대한으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상(a maximal actual concrete object)’으로서의 우주로 제시한다. 이 우주는 다른 ‘모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상들(all actual concrete objects)’을 부분으로 가지고, 그것들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 포인트는 전체와 부분에 대한 것이다. 환원주의자들은 부분들의 단순한 모음을 전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샤퍼는 그것을 부정한다. 구성이 곧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주는 우주 안에 속한 모든 것들의 모음과 같지 않다. 『강철의 연금술사』에드워드 에릭이 인체 연성을 통해 무엇을 얻어냈는지 생각해본다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1.2절은 우선성(prior)과 후행성(posterior)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부분론적(mereological) 구성관계와 구분되는, 형이상학적 구조가 존재한다고 본다. 형이상학적 구조의 핵심은 무엇이 무엇에 의존하는지, 즉, 존재론적 의존성이다. 예를 들어 라는 명제는 실존인물 소크라테스에 의존한다. {소크라테스}라는 싱글톤도 실존인물 소크라테스에 의존한다. 하지만 그 명제, 그 집합에 실존인물 소크라테스가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비대칭성(asymmetry)이라고 부른다. 그 외에도 형이상학적 의존성 관계에는 일반적으로 반재귀성(irreflexivity, 자기자신에 의존하지 않음), 전이성(transitivity, 의존성이 상속됨), 정초됨(to be well-founded, 형이상학적 무한주의 거부)과 같은 조건들이 부과된다.  1.3절은 기초 존재자의 조건에 대한 것으로, 샤퍼는 타일붙이기 제약조건(the tiling constraint)을 제시한다. 우리가 벽면에 타일을 붙일 때, 우리는 타일들이 겹치거나 빠지지 부분 없이 벽면 전체에 고르게 분포하도록 시공한다. 기초 존재자가 바로 타일에 해당한다. 즉, 기초적이고 현실적인 구체적 대상들은 집단적으로 겹치는 부분 없이, 간극도 없이 우주 전체를 커버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크기의 타일을 사용할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혹자는 벽면과 같은 크기의 타일 한 장만 사용할 수도 있고, 다른 혹자는 매우 작은 크기의 타일을 무수히 이용하여 모자이크를 꾸밀 수도 있다. 타일붙이기 제약조건만 만족하면, 어떤 방식이든 허용될 수 있다.(그 외에도 샤퍼는 구체적으로 커버링(covering) 조건과 노 오버랩(no overlap) 조건, 비 부분성(no parthood) 조건을 제시한다.) 타일붙이기 제약조건의 의의는 우리가 일원론과 다원론 구도를 선택할 때, 우주를 어떻게 분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준다는 것이다.  1.4절은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일원론과 다원론을 재정립한다. 일원론은 벽면과 같은 크기의 타일 한 장을 붙이는 것이다.(샤퍼의 비유에 따르면, 파이를 그대로 놔두는 것이다.) 다원론은 벽면에 작은 타일을 붙이는 것이다.(샤퍼의 비유에 따르면, 파이를 자르는 것이다.) 그리고 샤퍼는 다원론의 한 형식으로서 원자론을 제시한다. 원자론은 존재론적으로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다종의 기초 존재자가 전체로서의 우주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3 일원론 주장  이상의 논의를 배경으로 하여, 샤퍼는 전체로서의 우주가 그것에 속한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주장은 네 가지 측면에서 이뤄진다. 2.1절은 상식적 측면에서의 주장이다. 2.2절은 물리학적 측면에서의 주장이다. 2.3절은 이종성에서의 주장이다. 2.4절은 무원자 겅크(atomless gunk)에서의 주장이다.  2.1절은 상식적 측면에서의 주장이다. 도입에서 나왔던 초기 분석철학적 다원론(경험주의적 다원론)에 대한 비판이 이뤄진다. 우선, 앞서 보았듯이, 샤퍼는 러셀로 대표되는 경험주의적 다원론이일원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다. 다음으로 샤퍼는 상식적 측면에서 전체로서의 우주 일원론을 옹호하는 논증을 보인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p1. 상식적 측면에서 단순한 모음(모래알-모래더미)과 통합된 전체(음소-음절)는 구분된다. 이에 따르면, 단순한 모음에서는 부분이 전체에 우선하지만, 통합된 전체에서는 전체가 부분에 우선한다.p2. 상식은 우주를 단순한 모음이 아니라 통합된 전체(즉, 코스모스)로 파악한다.p3. 상식은 우주의 분할 중 어떤 것도 특권적이지 않다고 본다.c. 그러므로 상식은 우주를 우주의 부분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본다.  2.2절은 미시물리학적 측면에서 양자얽힘 현상을 통해 우주가 통합된 전체라는 것을 보인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주가 빅뱅으로부터 시작하는 초기 얽힘 상태를 가지고 있고, 수학적으로 봤을 때 오직 하나의 파동함수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여기에 더하여, 데모크리토스식 다원론이 얽힌 시스템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창발을 통해 전체로서의 우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 하향창발(submergence)은 불가능하다는 것 등을 설명한다.  2.3절은 이종성(heterogeneity)의 측면에서의 주장으로, 철학사에서 일(一)과 다(多)의 문제라고 알려진 것을 다룬다. 즉, 우리는 세계에 이종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만약 일원론이 맞다면, 어떻게 단일한 일자가 다종다양한 것들로 나타날 수 있는가? 물론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일원론과 동종성(homogeneity), 다원론과 이종성이 짝을 이루는 경우이다. 그리고 샤퍼는 전체로서의 우주를 존재론적 기초 존재자로 설정한다. 그 우주는 이종적인 부분을 가진다. 그러므로 일과 다의 문제는 샤퍼의 구도에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2.4절은 무원자 겅크 측면에서의 주장이다. 부분론적 존재론 구도는 뒤집힌 원뿔로 표현되며, 크게 정크(junk), 헝크(hunk), 겅크(gunk)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정크는 원뿔의 윗 부분(넓은 부분)이 무한하게 이어지는 구도이다. 헝크는 원뿔이 닫혀있는 구도이다. 정크는 원뿔의 아랫 부분(좁은 부분)이 무한하게 이어지는 구도이다. 일반적으로 정초됨 조건으로 인해 존재론적 의존성 논의는 헝크에서 이뤄지지만, 고전적 부분론은 정크의 가능성을 함의한다. 그러므로 일원론과 다원론이 적절한 형이상학적 구도라면, 헝크뿐만 아니라 정크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샤퍼에 따르면 다원론은 무언자 겅크를 설명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샤퍼가 말하길, 다원론자가 무원자 겅크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입장은 세 가지이다. 첫 번째, 무한히 이어지는 의존성 관념을 채택한다. 하지만 이 관념에서는 원자론이 불가능하고, 기초 대상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가정을 채택해야만 한다. 두 번째, 근본적 존재자들을 선언명제로 연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굉장히 약하고 비(非)통일적인 구도를 형성한다. 세 번째, 임의의 중간수준을 근본수준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정은 다분히 임의적일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위수준이 있는 상태에서 중간수준을 근본수준으로 선택하는 것은 종국적으로 일원론과 같아진다. 그러므로 샤퍼는 다원론이 형이상학적으로 적절한 입장이 아니라고 보며, 전체로서의 우주 일원론이 형이상학적으로 적절한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4 부록: 철학사 이야기  샤퍼는 자신의 일원론을 우선성 일원론으로 명명하고, 기존의 존재 일원론과 대비한다. 존재 일원론은 경험주의적 다원론자가 이해한 일원론, 즉, 오직 하나의 존재자만 존재한다는 입장을 말한다. 그리고 샤퍼는 철학사의 많은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존재 일원론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그들의 입장을 우선성 일원론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으며, 우선성 일원론이 더 적절한 독해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크게 세 가지 종류로 기존의 일원론자를 분류하고, 각각이 우선성 일원론의 요소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보인다. 첫 번째 부류는 부분에 대한 전체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부류로, 프로클루스, 요하임 등이 속한다. 두 번째 부류는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을 언급하는 부류로, 플라톤, 플로티누스, 헤겔 등이 속한다. 세 번째 부류는 통합된 시스템으로서의 세계를 언급하는 부류로 스피노자, 로이스, 보잔켓, 알렉산더 등이 속한다. 나가는 말세계가 존재론적으로 어떤 구조를 가지는지는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문제이다. 일원론, 이원론, 다원론은 존재론을 넘어서 인식론, 윤리학, 정치 사회철학으로 이어질 때, 더 다양한 함의를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자신만의 존재론 구도를 하나씩 꾸며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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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호 (2023년 3월) 일상공감 # 2 함께 하는 기쁨 

    함께 하는 기쁨2023년 한국헤겔학회 후속세대 발표 참가 후기박경륜 경상국립대 철학과 박사과정1. 계기  2022년 8월부터 석사 논문 작성을 시작했고 2023년 2월에 석사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간 달려온 과정 속에서 너무 지치기도 했고, 솔직한 마음으론 한 학기 정도는 쉬고 싶었으나, 바로 박사과정에 들어가는게 좋다는 조언을 듣고 박사과정 입학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 후 한 학기 수업을 듣고 여름 방학 때 스터디도 하면서 스스로가 얼마나 부족한지 자각을 했고, 최소한 몇 년만이라도 내 생각을 써야 하는 글쓰기는 안하리라 다짐 했었다.   하지만 2학기를 시작한 9 월달 초 전일제 장학금 지급 요건을 안 순간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박사과정 3학기 시작 전까지 규모가 있는 학술 대회에서 발표를 하거나,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1월 달에 발표를 할 자리가 있으니 그 때 발표를 하면 되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나는 당돌하게도, 이 때 이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고 판단했고, 하겠다고 하였다. 그 후 이상형 교수님과 통화 할 때, 교수님이 “할 수 있지?”라 물으셨고, 나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다가, 기백이 부족한 것 같아서 “해내야죠!”라고 외쳤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도교수님이신 신지영 교수님도 2개월 밖에 남지 않았는데 할 수 있겠냐고 걱정을 해주셨고, 어떻게든 해내겠다고 답을 드렸다.  2. 무엇을 써야 할까?  기백 있게 해내야 한다고 외쳤지만, 주제 선정부터 고민이 많았다. 결국 석사 논문을 요약하고 보충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또 고민이 많아졌다. 석사 논문의 내용을 거의 다 잊은 것도 모자라, 석사 논문의 제목까지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불완전한 나의 기억을 일단 써내고, 뭐가 부족한지 찾아내는 작업을 발표 전까지 계속 진행하였다. 그렇지 않는다면 석사 논문의 요약도 너무 힘들어 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논문의 후반부는 가닥을 잡고 있었기에 그나마 수월했다. 하지만 전반부는 석사논문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고, 결과적으로 석사 논문과는 조금 다르게 스피노자의 체계를 이해하고 요약한 것 같다. 3. 함께  글을 쓰고, 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 있지 않나?’라고.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쳐도 이런 생각은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운 좋게 주변의 조언과 감상평이 나를 더 넓은 지평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가장 인상 깊었던 자리는 발표 현장이었다. 글을 논평해주신 최일규 선생님의 표정과 말씀은, 너무나 부드러웠고 오히려 더 좋은 글을 썼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보내주신 것 같았다. 그리고 논평에 대한 나의 답변을 들으신 후에 답을 너무나 잘해주셨다고 칭찬 해주시고, 마치고 나갈 때도 간만에 스피노자를 공부한 것 같아 좋다고 격려해주셨다.   나는 그 현장에 있으면서 논평이란 비난이 아님을 이해했다. 그리고 논평하시는 분이 시간을 들여 나의 글에 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애정의 표현이 될 수 있음을 이해했다. 이 뿐만 아니라 같이 공부하는 경상대학교 철학 대학원 선생님들과 교수님들이,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또 한번 가르침을 주신 것 같다. 이러한 가르침을 토대로 나의 지평을 더 넓히고 싶고, 다른 누군가에도 이러한 기쁨을 알려주고 함께 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이타적으로 손을 내밀었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손을 내밀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이러한 형태로 이타적인 행위가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기쁨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함께 한다는 것은 기쁘며 즐겁고, 함께 웃는 것만큼 좋은 일은 별로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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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호 (2023년 3월) 일상공감 # 1 우리가 몰랐던 대학원 구성원의 이야기 

    우리가 몰랐던 대학원 구성원의 이야기김성준 경상국립대 철학과 석사과정안녕하세요, 23학번 김성준입니다. NOWHERE에서 글을 싣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는데 글재주가 부족한 저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일상 얘기를 풀어내는 것이기에 조금은 부담을 덜고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농업경제를 전공으로 했고 어떻게 하면 농민이 잘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냈었습니다. 이 시기에 불교를 접하며 힘든 시기마다 큰 정서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불교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불교 공부를 해보고 싶어서 대학원 진학을 꿈꿨습니다. 불교에 대해서 아무런 것도 모른 채 대학원을 진학하려는 저를 이영진 교수님은 되게 반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공부해 보고 싶다는 마음만 보고받아 주신 철학과 교수님들께도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대학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충격과 실망, 하지만처음 제가 접한 불교는 삶을 살아가는데 되게 많은 지혜를 주고 세속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 학기 동안 공부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에서 불교를 바라봤을 때 불교라는 종교도 하나의 문화이고 깨끗한 종교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불교를 종교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제 모습을 깨닫고 이제는 중도의 입장에서 종교로서의 불교와 학문으로서의 불교를 함께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내 업이다처음 한 학기 수업을 들으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였던 것 같습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심오하고 어려웠습니다. 이런 학문을 배우는 학부생, 대학원 선배님들을 보면서 되게 멋있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얼마나 공부해야 될지 짐작하면서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업이다”라고 말하면서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고 많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려고 합니다.^^왜 하루가 24시간 밖에 안될까학업과 직장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수업으로 빠진 시간은 매일 야근이나 주말에 출근해서 일했었습니다. 이때 체력적ㆍ정신적으로 되게 힘들어서 그런지 살면서 가장 많이 아팠던 것 같습니다. 특히 매일 속이 너무 아파서 약을 먹다가 대장 내시경, 위내시경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시간이 부족해서 ‘왜 하루가 24시간 밖에 안될까?’라는 생각도 이번에 처음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직장동료나 교수님, 대학원 선배님들이 잘 챙겨주신 덕분에 첫 학기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첫 학기라 모든 게 낯설었는데 친절하게 대해주셨던 교수님, 조교님. 선배님들에게 되게 많이 감사했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부끄럽지 않는 철학과 학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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