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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2023년 9월) 철학의 시선 삶과 죽음, 그 기로에서의 단상(斷想)
  • 철학과
  • 2023.09.04
  • 549

삶과 죽음, 그 기로에서의 단상(斷想)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1. 한 갑자甲子를 살아보니

나는 작년(2022)에 이른바 환갑을 맞았다. 그에 앞서 2021년도에 특정 기관으로부터 ‘경남의 전통음식과 전통주’라는 제목으로 책을 집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했지만, 그쪽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내가 상당한 적임자라고 판단했다는 것이었다. 음식전문가가 아닌 인문학자가, 음식 레시피가 아닌 음식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목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위의 몇몇 사람들도 내가 그 글을 쓸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책을 집필하였는데, 책의 서술을 무겁게 하지 말라는 요청에 따라 중간 중간에 나의 경험담과 살아온 신상 이야기도 다소 포함되었다.

그 책의 「후기」에서 나는 나의 삶을 요약한 다음과 같은 글도 일부분으로 서술하였다.

나는 미식가도 아니고 식도락가는 더욱 아니다. 술은 즐기고 많이 마시지만 안주조차도 별로 먹지 않는다. 원래 허약한 체질이라 입도 짧아서 가리는 음식도 많다. 더구나 화학조미료가 조금이라도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몸이 금방 반응하여 속이 쓰리고 음식을 소화하는데 보통보다도 서너 배의 시간이 걸린다.

어려서는 몸이 너무 약하여 제대로 뛰놀았던 기억도 거의 없다. 숨이 거의 끊어져 산에 가져다 묻을 준비까지 했던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게다가 여섯 살 때에는 오른손등과 왼쪽다리 허벅지 그리고 왼쪽 등의 살이 썩어 들어가는 병에 걸려 큰 수술을 하여 제거했는데 아직도 그 상처가 몸에 크게 남아 있다. 그 수술의 여파로 왼쪽 다리의 신경이 잘못되어 다리를 펴지 못해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 될 뻔하였다. 대학병원에서도 치료하지 못한다고 한 것을 신줄을 받은 어느 여인이 손으로 만지기만 해서 나았는데, 지금도 100% 온전한 것은 아니고 나 자신만 아주 미세하게 느낄 정도로 약간의 불편함이 남아 있다.

선천적으로 신장이 건강하지 못하고 심장은 지나치게 강한 상태로 태어났다. 체질이 허약하여 한 가지 운동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고, 어린 시절에는 전 국민적 운동이었던 새마을운동이나 맨손체조의 마지막 동작이던 숨쉬기운동 정도가 내가 하는 운동의 전부였다. 누구도 내가 지금의 나이인 환갑이 될 때까지 살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가을에 넷째 형이 친구 2명과 더불어 학교에 가지 않고 중간의 동산에서 ‘땡땡이’를 치면서 놀던 중에, 무덤 아래로 한 줄로 지나가는 백사 세 마리를 잡아서 구워 집으로 가져와서 나에게 처음 미꾸라지구이라고 속여서 먹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크게 잔병치레도 하지 않고 살고 있다. 물론 몸이 남들만큼 건강한 상태는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별로 몸을 사용하여 돈을 벌만큼 건강한 체질을 지니지 못하여 그저 한 평생 공부를 벗으로 삼아 살아왔다. 전공은 동양철학에 흥미를 느껴서 ‘삼교회통론’과 ‘명리학’ 및 도교의 ‘내단수련론’ 등에 많은 시간을 들였고, 가장 많은 글을 남긴 부분은 ‘남명학’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늘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분야가 ‘한의학’이다. 허약한 체질 때문에 음식과 식재료 등을 공부하여 건강에 도움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 중에서 순수하게 철학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면 한의학과 명리학에 관한 것이 두 번째와 세 번째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의학에 대해서는 책을 쓴 것이 없지만 명리학에 대해서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기의 끝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책의 내용 중 여러 부분과 후기의 내용은 내 삶의 과정과 삶 속에서 내가 했던 일들에 관한 기록이 차지하고 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이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시점에 와 있다. 그러니 앞으로의 삶은 지난 시절의 삶과는 그 방향이 많이 다를 것이다. 나는 이미 가까운 벗이자 아우인 사람에게서 나의 삶 이후의 안식처를 약속받았다. 조경수를 키우는 그의 농장은 산의 기운이 빼어나고 위치와 방향이 모두 수려하다. 그 산의 한 곳을 점찍어 내 유골의 수목장 장소로 정해두었다.

그러므로 봉분도 만들지 않을 것이며 비석이나 표지석 같은 것도 두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돌아가 영원한 적멸에 머물고 싶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 나의 자식에게도 일러두었다. 그래서 이런 기회에, 비석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지만 내 스스로가 나의 묘지명을 미리 지어 여기에 남기고자 한다.

타고난 천성은 곧은 듯 고약하고,
스스로 수양은 덕 아닌 잔재주뿐!
허약한 체질에 한 평생 술을 즐겨,
가정에 무능했고 세상에 공 없네.
하나의 온전함도 갖추지 못한 몸이,
수많은 글과 말로 사람들 현혹했네.
無極에 돌아가 三要를 막으리니,
時運도 命運도 이제는 어쩔 건가!
稟賦天性 若直實曲
自勉修養 不敬少拙
虛弱體質 平生豪飮
治家無能 于世無功
所俱精氣 一無穩全
多少言說 眩惑世人
回歸無極 要閉三關
時運命運 奈何奈何

그리고 작년 6월 ‘환갑달’을 맞이하여 그동안 이래저래 친분을 유지해온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자축의 술자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졌다. 그런데 이게 한 달에 끝나지를 않아 8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그 뒤로도 평생 지녀온 나의 음주습관은 어쩌다 쉬는 날을 빼고서는 계속되었다.

2. 진갑을 맞아 죽음의 문턱을 다녀오고

‘잠자고, 글 쓰고, 술 마시는’ 일상이 반복되던 금년(2023) 5월의 어느 날, 나는 한 밤중에 극심한 복통에 시달리다 화장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소리를 듣고 아들이 달려왔고 나는 1분이 안 되어 정신이 돌아왔다. 병원에 가자는 자식의 말을 듣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은 출근도 못하고 하루 종일 굶은 상태에서 시커먼 액상의 물질을 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내리기를 두 번 반복하고, 저녁 무렵 다시 화장실에서 고통을 못 이겨 정신을 잃었다. 애비의 상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아들이 다시 달려왔고, 나는 또 1분 이내에 정신이 돌아왔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가면서 자식은 대원들에게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였고, 그들은 나의 의식상태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면서 응급실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진주시내 종합병원 응급실은 환자가 만원이어서 어디에서도 받아줄 수 없다는 연락뿐이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처음부터 오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던 대학병원으로 향하면서, 응급실 밖에서 기약 없이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그런데 마음은 너무나 편했다.

세상에 기적은 있었다. 환자가 넘친다던 대학병원응급실에 도착하니 바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때부터 모든 진료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X-ray, MRI, CT 등을 촬영하고, 뇌파검사도 이어졌다. 위에 이상이 있음이 확인되어 코를 통하여 호스를 위에 넣었다. 그 과정에서 호스를 통하여 위에서 시커먼 액상물질을 3L 정도 뽑아내고, 아래로도 많은 양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피와 위분비물 등이 혼합된 것이었다. 온 몸의 피가 거의 몸 밖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병의 원인은 위를 타고 지나는 정맥의 파열이었다. 나중에 의사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파열된 부위가 3㎝ 이상 윗부분이었으면 아무런 손도 써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만 한다는 말이었다. 지속적으로 수혈을 하면서 새벽녘이 되어 허벅지를 통한 ‘색전술’ 시술을 통하여 파열된 혈관을 봉합하는 시술이 끝났다. 금요일 새벽이었다.

입원실이 없어 응급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더니 또 운 좋게 입원실의 병상이 하나 나게 되어 응급동 병실로 옮겼다. 그 순간부터 월요일 의사의 회진 시간까지는 그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링거를 통해 피와 주사약 등을 맞으며 송장처럼 누워있어야만 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에 단지 물로 입을 헹구는 일만 허용되었다. CT와 뇌파검사를 다시 받는 중에 월요일 점심부터 물 마시기가 허용되었고, 화요일 점심부터 미음이 주어졌다. 나로서는 배고픔만 빼고는 몸이 정상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같은 병원에 가까운 친척이 입원해 있어 어쩌다 연락이 되어 로비에서 잠시 만나보기로 하여 링거대를 끌고 내려가 기다리던 중에 극심한 ‘기립성저혈압’ 증세로 인하여 병원 복도에서 다시 혼절하였다. 몇 가지 검사 끝에 다른 이상은 없음이 확인되어 수요일 점심부터는 죽을 먹게 되었고, 목요일 오후 한 가지 검사를 끝으로 정확히 1주일 만에 퇴원하였다.

3. 새로운 삶의 시점에서 느낀 단상

좀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작년에 나는 『우주의 원리, 운명의 비밀』이라는 명리학 책을 출판하여 세종도서로 선정된 바가 있다. 내 스스로 감정해 본 나의 사주에 ‘평생 세 번의 큰 수술을 해야 되는’ 운명이 있었다. 여섯 살 때와 스물일곱 살 때 큰 수술이 있었고, 금년의 이 일이 세 번째이다. 나의 감정이 맞는다면 이제 여든 두 살까지는 그럭저럭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듯하다. 인생의 3/4을 산 것이고, 20년이 남은 셈이다. 지금부터의 삶은 이전 삶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삶이란 생각으로 살아갈 것이다.

집에서 두 번 정신을 잃을 때, 나는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은 인간 정신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임을 체험했다. 그 마지막 순간의 느낌은 너무나 평온했다. 나는 평소 삶과 죽음을 ‘에너지의 흐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죽음을 기뻐하고 삶을 괴로워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논리를 부정해왔다. 나의 생각이 옳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이제는 편안히 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였다.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나의 이번 일에 술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전부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의사의 이야기는 술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주원인이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 약간의 위궤양이 있었고, 이것이 술과 스트레스로 인하여 특정 부위의 증세가 악화되면서 마침 그 부위를 지나는 정맥에 자극이 되어 파열로 이어졌던 것이라고 한다. 나는 병원에 들어가면서부터, 나의 기억에 의하면, 수십 번도 넘게 같은 질문을 받았다. “술을 자주 드십니까?”, “주량은 얼마나 됩니까?”, “일주일에 몇 번이나 드십니까?” 나는 답은 이랬다. “자주 마십니다.”, “보통 두세 병 정도 마십니다. 많을 때는 다섯 병도 마십니다.”, “거의 매일 마십니다.” 그런 대답을 하면서 나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나중에는 누가 술 질문을 시작하면, 내가 먼저 “술은 소주를 거의 매일 두세 병씩 마시고, 많을 때는 다섯 병까지도 마십니다.”라고 미리 대답을 다 해버렸다. 그러면서 부끄러움도 조금씩 사라졌다. 술을 많이 마시는 일이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퇴원한 후에 나는 입원한 날부터 계산하여 한 달 동안 금주를 하였다. 스물일곱 살에 수술하고 난 뒤로 똑같은 날수만큼 내 인생에서 가장 장기간 금주한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 술을 마신다. 대신 주량을 줄이려고 마음으로 노력은 하고 있으며, 특히 수소폭탄주로 마시면서 위장에 부담을 적게 주려하고 있다. 수소폭탄주란 물과 소주를 적당한 비율로 혼합한 술의 명칭이다. 술은 음식이고, 특히 기호식품이다. 건강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즐기는 것은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 나에게는 평생 술을 사주겠다는 친구가 둘 있다.

병원에서 시술까지 마치고 난 다음 4일 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을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물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니 물보다도 더욱 먹고 싶은 음식이 간절히 생각났는데, 바로 식혜였다. 물도 마시고 싶고 단 음식도 먹고 싶은 생각이 함께 생기니, 그 둘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이 바로 식혜였던 것이다. 퇴원 직전부터 시작해서 퇴원하고 한 달이 지난 기간 동안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마신 식혜의 총량보다도 더 많은 식혜를 먹었다. 그런데 그 식혜는 모두 지인들이 선물로 주었다. 어떤 친구는 내 평생 식혜는 책임지고 공급해주겠다고 한다. 대신 앞으로는 병원에 입원하여 자기를 놀라게 하는 일만 없는 조건으로!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그 소식은 친인척을 비롯하여 어떤 벗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부득이하게 진주교대에 있는 벗과 셋째 형수로부터 전화가 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되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 순간부터 사방팔방에서 전화가 빗발쳤다. 나는 물도 한 방울 마시지 못하여 말도 할 수 없는 지경인데, 안부를 묻는 전화에다 병원에 문병이 가능하냐는 전화까지 하루에 거의 70여 통의 전화를 받아야만 하는 곤욕을 치렀다. 사람이 두 번 다시 그러한 일로 병원에 입원할 일이 없어야 하는 이유가 이런 데에도 있었다.

살면서, 그것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식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가 싶지 않은듯하다. 나는 늦게 결혼하여 아직 미혼인 아들과 딸이 있는데, 나의 노후와 사후의 일에 대해서 그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아직 어린아이로만 생각하던 아들이 이번 일에 처음부터 끝까지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것은 그냥 나만의 생각임을 알았다. 나의 아들은 매우 침착하였고 일처리에 신중하면서도 꼼꼼하였다.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어쩌면 철없이 살아온 나보다도 더 믿음이 갔다. 회복기에 병실에서 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사후에 필수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들과 내가 버리고 가는 육신의 처리에 대한 당부도 해두었다. 아들은 진지하게 들었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퇴원 후에야 자신도 “너무 당혹스러웠던 경험이었으므로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고 하였고, 나의 사후 부탁에 대해서는 “아직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도 하였지만 이제 나는 이후의 삶이 든든하다. 나의 딸은 아직도 내가 그런 일을 겪었는지 모른다. 서울에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 당시나 그 후에도 딸에게는 그러한 소식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딸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였다.

나는 퇴원 후에 곧바로 내 주변의 번거로운 모든 일들을 정리하였다. 살면서 꼭 필요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금전관련 문제나 인간관계까지도 많은 부분을 정리하였다. 연금보험을 비롯한 일반보험 등은 정리하고, 전화요금과 국제구호기구에 내고 있는 약간의 기부금 그리고 건강보험 등만 내고 있다. 전화기에 남아 있는 2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도 정리하여 이제 5백 명도 남지 않았다. 해마다 더 줄여나갈 생각이다. 나의 벗들은 대부분 직장에서 정년을 하였다. 다만 대학에 남아 있는 벗들은 아직 정년이 조금 남았고, 나도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학술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그런 벗들의 번호는 한동안 내 전화기에 남겨 둘 것이다.

이제 일반적으로는 특별히 과거와 다를 것은 없지만, 나는 나에게 주어진 남은 삶의 시간을 좀 더 느긋하게 살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아무 미련 없이 적멸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마치게 되었음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