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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봉석 | 경상국립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자세히보기데카르트와 내감의 동요이무영 | 전남대 철학과 박사과정데카르트가 중세 스콜라 철학을 뒤엎고 근대 철학의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가 즐겨 사용하는 ‘학교’(école)와 ‘강단’(université), ‘철학자들’(philosophes) 같은 용어는 대부분의 문맥에서 매우 비판적인 어조를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데카르트 연구의 역사에서 이런 특징이 강하게 부각되었던 것은 다름 아닌 19세기 프랑스 철학계였고, 20세기 초 『데카르트 작품집』 비판본(AT판)의 출간과 더불어 질송(É. Gilson)에게서 개시된 일련의 역사적 연구(『데카르트-스콜라 철학 용어 색인』, 『데카르트 체계의 형성에서 중세 사상의 역할 연구』)는 데카르트 철학의 고유성을 조명하는 과정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사적 쇄신에 대한 정확한 기준을 가늠하려는 세부적 논의를 촉발시켰다. 오늘날 데카르트의 독자는 중세와 근대라는 막대한 시간차를 임의로 넘나드는 거대 담론을 지나 다소 미시적인 주제나 개념이 데카르트를 거치면서 겪기 마련인 역사적 변모를 한층 가까운 시야에서 관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이러한 관점에서 지금 조망하려는 것은 데카르트의 감각 이론이다. 보통 감각은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비롯한 다섯 가지 외감(sensus externus)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데카르트 시대로 되돌아 간다면, 후기 중세 이래 이들 외감과 다른 몇 가지 감각이 별도로 주장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당대 가장 널리 읽혔다고 알려진 ‘강단 철학’ 교과서 성 바오로의 유스타치우스(Eustachius a Sancto Paulo)의 『철학 대전』(Summa philosophiae)에 따르면,실로 실재와 본성에 있어 공통 감각(sensus commnuis), 환상력(phantasia), 판별력(aestimativa), 기억력(memoria)이라는 서로 상이한 네 가지 내감(sensus internus)이 있다는 것이 모두가 동의하는 견해이다.(‘Physica’, p.3, t.3, d.3, q.1, p.394)저자는 외감과 더불어 ‘내감’의 존재가 해당 시기 여전히 광범위하게 인정받았다고 보고한다. 그것의 철학사적 기원은 12세기 이베리아 반도에서 확산된 아랍 학문의 번역 운동이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비첸나의 철학 저술 번역은 각각 원전과 주해의 역할을 맡으면서 서유럽에 내감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이때부터 내감의 개수와 기능에 대한 다수의 논쟁이 자연스레 뒤따랐으며, 거의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하면서 아비첸나를 수용하는 철학자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입장들과 논증들로 귀결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이른바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가 사백 년에 가까운 이러한 철학사의 지층을 과연 간과할 수 있었는지 묻는 것은 데카르트 철학의 역사적 지평을 이해하려는 목적에서 본다면 단순한 물음이 아니다. 물론 지난 연구의 결과물을 지렛대로 삼아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핵심적 단서들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감의 수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환원의 경향이다. 앞선 인용문의 저자 유스타치우스를 포함해 당대 스콜라 철학의 거장 수아레즈(F. Suarez) 모두 내감이 단 하나일 뿐이라는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치일 것이다. 말하자면 유스타치우스가 포착 능력(facultas apprehensiva) 하나만 내감으로 간주하고 능력이 떠맡는 상이한 직분(munium)에 따라 이름만 다를 뿐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수아레즈는 내감은 개념적 차이(ratio)가 있을 뿐 능력(potentia)으로서는 하나라는 유사한 입장을 전개한 것이다. 놀랍게도 초창기 데카르트 역시 비슷한 논증을 제시했다. 데카르트는 하나이자 동일한 힘이 내감이 떠맡는 여러 기능(functio)에 따라 상이하게 불린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하나이자 동일한 힘[=인식하는 힘(vis cognoscens)]이 상상과 더불어 공통 감각을 향하면 ‘보다’나 ‘만지다’ 등으로 불리고, 오로지 다른 모양을 갖추는 듯한 상상만 향하면 ‘상기하다’로 불리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상상을 향하면 ‘상상하다’나 ‘포착하다’로 불리고, 마지막으로 혼자 작용하면 ‘이해하다’로 불린다. (…) 그러므로 동일한 힘이 상이한 기능(functio)에 따라 순수 지성, 상상, 기억, 감각으로 불리는 것이다.(『정신지도규칙』, AT X, 415-416)하지만 여기서 데카르트가 겪는 혼동은 단순하지 않다. 그는 하나의 동일한 힘이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당대에 공유된 한 가지 착상에 도달하지만, ‘내감’이라는 대표적 용어 자체를 거론하지 않으면서 상상, 기억, 공통 감각이 힘의 상이한 기능의 실현에 앞서 실재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은연 중에 가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논리적 모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데카르트가 내감을 두고 벌이는 동요는 연대기적으로 본다면 데카르트 철학 전체를 관통한다. 일례로 1620년대 후반 데카르트는 공통 감각을 가리켜 “신체의 어떤 다른 부위”(alia quaedam corporis pars)라 부르는 동시에 상상과 환상을 동등하게 취급하지만(phantasia vel imaginatio, AT X, 414) 1630년 한 편지에서는 다시 상상과 별도로 환상(fantasie)을 직접 거론하는가 하면(AT I, 133), 1637년 출간된 『굴절광학』에서는 공통 감각을 즉각 ‘능력’(faculté)과 일치시키면서도(cette faculté qu'ils appellent le sens commun[=공통 감각이라 불리는 이 능력], AT VI, 109) 1641년 『성찰』에서 ‘상상하는 능력’으로 달리 규정한다(sensus communis, ut vocant, id est potentia imaginatrice, AT VII, 32)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이러한 동요는 외견상 내감의 철학적 기초가 점차 무력화되는 시대적 경향을 스콜라 철학 못지 않게 데카르트 자신도 함께 경험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여기에 머물러 살펴볼 몇 가지 쟁점들은 여전히 남는다.쟁점⓵ 내감은 능력인가?유스타치우스와 수아레즈는 내감이 여러 이름을 가질 수 있더라도 적어도 하나의 동일한 능력(facultas/potentia)의 여러 기능적 파생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나아가 데카르트 당대 스콜라 철학은 대체로 내감을 비롯한 감각이 ‘영혼’의 능력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감각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랐던 일련의 페리파토스 전통에서 ‘감각혼’(anima sensitiva) 내지는 ‘동물혼’(anima animalis)의 능력이었다. 예를 들어, 식물혼(anima vegetabilis)만 갖는 여러 식물은 동물과 달리 감각을 갖지 못한 채 양분 능력(nutritiva)이나 성장 능력(augmentativa)을 갖는 반면, 식물혼과 감각혼은 물론 이성혼(anima rationalis)도 갖는 인간은 양분 능력과 감각 능력에 더해 이해 능력(intellectiva)도 갖는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 데카르트는 내감과 능력을 단적으로 일치시키길 주저한다. 그가 내감 중 하나인 공통 감각을 어떤 능력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시기는 앞서 보았듯 데카르트 생애 초기도 아닌 후기로 간주할 수 있는 1637년 이후의 일이며, 사실상 데카르트가 능력이라는 말로 뜻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고 더욱이 이런 의미에서 (비록 내감은 아니라 하더라도) 공통 감각, 상상, 기억을 어떻게 저마다 독립된 능력들로 간주할 수 있었는지를 다룬 상세한 해명은 남아 있지 않다.쟁점⓶ 내감의 재정의이런 상황은 데카르트가 1644년 『철학의 원리』에서 제시한 내감에 대한 자신만의 (반아리스토텔레스적) 설명을 내보이면서 거듭 악화되는 것처럼 보인다.이들 감각이 다양한 것은 무엇보다 바로 이들 감각에 속하는 신경들(nervus)이 다양하다는 점과 다음으로는 각각의 신경에서 일어나는 운동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각각의 신경이 나머지와 구분된 각각의 감각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일곱 가지 감각이 두드러진 차별점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 중 두 개는 내감(sensus internus) 에 속하고, 다섯 개는 외감(sensus externus)에 속한다. 물론 위, 식도, 목구멍을 비롯해 자연적 욕망을 채우도록 정해진 여타의 내적 부위들로 뻗어 있는 신경은 ‘자연적 욕구’라 불리는 내감 중 하나를 만든다. 그러나 심장과 폐로 뻗어 있는 작은 신경은 아주 작다고는 하지만 별도의 내감을 만드는 바, 영혼의 모든 격동 즉 열정, 그리고 기쁨, 슬픔, 사랑, 미움 등의 감정(affectus)은 이 내감에 존립한다.(AT VIII-1, 316)데카르트의 개념적 쇄신은 신체의 신경에 입각해 감각을 재편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도 내감에 할애된 신경은 소재지와 기능에 있어 두 종류로 세분된다. 그 중 하나는 주로 양분 섭취라는 자연적 욕망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신체 부위와 관련되는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법에서 식물혼의 양분 능력에 대체로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다른 하나의 내감은 훗날 ‘정념’으로 통칭되는 다양한 감정들의 신체적 기원에 해당하는 심장과 흉부의 미세 신경이다. 데카르트는 공통 감각, 상상, 기억을 과연 이러한 정념의 근원지로서의 내감이라는 의미로 변환시킨 것인가? 데카르트가 동물을 가리켜 영혼이 없는 기계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이들 미세 신경이 기존에 내감이 떠맡고 있던 역할을 모두 망라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쉽게 깨닫게 된다.쟁점⓷ 데카르트 의학과 내감데카르트는 1630년부터 스스로 “작은 형이상학 논고”(un petit Traité de Métaphysique, AT II, 182)라 불렀던 것을 집필할 기획을 가졌다. 이 논고는 이후 어디에서도 원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기획으로 남았지만, 여러 연구자들로부터 『성찰』의 전신으로 예상되고 있다. 데카르트 철학의 시간적 순서로 보자면, 해당 논고는 무엇보다 『정신지도규칙』의 포기와 새로운 자연학을 제안하는 『세계』의 집필 사이를 매개하는 가교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스콜라 철학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자연학과 동시에 새로운 형이상학을 한꺼번에 고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그가 구상한 새로운 자연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자연학(physica)과도 거리가 있고, 뉴턴부터 시작된 고전 물리학(physique classique)과도 차이가 있다.저는 『세계』에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 더 인간에 대해 말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인간의 모든 주요 기능을 설명하는 일에 착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미 생명에 속하는 기능들을 기술했습니다. 고기의 소화, 맥박의 간격, 양분의 분포 등을 비롯해 오감과 같은 것 말입니다. 저는 이제 상상과 기억 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고자 상이한 동물들의 머리를 해부합니다.(AT I, 263)이렇듯 1632년의 편지는 자연학적 측면에서 데카르트가 구상한 영혼론의 진화를 보여준다. 기존의 자연학이 움직이는 존재자(ens mobilis)의 운동, 장소, 시간 등을 중점적으로 탐구했다면, 데카르트는 주로 형이상학적 관점에 따라 해석되었던 인간의 영혼을 자연학 안에 포함시켜 다루려는 놀랄 만한 의도를 피력한다. 물론 데카르트가 여기서 ‘인간 영혼’을 다루겠다고 명백하게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편지에서 열거한 인간의 다양한 ‘기능’은 그 자체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영혼론의 구분과 대략 합치한다. 즉 데카르트의 기획은 식물혼과 동물혼에 저마다 귀속되던 일련의 능력들을 ‘해부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사실상 당대 학교와 강단의 철학계가 병행하지 못했던 제3의 학문, 즉 의학의 도입을 통해 독자적으로 이루어진다.거칠게 상기한 쟁점들 모두는 철학사라는 제한된 관점을 고집하는 경우 몇 가지 형이상학적 핵심 개념들의 (재)전유라는 주제로만 위축될 위험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보듯이 데카르트의 철학을 움직이고 나아가 스콜라 철학의 대륙을 흔들었던 것은 단지 형이상학이나 인식론 같은 사후의 조망들로는 더 이상 간단히 접근할 수 없다. 더욱이 스콜라 철학과 데카르트 철학의 관계는 일방향적이라기 보다는 쌍방향적이다. 그것은 곧 아직 개방되지 않은 새로운 관점에서 비롯된 무한한 연구의 여지를 포함한다. 여기서 다루어진 것은 내감이라는 단 하나의 개념에 불과하지만, 이 개념을 포착하고 일신하려 시도했던 다수의 무명 철학자는 도래할 철학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준비를 이미 시작했다.이무영 | 전남대 철학과에서 데카르트 철학을 중심으로 서유럽 후기 중세와 초기 근대를 연구한다.
자세히보기≪빤짜스깐다까비바샤≫(Pañcaskandhakavibhāṣā)에 보이는 스티라마띠(Sthiramati)의 물질(rūpa)에 대한 경량부적 이해이수진 | 경상국립대학교 철학과 강사이끄는 말‘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은 불교 전공자가 아니라도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 것’, 즉 이 ‘세상의 온갖 것이 단지 마음일 뿐’임을 뜻한다. 이는 불교의 주요 학파이자 동아시아 불교의 사상적 주류라 할 수 있는 유식학파(Vijñānavāda 唯識學派)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문구이다. 유식(唯識, vijñaptimātra)은 말 그대로 ‘오직 표상(vijñapti)일 뿐(mātra)’ 외계 대상 자체를 부정한다. 그런데 유식학파가 말하듯, 우리가 지각하는 이 세계가 정신인 마음일 뿐이라면,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고 손에 만져지는 이 외계 대상 혹은 물질이란 무엇인가? 불교 내 유력 학파였던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 說一切有部)(이하 유부)는 유식과 달리 외계 대상은 실체로서 엄연히 존재한다.[實有] 그리고 유부의 강력한 대론자였던 경량부(Sautrāntika 經量部)는 외계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실체가 아닌 추리 혹은 요청되는 것[假有]이다. 이렇듯 각 학파는 자신들의 철학 체계와 맞물려 인식의 대상으로서 외계의 존재 유무에 대해 전혀 다른 입장을 가진다. 그들의 철학체계에 따라 물질에 대한 다른 견해를 제시하게 된다. 그렇기에 물질이란 불교 내 주요 학파 간 이념의 차이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이에 유식학자인 스티라마띠(Sthiramati 安慧, 500-570년 경)의 Pañcaskandhakavibhāṣā(이하 PSkV)의 Rūpaskandha(色蘊)를 중심으로, 각 학파 간의 물질(rūpa)에 대한 이해와 유식의 이론적 근거를 살펴보았다. PSkV는 Abhidharmakośabhāṣya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하 AKBh)의 저자인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400-480년 경)의 Pañcaskandhaka 《오온론(五蘊論)》(이하 PSk)의 주석서이다. PSk는 형식적인 면에서는 유부의 구성을 따르고 있는 반면, 내용적인 면에서는 유식의 주요 술어인 알라야식(ālayavijñāna 阿賴耶識) 내지 진여(tathāta 眞如) 등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유부와 유식사상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불교사상사적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문헌이며, 스티라마띠는 PSkV에서 이 양립하는 두 사상체계를 유식의 관점으로 풀어가고 있다. 1. 형태는 존재하는가?아비달마 전통, 유부에서는 시각[眼根]의 대상인 물질[rūpa 色]을 색깔[varṇa 顯色], 형태[saṃsthāna 形色] 그리고 표색(表色 vijñapti) 세 가지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 색깔과 형태의 본질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양적 최소단위인 극미(極微 paramāṇu)이다. 그런데 경량부는 유부와 달리 형태와 표색을 부정하고 색깔[극미]만을 인정한다. 그들에 따르면, 형태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색깔의 일정한 배열에 의한 집합체이다. 따라서 형태는 개별적 실체로 직접지각 되는 것이 아닌 복합체로서 개념적 존재[假有]이다.스티라마띠 역시 경량부와 같이 형태란 존재하지 않으며 색깔극미의 집합으로 보았다.길쭉함 등의 인식이 있을 경우에, 그 길쭉함 등의 형태가 있다. [형태를 인식할 때 형태가 존재한다는] 그런 경우, 색깔 등과 분리된 [다른]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인가? 왜냐하면 색깔 등의 집합이 한 방향으로 향하여 연장되어, 보다 클 때 ‘길쭉함’이 인식되고, 보다 작을 때 ‘짧음’이 인식되고, 사면(四面)이 같을 때 ‘모남’이 인식되고, 모든 면이 같을 때 ‘둥긂’이 인식되고, 일정하게 향할 때 ‘평평함’이 인식되고, 일정하지 않게 향할 때 ‘기우뚱함’이 인식되기 때문이다.형태는 색깔[극미]의 집합으로서 색깔이 어떻게 배열되는지에 따라 붙여진 이름일 뿐, 실체가 아닌 가설적 존재이다. 경량부는 유부가 주장하는 표색 역시 부정한다. 표색은 인간 행위의 내적 의지 내지 의사(cetanā 思)가 밖으로 드러난 것으로서, 유부에서는 의도(=의사)했던 행위가 완성된 시점의 특정한 신체의 모습[형태]을 행위의 본질로 보았다. 반면 경량부는 신체의 형태가 아닌 의사가 행위의 본질이다. 형태[극미]를 인정하지 않는 경량부에게 있어 표색은 의지(=의사)가 단절 없이 지속되며 이어지다가 특정한 신체의 형태를 통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스티라마띠 역시 표색의 본질을 의사로 보며 색깔극미만을 실체로 인정한다. 하지만 스티라마띠는 눈의 대상인 물질[色境]에 대한 논의의 말미에, 경량부가 주장하는 ‘색깔극미 역시 궁극적 측면(paramārtha)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드러낸다. 물질에 대한 PSk의 분류는 세상 사람들과 불교 전문가에게 잘 알려진 것[통념 내지 관습]을 따라 기술한 것일뿐, 이 외계 대상으로의 물질이란 궁극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식의 견해를 취한다. 유식(唯識 vijñāna-mātra)에서 외계는 존재하지 않듯이, 외계 대상을 전제로 인식이 생겨나지 않으며, 그렇기에 외계를 구성하는 물질의 최소단위인 극미 자체를 부정한다. 2. 무표색과 법처소섭색무표색(無表色 avijñapti)은 유부에서 행위의 인과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개념이다. 아비달마 불교 전통에서 물질은 다음 세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첫째 볼 수 있고 저항이 있는 것(sanidarśana-sapratigha), 둘째 볼 수 없고 저항이 있는 것(anidarśana-sapratigha), 셋째 볼 수 없고 저항이 없는 것(anidarśana-apratigha)이다. 첫째는 시각의 대상인 물질[色境]이며, 둘째는 눈 등의 다섯 감관과 소리, 맛, 냄새, 촉감의 대상이며, 셋째는 무표색이다. 이것은 극미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공간을 점유(저항성)하지도 않기에 시각[안근]의 대상이 아닌 제6의식[意根]의 대상인 법처에 포함시켜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 dharmāyatanika rūpa)이라고 한다. 유부의 특징적인 색법관을 반영하고 있는 이 무표색은 4대종을 원인으로 하기에 물질이지만 물질이 아닌 제6의식의 대상인 정신 혹은 개념이다. 그런데 경량부는 무표업 역시 부정한다. 바로 물질의 특징인 공간적 점유성을 가지지 않는 것을 물질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형태극미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형태극미의 집합체인 표색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무표색 또한 비실재인 표색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기에 비실재이다. PSkV에서 역시 스티라마띠를 통해 경량부의 이러한 이해를 확인할 수 있다.그리고 여기서 유부(Vaibhāṣika)가 [실재하는 존재(dravyasat)로] 상상해낸 표색과 같이, 무표색 역시 [실재하는 존재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당한 인식수단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스티라마띠는 유부의 법처소섭색인 무표색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경량부와 달리 유식에서는 법처소섭색을 인정한다. 유식은 유부에서 고안한 물질이지만 물질이 아닌 법처에 포함되는 색(물질)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자신들의 이론적 토대로 가져온다. 그리고 이에 포함되는 물질의 범위를 무표색 뿐만 아니라 더욱 확장한다. 극미마저 법처에 포함되는 색인 극략색(極略色 ābhisaṅkṣeika) 등 개념 혹은 정신적 요소로 규정한다. 스티라마띠는 극략색은 색깔극미로, 극형색은 형태극미로, 수소인색(受所引色 sāmādānika)은 무표색으로 대응시키고 있다. 유부가 제시한 법처에 포함되는 물질이라고 하는 범주[法處所攝色], 다시 말해 물질을 모두 제6의식[意根]의 대상인 정신적인 것으로 환원시킨다. 더 이상 외계 대상으로서 실재하는 물질은 없고 다만 의식 혹은 정신의 대상인 개념 내지 이미지만이 물질이다. 무표색과 법처소섭색에 대한 스티라마띠의 이해는 물질과 정신의 경계가 약해지고 있음을 시사하며 ‘오직 표상일 뿐’인 유식이 정립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나가는 말스티라마띠는 PSkV에서 외계 대상인 물질에 대해 유부의 물질관을 토대로 논의를 시작하지만, 경량부의 견해로 이를 비판한다. 그가 취하는 경량부적 태도는 본 문헌의 특징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Sk는 불교 입문자를 위한 짧은 개론서이다. 불교의 주요 개념 및 술어를 익히고 학습하기 위한 교재이다. 이런 측면에서, 스티라마띠는 아비달마 전통인 유부를 기초로 하여 그들의 강력한 대론자였던 경량부의 입장에서 그들을 비판함으로써 불교사상사적 주요 쟁점들을 파악할 수 있는 표본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이 논쟁 속에서 각 학파의 주요 사상적 흐름을 충분히 학습할 수 있게 된다. 그는 경량부를 통해 유부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유부의 교학체계가 가지는 논리적 모순을 지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유부를 비판하는 경량부의 견해마저 세상의 관습 내지 통념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고 결론 지으며, 유식의 가르침을 궁극적 측면(paramārthata)으로 위치시킨다. 이로써 그는 유식을 유부와 경량부 위에 둘 수 있게 된다. 스티라마띠가 PSkV의 Rūpaskandha에서 보여주는 경량부적 이해는 불교의 대표적인 학파 간의 사상적 흐름을 학습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함과 동시에 유식을 유부에서 독립된 사상체계로 정립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 각주와 참고문헌을 포함한 완전한 글은 종이책자를 통해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이수진 | 경상국립대 철학과 강사로서 를 가르치고 있다. 본교에서 「동아시아 儒佛道 三敎交涉의 發端과 爭點 - 牟子 『理惑論』을 중심으로 -」 석사학위 논문을, “스티라마띠(Sthiramati 安慧)의 Pañcaskandhakavibhāṣā를 통해 본 불교 주석문헌의 형성과 성립”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요가학파의 무명관 - 불교와 관련하여 -」가 있다.
자세히보기연구의 시작, 그럴듯한 직관사유의 갈증, 문성균의 길인터뷰어 | 차봉석, 장세훈, 이주희2025년 신년 근황을 물었더니, 새해부터 골골대는 와중에 ‘학문적인 발견’을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는 이 사람.그를 움직여온 학창 생활, 전공, 잡담의 힘에 대해서 문답을 진행해 보았다.인터뷰어|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문성균|저는 경상국립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문성균이라고 합니다.인터뷰어|구체적인 연구 분야와 현재 관심사는 무엇인지요?문성균|구체적인 연구 분야는 들뢰즈 철학이고, 주로 프랑스 현대 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현재 관심사라기보다, 꾸준한 관심사는 프랑스 현대 철학에서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지를 중점적으로 보고 있어요. 최근에는 들뢰즈의 표현주의 철학과 생기론적 철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요 연구 영역은 형이상학 분야이고요. 베르그송이 생명을 철학, 또는 사유의 바탕에 두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들뢰즈에게서 생명에 바탕을 두는 형이상학을 표현주의 철학과 관련해서 검토해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형이상학 없는 제일 철학과는 반대로, 제일 철학 없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거예요. 이런 형이상학을 베르그송을 따라서 ‘생명 형이상학’이라고 불러볼 수도 있을 듯한데요. 어쨌든, 그건 생물학의 철학과는 구별됩니다. 생물학의 철학은 여전히 제일 철학에 기반하지만, 생명 형이상학은 그런 토대를 정초하거나 비판하는 철학과는 조금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어|철학 공부를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문성균|특별한 계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부터 홀로 지내다 보니까 책에 시선이 갔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에 스며들었던 것 같아요. 또 제 캐릭터가 주위 친구들이 주로 하는 놀이라든지 게임 그런 데에 흥미를 못 느끼는 성격이어서 또래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시간을 할애하였고 그게 자연스럽게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대학 생활에 대해인터뷰어|이제 막 박사과정을 수료하셨는데요. 지난 학창 시절을 돌아본다면요?문성균|학부 그리고 대학원 생활하면서 재밌는 일들이 많았어요. 저는 특히 학부 1학년 때는 거의 놀다시피 했기 때문에 학점이 1점대가 나오고 F도 몇 개 받고 그럴 만큼 놀았어요. 그때 같이 놀았던 친구들 중 한 명이 우성이었어요. 재미있는 일이 정말 많았는데요. 예를 들면 방학 때 친구들이랑 같이 있다가 저녁에 할 게 없으니까 뭐 할까 하다가 심야 버스를 타고 광안리에 갔었던 거? 거기 가서 밤을 새우고 새벽 버스를 타고 돌아왔던 기억이 나네요. 대학원 시절에는 프랑스에 갔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저는 그때 당시에는 유학생은 아니었고 그냥 어학을 공부하러 갔었던건데, 이미 유학 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으면서 기존의 공부하던 방식이나 습관에서 벗어나 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인터뷰어|경상국립대에서 철학과 학부부터 대학원까지 쭉 이어오셨죠? 문성균|네. 저는 돌이켜 보면 진로를 빨리 정한 편에 해당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학부 3학년 때부터 이미 대학원에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학원 수업을 청강하고 대학원생들과 같이 지내는 시간을 점차 늘려갔어요. 전공과 관련해서는 들뢰즈 철학의 어떤 그럴듯함이랄까요? 그러니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글쓰기에서 보이는 어떤 깊이에 매료됐던 것 같고, 저를 현혹하는 말들에 낚여서(?) 들뢰즈를 공부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학부 때 대학원을 가야겠다고 생각을 할 때쯤에는 실상 들뢰즈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던 거죠.인터뷰어|결과적으로, 들뢰즈의 말솜씨에 현혹 되어서 철학과 대학원까지 오게 되신 거네요? 문성균|그렇죠. 그래도 현혹되는 말들이나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라도, 그 말들을 통해서 각자가 가지게 되는 직관들이 있고, 그 직관이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거기에 상응하는 결정을 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가지고 있었던 ‘직관’이라고 하는 것이 크게 바뀌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이제 공부를 더 해보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의미들이 구체화 되고, 그 맥락들이 명료해지는 부분들이 생겨났죠. 어쨌든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거나 학문적으로 진로를 결정할 때는 그런 직관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직관이 있어야 이것을 공부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기게 될 것이고 좀 더 주도적으로 또 흥미롭게 공부할 수 있는 힘이 생길테니까요. 그런 직관이 맞든 아니든, 만약 아니라면 공부하면서 고치면 된다고 생각해요.인터뷰어|보통 학부생들이 대학원 수업에 대해서 겁을 먹거나 부담스러워 할 수 있는데, 어떠셨어요?문성균|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그때 저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용감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학부 수업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그런 갈증을 대학원 수업에서 풀어보려고 했어요. 그게 초반에는 잘 충족이 됐던 것 같아요. 대학원생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스스로 다양한 철학적인 소양들을 쌓을 수 있게 됐거든요. 그때는 뭐 두렵다거나 무섭다기보다는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재밌었습니다.인터뷰어|지금은 프랑스 유학을 준비 중이시죠? 문성균|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 건, 들뢰즈의 철학을 프랑스라고 하는 지리 영토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들뢰즈를 좀 더 깊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입니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어떤 사상적 기반 또는 문화, 분위기가 들뢰즈 철학을 구성해냈는지가 일단 궁금했어요.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관심을 가진 주제인 생의 철학이 국내에서는 접근하기 조금 어렵기 때문이에요. 독일의 19세기 생 철학에 대해서는 국내에 어느 정도 소개가 되어 있고 공부하기도 수월해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20세기 프랑스의 생 철학에 대해서는 국내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요. 그런 맥락에서 프랑스에 가기로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정을 하고 난 이후에는 석사를 마치고 한 2년 간 일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유학 자금을 모으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어떤 주제로 학위논문을 쓸 건지 구체화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지금은 해당 주제와 관련된 교수를 찾아보고 컨택하는 과정 중에 있고요. 어쨌든 유학을 가겠다고 결정을 하는 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결심을 한 이후에는 그냥 일반적인 절차에 따라서 해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인터뷰어|워낙 속내를 잘 비치지 않는 성향이신데, 유학과 관련해서 걱정되는 부분은 없으신가요? 문성균|걱정되는 부분들이 당연히 있고 지금도 계속해서 우려하고 있죠. 그래도 어쨌든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은 확고한 것 같아요. 지금으로서는 제가 붙잡고 있는 주제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 주제와 관련해서 깊이 있는 연구를 하지 않고서는 갈증이 해소될 것 같지가 않아요. 걱정은 그다음 문제죠.전공의 매력에 대해인터뷰어|프랑스 현대 철학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특별한 매력을 느끼신 건지?문성균|특별히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제가 학부를 다닐 때 주로 들었던 전공 수업을 맡고 계셨던 분이 신지영 선생님이셨고, 신 선생님께서 프랑스 철학 특히 들뢰즈 철학을 연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들뢰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것 같아요. 만약에 제가 2학년 때부터 이성환 선생님 수업을 들었다면 지금 하이데거를 공부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최근에 공부하면서 느끼는 건데 저는 오히려 독일 철학의 스타일이 잘 맞는다는 생각을 해요. 프랑스의 어떤 재치라든지 번뜩이는 아이디어보다는 독일적인 깊이나 엄밀함 이런 것들을 좀 더 추구하고 또 그렇게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 같고, 그런 맥락에서 보면 제가 베르그송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됐던 이유도 그런 데에 있는 것 같아요. 들뢰즈와 동시대 철학자들 같은 경우에는 재치 있는 표현들이라든지 흥미로운 아이디어 이런 것들이 두드러지지만 베르그송에게는 그보다는 좀 더 엄밀하고 체계적인 사유가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런 맥락에서 들뢰즈를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인터뷰어|베르그송 철학에 대한 일종의 ‘직관’을 느끼셨던 거네요? 문성균|베르그송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결국 우리가 어떤 철학을 하기 위해서 또는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고유한 직관을 가질 필요가 있고 그 직관을 설명하기 위해서 애쓰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과학 같은 경우에는 특정한 공리를 기반으로 상식과 양식에 따라서 탐구를 전개한다면, 철학의 경우에는 그런 객관성의 공리보다는 각 철학자가 가지게 된 직관을 어떻게 개념적으로 풀어내는지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보면 철학자로서 어떤 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결국에는 자기의 내면으로 침전해 들어가는 그런 계기들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게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서 만나는 것은 결국 타자들과 함께하는 그런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어떤 직관을 갖게 되었는지, 직관을 어떤 표현들을 통해서 설명하려 하는지는 결국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와 관련되기 때문이지요.인터뷰어|그럼, 프랑스 현대 철학이 한국이라는 세계, 공동체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문성균|철학은 어쨌든 실용적인 관심에서보다는 사변적인 관심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가 하려는 형이상학이나 생 철학의 경우는 더욱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들뢰즈의 철학도 한국인들에게 그렇게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들뢰즈 철학은 어쨌든 프랑스라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철학이고, 그와 분리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국 사회 또는 한국인들에게 들뢰즈의 철학을 그대로 주입하고 이식하는 것은 불가능한 거죠. 다만 이식이라든지 주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변형이 이루어져야 하고, 한국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것들을 수용하려고 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고 생각합니다. 어떤 식으로 이런 것들이 이루어질지는 저뿐만 아니라 들뢰즈 철학이든 서양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고민해야 하는 과제이고요.인터뷰어|학문적 목표가 있나요? 문성균|개인적인 목표가 있다면, 첫 번째로는 들뢰즈 철학의 고전적인 차원들을 해명하고 싶어요. 이때 고전적인 차원이라는 것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신플라톤주의까지 고대철학이 가지고 있었던 성격들을 들뢰즈 철학 내에서 밝혀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생 철학이라는 흐름 속에 들뢰즈를 개입시키는 거예요. 흔히 들뢰즈에게는 생명의 철학자라는 수식어가 붙죠. 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해명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요. 프랑스 철학에는 베르그송, 캉길렘, 뤼에, 시몽동에 이르는 생 철학의 흐름이 있는데, 그 흐름 속에 들뢰즈가 어떻게 개입하고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지를 밝혀 보여주고 싶은 것이죠. 그 과정에서 고전적인 측면들, 즉 표현주의적인 사유나 생기론적인 철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해명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인터뷰어|이따금 들뢰즈 철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와 마주할 때는 어떤 생각이 드세요? 문성균|저는 석사, 또 박사 초기 때까지만 해도 그런 비판 또는 공격에 대해서는 주석가로서 들뢰즈라고 하는 성지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좀 많이 희석된 것 같아요. 이제는 연구할 때 주석가로서의 위치보다는 철학 연구자로 자리매김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에는 나의 사유를 어떻게 형성하고 어떤 식으로 풀어낼지를 좀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들뢰즈의 철학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동시에 철학사 내에 자리매김할 건지에 좀 더 관심이 있습니다. 들뢰즈 철학이 어떤 지점에서 잘못되었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는 들뢰즈의 철학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하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개념들 사이의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와중에 철학사를 어떤 방식으로 읽어내고 있는지가 중요해 보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들뢰즈 철학을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지, 또 어떻게 다른 철학자 혹은 다른 사유와 접목해 볼 수 있을지에 좀 더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인터뷰어|공부를 하다보면 지치거나 피곤할 때도 있잖아요. 혹시 머리를 식히기 위한 취미가 있나요?문성균|취미라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공부를 안 할 때는 드라마를 많이 봐요. 웹소설도 좋아하고요. 제가 이야기를 좋아하거든요. 중고등학교 때는 무협지를 엄청 많이 읽었는데 요즘은 종이책 시장이 어려워지면서 접근하기가 어려워졌잖아요. 그러면서 최근에 웹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인터뷰어|본인만의 피로 해소법이나 기분 전환 모멘트가 있는지 궁금해요.문성균|일단 공부하다가 머리가 무겁다거나 뇌가 하루 분량을 다 한 것 같다 싶으면 일단 눕습니다. 누워서 천장을 보거나 드라마를 보는 거죠. 그렇게 또 한 30분 있다 보면 괜찮아지거든요. 그러면 다시 앉는 거예요.인터뷰어|인생의 목표가 있나요?문성균|개인적인 목표라면 책을 출판해 내는 거예요. 저는 특히 연구서를 써보고 싶습니다. 좋은 연구서요. 소위 대박이 나는 책보다는 오래도록 읽히는, 그러니까 연구사에서 고전이 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인터뷰어|책을 쓴다면 외국어로 쓰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국내에서 널리 읽힐 수 있는 책을 원하시는 건가요? 문성균|저는 능력이 되고 가능하다면, 불어로 써보고 싶긴 해요. 우리나라 학계의 연구 풍토보다는 프랑스의 학계가 좀 더 잘 되어 있다고 생각 하거든요. 프랑스 내에서 논문부터 시작해서 단행본까지 출판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어쨌든 불어로 연구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는 있는데 쉽지는 않겠죠.인터뷰어|수료자로서, 대학원에 들어올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문성균|저는 혼자 공부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글을 쓰는 일은 혼자서 겪어내고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동시에 다른 학우들이랑 함께 책을 읽는 시간도 혼자 공부하는 시간만큼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전적인 저서들은 혼자 읽기보다는 같이 읽는 것이 더 좋지 않나 생각해요. 왜냐하면 어쨌든 혼자 공부하는 시간을 통해 가지게 된 문제라든지 물음, 자기 이해를 같이 읽으면서 해결할 수 있고 확인할 수 있고 수정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무엇보다도 같이 읽는 것이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재밌습니다. 혼자 공부하면 좀 지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함께 공부하면서 같이 웃고 떠들면서 생각도 한기하는 거죠. 그래서 앞으로 어떤 후배들이 대학원에 올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공부하는 시간만큼 같이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자세히보기인공지능 시대의 철학 나침반, 『이것이 기술윤리다』 윤준식 |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스벤 뉘홀름, 윤준식‧박형배 옮김, 『이것이 기술윤리다: 인공지능 시대의 철학 나침반』(그린비, 2025). 안녕하세요,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윤리학 분야 담당 강사 윤준식이라고 합니다. NOWHERE와 인연을 맺은 지도 어느덧 3년차에 접어들었습니다. 2023년 9월호에서 한국철학자대회의 학문후속세대 세션 참가 및 발표 후기를 작성했었죠. 당시 후기를 작성해야한다는 사명감에 더 높은 집중력을 발휘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도 귀한 지면을 내어주시고 제가 공역한 책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소개해 드릴 책은 Wiley-Blackwell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철학 입문서 시리즈 ‘This Is Philosophy’의 This Is Technology Ethics: An Introduction(2023)를 완역한 『이것이 기술윤리다: 인공지능 시대의 철학 나침반』(윤준식‧박형배 옮김, 2025)입니다. 지난 2월 말 인문학‧철학 분야 전문 출판사 ‘그린비’에서 출판된 따끈따끈한 책입니다. 먼저 저자를 소개하고 제가 이 책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주요 내용은 무엇인지, 아쉬운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강점은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자 스벤 뉘홀름(Sven Nyholm)은 뮌헨대학교(Ludwig-Maximilians-Universität München) ‘철학‧과학철학‧종교학부’의 인공지능 윤리 전공 교수로서, 인간 두뇌 프로젝트의 윤리 자문 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Science and Engineering Ethics 저널의 부편집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포함해 현재까지 세 권의 단독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첫째는 그의 미시간 대학교 철학박사 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편집한 것으로서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한 영미권의 주류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Revisiting Kant’s Universal Law and Humanity Formulas(2015)입니다. 둘째는 로봇의 행위성 및 의인화 문제를 로봇과 인간의 협력 혹은 팀이라는 관점에서 윤리적으로 고찰한 Humans and Robots: Ethics, Agency, and Anthropomorphism(2020)입니다. 세 번째 책 『이것이 기술윤리다』(이하 TTE)에는 저자가 그동안의 연구 이력을 통해 쌓아 온 윤리학 및 기술윤리에 대한 폭넓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뉘홀름은 자율주행차, 로봇, 인공지능 등 신기술의 개발과 활용에 따르는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을 연구해 왔습니다. 인간과 기술의 협력적 관계를 강조하는 그의 관점은 기술윤리 분야에서 많은 이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박사학위논문을 쓰던 중 저자와 이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박사학위논문의 주제는 기술적 수단을 활용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향상시키려는 시도와 관련된 여러 윤리적 쟁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입니다. 이때 활용되는 기술적 수단에는 ‘인공지능’도 포함되기 때문에 학위논문의 한 장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한 도덕 향상을 다루게 되었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던 중 뉘홀름의 논문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의 연구가 꽤 흥미로웠기 때문에 그의 연구 이력을 검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TTE를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과 기술윤리 전반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와 몰입, 감탄의 단계를 지나서 번역하겠다는 결심, 번역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학위논문 심사를 앞두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여러모로 무리인 듯했지만, 이 책이 국내에 가능한 한 빨리 소개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022년 가을학기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에서 신설된 학부 전공과목 강의를 맡으며, 기술윤리 분야에 대한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교재의 부재를 절실히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존에도 기술윤리의 개별 주제에 대한 윤리학적 논의들을 묶은 책이나 공학자들을 위한 공학윤리 교재는 일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기술윤리(학)’의 이론적·방법론적 기초를 체계적으로 제공하면서도 우리 사회의 가장 논쟁적인 기술윤리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책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책이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TTE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면서도, 탄탄한 윤리학적 기반 위에서 기술 개발과 활용에 관한 여러 윤리적 쟁점을 논증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1~3장에서는 기술윤리의 이론적 토대를 다집니다. 1장에서는 기술이 무엇인지 다루며, 기술을 단순한 도구로 보는 관점뿐만 아니라 기술이 인간과 세계를 매개해 인간의 인식과 존재를 재형성한다는 기술 매개 이론 혹은 포스트현상학적 관점도 설명합니다. 현대 기술철학 및 과학기술학의 폭넓은 흐름을 반영한다는 점이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2장에서는 윤리란, 기술윤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면서 서구의 주요 규범 윤리 이론인 칸트 윤리학, 공리주의, 덕윤리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의 우분투 윤리, 동아시아의 유가 윤리 등 비서구 전통의 관점도 함께 논의합니다. 3장에서는 자율주행차에 대한 윤리적 논의를 중심으로 해당 맥락에서 활용된 기술윤리의 다양한 방법들을 각각의 장단점과 함께 소개하며 방법론적 다원주의를 옹호합니다. 4~6장에서는 인공지능 윤리의 핵심 주제인 가치 정렬, 통제, 책임과 같은 문제를 깊이 있게 살핍니다. 4장에서는 인간의 가치에 부합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이를 인간의 완전한 통제 아래 두는 일이 왜 어려운지에 대한 주제를 상세하게 다룹니다. 5장에서는 운동이나 공부와 같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더 잘 이루어 내도록 돕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행동 변화 기술이 어떻게 우리의 통제력을 오히려 약화시킬 수 있는지, 통제는 언제나 좋은 것인지와 같은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6장에서는 첨단기술이 초래하는 책임 공백 문제의 복잡한 양상을 조명하며 인간과 기술의 협력적 관계에 주목합니다. 저자는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이 일정 수준 이상의 기능적 자율성을 지닐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결국 기술의 사용과 개선에 대한 결정이 인간에게 달려 있으므로 궁극적 책임의 주체도 인간이라는 입장을 옹호합니다. 7~9장과 결론에 해당하는 10장에서는 기술이 인간이 속한 도덕적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과 기술의 결합이 초래할 수 있는 문제를 주로 다룹니다. 7장에서는 기계가 이유에 근거해 행위하는 도덕적 행위자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존재로 설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의합니다. 8장에서는 로봇과 같은 일부 기술이 도덕적으로 고려될 필요가 있는 도덕적 지위를 지니는지와 관련된 비판적 논의를 전개합니다. 9장에서는 이전 장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기술과 인간이 친구나 연인과 같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또는 기술의 매개를 통해 그러한 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적절한지에 대한 문제를 살펴봅니다. 마지막으로 10장에서는 트랜스휴머니즘, 포스트휴머니즘 등 인간과 기술의 결합에 대한 논의를 언급하면서 이러한 미래에 대한 독자들의 신중한 검토와 성찰을 요청합니다. 이 책은 기술윤리의 본질, 기술과 관련된 핵심 윤리적 쟁점들, 그리고 이를 둘러싼 현대적 논의의 흐름에 대한 체계적인 개요를 제공합니다. 물론 이 책을 완벽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전제에서 결론에 이르는 논증적 성격의 철학 전통에 충실한 저자는 오늘날 ‘AI윤리’라는 표현 속의 윤리 개념이 함축하는 가치, 규범, 거버넌스 등의 넓은 의미를 모두 담아내는 접근을 취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책의 초반부에서 저자도 인정하듯 첨단 기술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오래된 기술도 기술임이 분명하지만, 이 책은 주로 자율주행차, 로봇, 인공지능 등 오늘날의 신기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과 윤리에 접근하는 이 책의 종합적인 관점은 더 넓은 범위의 기술윤리 논의에 더 관심을 갖는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유용한 통찰을 제공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향후 제가 맡게 될 ‘기술윤리’ 관련 과목의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이 책을 번역했습니다. 실제 2024학년도 가을학기에 이 책의 초벌 번역본을 교재로 사용했고 수강자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게다가 이 책은 학계의 최근 논의를 다룰 때 정직하게 논자들을 인용하고 각 장 마지막의 ‘주석 달린 참고문헌’을 제공함으로써 전문가들의 연구와 연구 관심 확장을 돕습니다. 무엇보다도 기술, 윤리, 철학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계신 교양 독자분들도 충분히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기술윤리 관련 교과목에 적절한 교재를 찾고 계신 교육자, AI윤리를 포함한 기술윤리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연구자, 기술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성찰하기 원하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 흥미롭고 친절한 이 책을 통해, 다소 딱딱하게 여겨지던 ‘윤리’에 대한 인식이 바뀌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기술에 대한 윤리적 접근이 우리 각자의 삶에 얼마나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 참고로 이 글은 스벤 뉘홀름, 윤준식‧박형배 옮김, 『이것이 기술윤리다: 인공지능 시대의 철학 나침반』(그린비, 2025)의 "역자 후기"를 토대로 작성된 것입니다. 윤준식 |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강사로서 윤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일반사회교육과 윤리교육을 전공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윤리교육과에서 칸트의 도덕적 진보 사상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 논문을, 기술적 도덕 향상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연구 분야는 생명/기술윤리, 규범윤리 및 윤리교육이며, 주요 논문으로는 “Antinatalist Challenges to Korean Pronatalism”(forthcoming), “Biomedical Moral Enhancement for Psychopaths”(2025), “냄새의 윤리학: 속 냄새 혐오 문제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2025), “인공지능을 활용한 도덕 향상에 대한 비판적 검토”(2024), “‘스스로를 죽일 권리(Right to Kill Oneself)’에 관하여”(2021) 등이 있다.
자세히보기돌봄을 다시 생각하다『우리에겐 더 많은 돌봄이 필요하다』를 읽고강지연오이코스연구소 엮음, 박현순, 박문정, 손우정, 박지원, 김운하, 김서현, 송은주, 심귀연 지음, 『우리에겐 더 많은 돌봄이 필요하다』(지혜의산, 2024).돌봄의 두 얼굴?‘돌봄(care)’이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누군가를 보살피는 따뜻한 손길, 혹은 피로에 지친 얼굴? 나에게 돌봄은 단지 업무였다. 2020년, 코로나19가 시작되었을 때 초등학교 교사인 나는 ‘돌봄 관리’ 업무를 맡았다.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 돌봄은 필수적이었지만, 그것이 내게 의미하는 바는 단순했다. 늘어나는 업무, 감당해야 할 책임. 돌봄에 대해 깊이 고민할 여유조차 없이, 그것은 단순히 힘겨운 노동으로 각인되었다. 가정에서 아이들과 남편을 돌보는 것도 버거운데 출근해서도 돌봄을 해야 한다니. 나를 돌봐줄 사람은 없는 걸까? 나에게도 돌봄이 절실했다. 그런 내가 『우리에겐 더 많은 돌봄이 필요하다』를 집어 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돌봄은 정말 피할 수 없는 업무이고 힘겨운 노동이기만 한 것일까? 그렇다면 누가 이 힘겨운 노동을 맡을 것인가? 돌봄은 삶과 분리할 수 없는 문제다.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우리에게 돌봄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다. 그러나 돌봄의 중요성은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고, 그 가치는 종종 평가절하되었다. 이 책에서는 여덟 명의 저자가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영역(보편, 자기, 아이, 노인, 젠더, 가족, 장애, 동물)의 돌봄을 조명한다.『우리에겐 더 많은 돌봄이 필요하다』는 돌봄을 통해 형성되는 관계와 그 따뜻함을 보여 주는 동시에 돌봄이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과도하게 요구될 때 발생하는 불균형을 짚어낸다. 돌봄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이지만, 그 무게를 특정한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현실 속에서 소진과 불평등의 문제를 낳기도 한다.돌봄이 만들어낸 삶의 궤적이 책에서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이야기는 박문정 작가의 ‘돌봄은 세상으로 나가는 걸음마’였다. 그는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세대다. 1989년 명문대학에 입학할 때 그의 어머니는 딸을 "나라의 딸"로 내놓는다고 말씀하셨단다. 이는 딸이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독립적인 개인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혼과 육아를 거치며 그는 다시 가정으로 돌아와 돌봄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돌봄은 그에게 좋은 엄마와 커리어우먼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요구했다. 나 역시 직장 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며 비슷한 고민을 했기에 그가 느꼈던 절망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희생이란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돌봄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 그는 자기 돌봄을 실천하며, 가족 돌봄에서 배운 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신의 가능성을 펼쳐나간다. 공대생이었던 그는 윤리교육학 박사학위를 따고, 강단에 서서 학생들과 만나고 창업도 시작했다.박문정 작가는 돌봄으로 인해 좌절을 겪었지만, 동시에 돌봄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시 구축했다. 돌봄이 삶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확장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돌봄의 패러다임은 변할 수 있을까?내 어머니 시대에 ‘돌봄’은 특정 성별이나 개인의 몫으로 여겨졌다. 돌봄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여성의 노동으로 당연시되었다. 사회가 변화하며 일부 돌봄이 공적 영역으로 이동했지만, 여전히 가정 내 돌봄의 책임은 여성에게 더 크게 부과되는 게 현실이다. 나는 ‘슈퍼우먼’을 강요받던 시대에 살았다. 직장과 가정을 모두 책임지는 것이 당연했고, 어느 한 쪽이라도 소홀하면 죄책감이 따라왔다.그러나 일방적인 돌봄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나는 아이들과 가족을 사랑했지만, 돌봄이 한 사람에게 집중될 때 그것이 결국 소진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나를 사랑하는 가족도, 나 자신도 원했던 방향이 아니었다. 책에서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상호 돌봄’을 제시한다. 나 역시 소진을 경험했을 때, 가족들로부터 돌봄을 받으며 그 의미를 다시 깨달았다.오늘날 결혼을 기피하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족(DINKs, Double Income No Kids)이 늘어나는 현상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돌봄이 개인에게 과도하게 요구되는 현실에 대한 사회적 반응이다. 돌봄이 필수적인 행위임에도, 그것이 특정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유지될 때 사람들은 돌봄을 감당하기보다 거부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돌봄은 삶의 방식이다우리는 돌봄을 통해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서로의 삶을 지탱한다. 중요한 것은 돌봄을 개인의 부담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나누어야 할 가치로 인식하는 일이다. 돌봄이 희생이 아닌 공유해야 마땅한 긍정적 가치가 될 때,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돌봄을 받으며 자라고, 성장하면서 타인을 돌보게 된다. 돌봄은 특정한 누군가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가치다. 박문정 작가의 이야기에서 보듯, 돌봄은 때로는 우리의 길을 막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이 책은 돌봄 해설서가 아니라 돌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하는 책이다. 이제 우리는 돌봄을 어떻게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강지연 | 초등교사로서 교육 현장에서 35년을 보내며, 교육과 돌봄이 맞닿아 있는 순간들을 매일 마주하고 있다. 오랜 교직 생활 속에서 교육이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사고하고 질문하는 힘을 길러주는 과정임을 실감해 왔다. 2018년부터 진주문고에서 철학 강의를 들으며 철학의 깊이에 매료되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철학 독서 모임을 꾸려 2025년까지 이어오고 있다. 철학을 통해 교육과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고자 하며, 사유하는 과정이 곧 성장이라고 믿는다.
자세히보기고백 블로그박경륜 | 경상국립대 철학과 박사수료데리다 그리고 니체와 들뢰즈의 말들을 빌려 이 글을 쓴다.니체는 말한다. 사랑받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영혼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침전물을 드러낸다고. 그리고 자신을 경멸하는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를 경멸하는 자신을 존중한다고. 나는 언제나 나의 증오를 보존해왔으며, 스스로를 경멸하는 나 자신을 존중해왔다.깊은 연민이,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연민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나를 자신의 기능 중 일부로 품어주지 않는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스피노자와 니체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우리를 너의 기능 중 일부로 품어라. 그곳에 연민은 없다.”나는 어떻게 해왔는가? 먼저 고통과 증오를 최상위의 가치로 두고, 이것들의 제거를 사유의 끝으로 여겨왔다. 그리고 고통과 고통의 제거라는 두 유형만이 고정된 본질인 것처럼, 실체인 것처럼 여겼다. 즉 나는 나의 증오와 고통을 보존하려고 했으며, 그곳에서 출발하려고 했다. 이러한 출발을 거부하는 것 또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경멸하는 일이기에 용인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증오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평생 못 벗어날지도 모른다. 오히려 고통과 증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 집착이 새로운 사슬고리를 만들어왔다.건방진 말이지만 어쩌면 이 고통과 증오가 이 글을 쓰는 한 개체에 고유한 억압이자 오이디푸스가 아닐까? '이것을 모르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무지이며 무례한 것이다'란 의미로.어쩌면 이곳에 있는 의식은 무례함과 무지의 상징일지도 모르겠다. 상징이기에 그것만 보면 아무 의미도 없으며 그 표면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는 수수께끼. 그렇기에 절망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도 찾지 못했고, 그럴 능력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이것만큼은 인정하자. 이 사회라는 큰 기계는, 나라는 기계로 하여금 이렇게 작동하도록 접속되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 또한 인정하자. 이 사회는 내가 나를 싫어하게 만든 만큼, 누군가로 하여금 나에게 인정과 애정을 주도록 하고 어떤 일을 할 능력을 길러주었다는 것을. 이곳에서 하나를 택하려고 한다면 또다시 나는 벗어나는 것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살에 박힌 화살을 뽑는 것에만 집착했지, 더 깊숙이 꽂아 넣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짧은 삶속에서 나와 다르기에 경멸한다는 그 태도들이 나로 하여금 차이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만들었고, 이 증오심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해하게 해주었으며 나라는 인간을 과거보다는 더 높은 곳으로 이끌었다. 나는 다르다는 것을 증오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이 증오가 나의 동력원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증오와 고통은 수단이다. 그렇기에 제거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고통과 증오는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다르다는 것은, 차이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나는 가둘 수 있거나 없는 것들을 상정하고, 가둘 수 있는 틀을 상정해왔다. 마치 가둬야 하고 고정되어야 하는 것처럼. 하지만 나 자신도 나를 지금의 생각에 가두지 못했다. '나'라는 말을 쓰는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닌가? 가둘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 가지는 뉘앙스는 가둬야 한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낡아버릴 틀에 무엇을 담는단 말인가? 애초에 고정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고통과 증오는 애초에 없었는가? 확실한 것은 고통과 증오가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그곳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출발을 금지시키는 것이 답인가? 오히려 허락과 금지라는 분별이 문제일 수 있다. 해명된 것은 많이 없다. 하지만 물었기에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 생겼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기에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겼다. 그리고 이것들 모두가 나에게 해방감을 주었다. 무언가를 할 수 없는 것과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마주하고 받아들인 것 같다. 회피하고자 했던 것들은 모두 내 삶의 계기였다. 물론 일말의 짜증은 있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박경륜 | 2025년 2월 25일 자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경상국립대학교 들뢰즈랩 연구원으로, 들뢰즈 철학의 방향성을 좇아 게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펼치는 일에 관심이 있다.
자세히보기사회 병리 현상을 감히 사회철학적으로 말해본다면제5회 영남권 철학과 대학원 연합학술대회 후기이지수 부산대 철학과 석사과정본 글은 기고자가 자신의 생각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한 기고문입니다.Q1. 인터뷰를 진행하기에 앞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안녕하세요. 저는 부산대학교 철학과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이지수입니다. 현재 석사 4학기를 앞두고 있으며, 제가 전공하려는 분야는 독일 비판 철학자인 악셀 호네트의 인정 이론입니다. 악셀 호네트라는 철학자가 다소 생소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인정투쟁』, 『분배냐 인정이냐(공저)』 등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를 사랑-권리-연대라는 인정 형식의 부재로 보고, 소외된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가 여성운동과 성소수자 운동과 같은 인정투쟁을 통해 회복될 수 있다고 보는 이론입니다. Q2. 이번 학술대회에 명칭이 ‘사회 병리 현상에 대한 철학적 진단’이었는데요, 어떤 내용을 발표하셨나요?저는 이번 학술제에서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을 중심으로 ‘위험사회에서의 개인화와 위험의 불평등’을 주제로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문은 지난 학기에 수강했던 사회학과의 전공수업 의 기말 보고서였어요. 이 수업에서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와 『글로벌 위험사회』,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 상태』 그리고 브뤼노 라투르와 도나 해러웨이의 신유물론 등을 배웠었는데요, 그중에서도 저는 위험의 불평등성에 관심이 갔던 것 같아요. 우리가 겪는 사회적 문제들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적용되지는 않더라고요. 사회적 취약계층일수록 위험 또는 재난 상황에 더욱 노출될 뿐 아니라 교차성이 작동하여 위험이 중첩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Q3. 위험의 불평등성에 관한 논의는 종종 들어왔던 것 같은데요, 특히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을 택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예리한 질문인걸요. 위험의 불평등을 논한 많은 학자 중에서도 울리히 벡을 택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벡의 위험사회론에 대한 주요 비판점이 위험의 불평등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요,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벡의 말처럼 위험의 보편성을 주장하다 보니, 위험의 분배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을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이었죠. 저는 이런 비판점에 의문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정말 그럴까 하고 말이죠. 책을 읽을수록 벡 역시도 위험의 불평등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험이 드러난 결과는 보편적일 수도 있지만, 위험의 발생과 대응에서는 벡 역시도 불평등함을 인정하고 또 강조하고 있다고 보여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벡의 위험사회론은 ‘위험의 보편성과 불평등성을 동시에 설명하고자 했던 시도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했어요. 현대 문명으로 발생한 위험(Risk)은 전통적인 계급 관계로만 환원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위험의 부담은 제3세계에 이전되는 한편, 글로벌 리스크는 국경을 초월하여 발생한다는 점에서 말이죠.Q4. 위험의 보편성과 불평등성이라는 관점이 흥미롭게 들리네요. 그렇다면 이번 학술대회에서 기억에 남는 주제나 발표가 무엇이셨는지도 궁금합니다.이번 학술대회는 특히 영남권에 소재한 3곳의 국립대학인 △경북대학교 △경상국립대학교 △부산대학교의 철학과 대학원 선생님들과 함께 교류했다는 점에서 뜻깊었는데요. 특히 ‘사회 병리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현대 사회의 문제를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들며 불교철학 또는 분석철학 등으로 접근하고 있어서 신선했고 재밌었던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저는 경상대 철학과 황우성 선생님께서 캉킬렘의 논의를 중심으로 생명체로서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관계를 발표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정상과 병리의 구분이 고정된 게 아니라 각각이 가치에 따라 규범성을 띤다는 점을 선생님의 발표를 통해 새롭게 배운 것만 같아요. 기회가 되면 캉킬렘의 책을 한번 읽어보고 싶을 정도였네요.Q5.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부탁드립니다.저는 이번 영남권 학술대회가 첫 발표였는데요. 미흡한 글이었지만 논평자셨던 차봉석(경상대 철학과 박사수료) 선생님께서 부족한 점을 짚어주셔서 앞으로 어떻게 글을 쓰면 좋을지를 고민하게 됐던 시간이었어요. 또 여러 철학 분과의 선생님들과 서로의 연구 결과를 공유하면서 많이 배우기도 했고, 앞으로도 이런 계기가 많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음 영남권 학술대회는 경상대학교에서 개최된다고 들었는데, 그때 다시 참여하고 싶네요! 이번 학술대회에 참여하신 모든 선생님과 교수님들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자세히보기나만의 세계를 세우려는 시도에 대하여 2025년 영남권 철학과 대학원 연합학술대회 발표 후기 황우성 경상국립대 철학과 석사과정 1. 논문을 쓰기 전 2024년 가을학기에 우리 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하게 되었다. 학기를 마무리할 즈음, 경상국립대학교, 경북대학교, 부산대학교 연합 학술대회가 2월에 열린다는 공지가 있었다. 논문 발표를 희망하는 경우 참석 의사를 밝히라는 연락을 받았고, 이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논문을 미리 써보면서 지난 학기에 배운 내용을 정리해볼 겸, 석사 졸업 논문을 준비하는 발판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아 논문을 작성해 보기로 결정했다. 이 글은 논문 발표회 참가 후기이지만, 사실 나에게 더 중요한 고민이었던 논문 작성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발표회 자체보다는 논문 쓰기에 대한 감상이라고 할 수 있다. 논문의 주제는 지난 학기 수업 교재였던 캉길렘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병리적인 것’ 개념과, 캉길렘의 스승 격인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에서 마찬가지로 언급되는 ‘병리적인 것’ 개념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두 철학자가 공통적으로 다루는 개념이라는 점과, 둘 다 프랑스 철학자라는 점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고 새로운 생각할 거리들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졌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학부 때는 동기였지만 나보다 한참 먼저 대학원에 입학한 친구에게 여러 조언을 구했다. 그 친구는 논문을 쓸 때 단순히 학기 중 배운 내용을 정리하는 ‘레포트’적인 접근을 넘어,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글쓰기 방식과 학술적 규범을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학부 시절 졸업 논문을 쓸 때 나는 나만의 철학적 글쓰기를 시도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아, 전부 갈아 엎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되돌아보면 일종의 나만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만들어보려 시도했다가 쉽지 않아 포기했던 것 같다. 그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친구가 말했던 그러한 종류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나만의 형이상학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없고 그보다는 다른 유형의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하지만, 어쨌든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여 논문을 써보기로 했다. 2. 논문을 쓰면서 논문의 서론에서는 병리적인 것에 대한 캉길렘과 베르그손의 입장, 그들의 관계, 그리고 이 주제를 다루는 이유를 서술하고, 본론에서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새롭게 생각해볼 거리들을 제시한 후 결론으로 마무리하는 글을 쓰자는 틀을 정해놓고 글을 썼다. 글을 쓰고 보니 공통점과 차이점은 단순 나열식이 되었고, 새롭게 생각할 거리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처음에 전체적인 구조를 잡기 위해 작성했던 초안 이후로 글이 더 이상 써지지 않았다. 다행히 친구의 도움을 받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추가하고 보완하면서 논문을 정리해 나갔지만, 결국 애초에 의도했던 ‘새롭게 생각해볼 거리’는 논문에 포함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논문의 전반적인 내용은 병리적인 것에 대한 베르그손과 캉길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탐구하는 과정과 그러한 과정이 가지는 의미가 어떠한지에 대하여 논의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논문 제출일이 다가오면서 지도 교수님께 검토를 요청드렸다. 교수님께서는 논문 전반에 대한 피드백을 주셨는데, 제출일이 촉박했고 나 스스로는 바쁘다는 핑계를 됐지만, 사실은 나의 능력 부족과 공부의 부족으로 교수님께서 피드백 주신대로 충분한 수정을 하지 못했다. 결국, 여러 미비한 부분이 남은 채로 논문을 제출하게 되었다. 교수님께서는 문장에서 문장으로 넘어갈 때 단순히 글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써야만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논문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넘는 글쓰기라고 말씀해주셨다. 이러한 조언을 염두에 두고 다시 논문을 들여다보니, 문장을 구성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다가도, 동시에 왜 그렇게 써야 하는지 조금씩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논문을 쓰기에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 3. 논문을 쓰고 난 후 논문을 제출한 후, 논평자의 논평을 받고 그에 대한 답변을 준비했으며, 발표일에 발표를 마쳤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로, 앞으로 철학 공부를 하면서 일상에서 떠오르는 철학적 문제의식을 잘 기록하고, 관련 서적이나 논문을 찾아보는 시간을 따로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논문을 쓰는 데에는 문제의식과 이에 대한 기존 연구를 충분히 공부하는 과정, 그리고 나만의 고민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두 번째로, 이번 논문을 쓰면서 배운 논문을 쓸 때 필요한 마음가짐과, 다른 사람들의 저서와 논문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도 중요하게 기억해두자고 결심했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 그리고 논문을 쓴다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물론 어느 정도 공통적인 스펙트럼이 존재하기에 철학사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같이 이야기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개별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나는 이제야 철학 공부를 시작한 철학과 대학원생이다.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글쓰기를 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번에 배운 것들을 잘 갈무리하고 발전시켜 나가도록 노력할 것은 분명하다. 황우성 경상국립대학교 들뢰즈랩 연구원이자 동 대학원 석사과정생이다. 신지영 교수의 지도 아래 현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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