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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선생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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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조식(曺植)은 조선조 연산군 7(1501) 6월 26일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兎洞)에서

아버지 언형(彦亨, 官承文院判校), 어머니 인천이씨(仁川李氏 忠順衛 菊의 딸) 사이의 35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본가는 삼가판현(板峴)에 있었고, 토동(兎洞)은 선생의 외가다

선생의 자는 건중(楗仲), ()는 남명(南冥)이다.


5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선생은 아버지가 장원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이사해서 아버지에게서 문자를 배웠다. 9세 때 큰 병을 앓았는데 어머니가 이를 걱정하자 "하늘이 나를 생()함이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할 리 없다"하고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했다 한다


소학기(小學期)에 들어서서는 이윤경(李潤慶), 이준경(李浚慶)형제, 이항(李恒) 등과 죽마고우로 자라면서 학업을 닦았다. 아버지가 단천군수(端川郡守)로 외임(外任)에 나아가자 잠시 거기에서 지내면서 경전자사(經典子史)와 천문, 지리, 의방(醫方), 수학, 궁마(弓馬), 진법(陣法) 등 남아가 갖추어야 할 모든 지식과 재능을 익혔고, 특히 자기의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느라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 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한 의기는 18세 때 서울로 돌아와 성수침(成守琛)과 성운(成運) 종형제(從兄弟)를 만남으로써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그들의 의기가 염담(恬淡)하고 그들의 정신경지(精神境地)가 고초(高超)하며 그들의 도덕 문장(道德文章)이 방결청아(芳潔淸雅)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이왕의 짙었던 속기(俗氣)를 떨쳐 버리고 보다 높고 넓고 깊은 인생의 경지를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유서외(儒書外)에 노장(老莊)과 불서(佛書)를 섭렵하기도 하였다.

20세에 생원진사양과(生員 進士兩科)에 1, 2등으로 급제했다. 남명은 좌류문(左柳文)을 좋아하고 고문(古文)에 능하여 시문(時文)이 아닌 고문(古文)으로 시권(詩卷)을 써서 시관(試官)들을 놀라게 하고 그 글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기 까지 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죽고 숙부인 언경가(彦慶家)가 멸문(滅門)의 화를 입자 이를 슬퍼하고 시국을 한탄한 선생은 벼슬을 단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고향인 삼가(三嘉)에 장사지내고 삼년 여묘생활(廬墓生活)을 하였고 가난과 싸우면서 민생들의 고초가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남명 사상속에 항상 민생을 잊지 못한 것은 이 때 생민(生民)의 어려움을 실제로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31세 때 산사(山寺)에 가서 성리대전(性理大典)을 읽다가 허노재(許魯齋)가 말한 "이윤(伊尹)의 뜻을 뜻으로 하고 안연(顔淵)의 학()을 학()으로 하여, 벼슬에 나가면 유익한 일을 하고, ()에 처해서는 지조를 지킨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같아야 할 것이니, 벼슬에 나아가서도 하는 일이 없고, 산림에 처해서 지킨 것이 없으면 뜻한 것, 배운 것을 무엇에 쓸 것이가. " 한 구절을 읽다가 홀연히 깨달은 바 있어 다시 육경사자(六經四子)및 주정장주(周程張朱)에 전념했다.


32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金海)에 이사하여 거기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안정된 공부에 들어가니 태산에 올라 사해를 바라보는 기상을 길렀고 한사존성(閑邪存誠), 악립연충(岳立淵沖)하는 학문과 인격을 닦았다. 여기에 성대곡(成大谷), 이청향당(李淸香堂), 이황강(李黃江), 신송계(申松溪) 등 명류(名流)들이 모여들어 기묘사화 이후 퇴상(頹喪)했던 사기를 응집, 재기를 도모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48세 때 18년 간 학문기반을 닦던 김해를 떠나 다시 고향인 토동(兎洞)에 돌아와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한편으로는 후진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처사(處士)로서 언론을 발하여 국정을 비판하였다. 김해에서의 18년 생활은 급기야 사림의 기풍을 다시 진작하는 힘이 되어 사림은 그를 영수(領首)로 추앙하기 시작했고, 이를 안 조정에서는 그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그를 벼슬길로 나오도록 했으나 모두 사퇴했던 것이다. 이 때 선생의 학문과 인격, 그리고 사상과 정신은 널리 알려져서 오덕계(吳德溪), 정내암(鄭來庵), 노옥계(盧玉溪) 같은 기성학자들이 문하에 들어와 사림의 종사(宗師)로 추대되었다. 특히 여기서 올린 이른바 단성소(丹城疎)가 조정을 놀라게 하고 사림을 용동(聳動)케 하자 선생의 명망은 극치를 이루었다. 벽립천인(壁立千仞)이니, 태산교악(泰山喬嶽)이니, 추상열일(秋霜烈日)이니 부시일세(俯視一世)니 하여 선생의 선비로서의 기상을 사람들이 추앙하고 경도(傾倒)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뇌룡정(雷龍亭)에 있던 시대다. 선생의 학덕이 더욱 익어가고 명망이 더욱 높아지자 조정에서는 더욱 예우를 하고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여 선비의 고고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61세가 되자 선생 일생의 마지막 도장(道場)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덕산의 사윤동(絲綸洞)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60년 동안 갈고 닦고 쌓아올린 자신의 학문과 도덕과 인격과 정신, 사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많은 영재들을 모아 가르쳤다. 과연 선생의 일생은 이 산천재에서의 만년(晩年6172)을 잘 장식함으로써 우리나라 선비로서는 최고, 최선의 전형이 되었다. 그것은 여기서 길러진 학생들이 조선 선조시대의 정치, 학술계를 움직이는 주역이 되었고, 특히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항왜토적(抗倭討敵)한 절의지사(節義之士)들이 대부분 선생 문하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66세에 징사(徵士)로서 포의(布衣)로 왕과 독대하여 치국지방(治國之方)과 학문지요(學問之要)를 말했다. 선조가 등극하자 여러 번 소명했으나 가지 안고, 헌책(獻策)을 진언(陳言)했으나, 조정의 호현(好賢)은 허명(虛名)일 뿐, 반영되지 않아 속히 헌책(獻策)을 실행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71세 때의 일이요, 국정에 대한 마지막 발언이었다.


72(1572)되던 해 28일 천수(天壽)를 다하고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윤동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다. 운명 전 문병 온 노옥계(盧玉溪), 김동강(金東岡), 정한강(鄭寒岡), 하각재(河覺齋)에게 이는 하늘의 일월(日月)과 같은 것으로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니 힘써 지행(指行)할 것을 당부하였다. 부문(訃聞)이 발하자 조정에서는 제물(祭物)과 제관(祭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사림은 모두 곡()하여 만장(輓章)과 제문을 올렸다


선생이 선비로서의 외길과 천자(天子)도 신하로 삼을 수 없는 선비가 있다는 고훈(古訓)을 몸소 실천하여 선비의 고고탁절(孤高卓節)한 기상을 보여 주었기에 사류(士類)들은 비로소 긍지를 갖게 되었고, 벼슬아치는 탐완(貪頑)을 부끄러워 할 줄 알았다.

선생 사후나라에서는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최근 업데이트 일시 : 2022/09/26 15:1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