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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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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서원(德川書院)

소재지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慶南 山淸郡 矢川面 院里)

건물양식사진참조

건립연대: 1575(410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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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서원(德川書院)의 유래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선생이 죽은 뒤 그의 제자들에 의해 건립된 서원이다.

처음에는 덕산서원(德山書院)이라 이름하여도산(陶山), 옥산(玉山)과 더불어 삼산의 하나로서 당시의 규모는 삼산(三山)중 가장 컸다고 한다.

처음에는 남명 조식선생의 위패(位牌)만을 봉안(奉安)했다가 최수우당(崔守愚堂)이 사절(死節)하자 수우당(守愚堂최선생(崔先生)을 종사(從祀)했다.

10년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병화(兵火)로 소실되자 진백곡(陳栢谷), 이모촌(李茅村), 하창주(河滄洲등이 중건했으며 광해원년(光海元年1609)에 사액(賜額)되었다.

그후 이 서원은 경상우도 유림의 본산(本山)으로서 춘추(春秋)에 한 번씩 회강(會講)이 있었으며 회강시(會講時)청금록(靑襟錄)(院生錄) 7()이 전한다.

정조 때의 명신(名臣)채번암(蔡樊岩)이 판서(判書), 영상(領相)을 지낼 때 각각 원장(院長)을 맡아보는 등 일시의 성황을 이루었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숭덕사(崇德祠), 경의당(敬義堂), 동무(), 시정문(時靜門), 세심정(洗心亭)이 있는데 수년전 국가보조로 담장과 홍전문(紅箭門), 서무(西),관리인사(管理人舍)가 지어졌다.


사적(史蹟)으로서의 의의

우리나라 유림은 서원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서원을 뿌리로 하여 인재교육과 청의(淸議)가 집약(集約)되었다.

그러한 기능을 담당한 서원중 가장 손꼽히던 곳이 이른바 삼산(陶山,玉山,德山)서원이었다.

또한 덕천서원은 남명선생이 만년에 인재를 길러내던 산천재와 2Km거리에 있어 남명선생의 유덕을 숭모하였다.

사적지로 지정되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산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다.



최근 업데이트 일시 : 2022/09/26 16:12:53